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36)
336화. 밝음을 겨누다 (4)
제갈문호가 웃으며 물었다.
“차는 입에 잘 맞으십니까?”
“음, 아주 괜찮군요.”
“허허, 장주님께서 오신다고 하기에 특별히 최고로 좋은 찻잎을 구해 놓았습니다.”
“차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뭣도 모르는 사람은 그저 비싸기만 하면 제일인 줄 알지요. 날씨, 찻잎을 말린 정도, 습도, 끓이는 방법과 적당한 온도를 맞추는 것까지 세밀하게 들어가면 끝도 없는 것이 다도(茶道)이거늘.”
“과연 박학하십니다. 장주님의 해박함이 여느 석학들을 눈 아래로 본다고 들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취미 삼아 건드려 본 정도입니다. 아랫사람들이 일을 잘해 준 덕에, 시간이 남아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있지요.”
“그 위치까지 오르실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오셨습니까. 다 장주님께서 이뤄 내신 일입니다. 자부심을 느끼셔도 됩니다.”
“허허허.”
아부와 진심 어린 칭찬은 한 끗 차이다.
그런 면에서 제갈문호는 실로 사람을 대할 줄 알았다. 스스로를 낮추는 데에 과함이 없고, 상대를 배려하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송국현(松國賢)은 그런 제갈문호가 마음에 들었다. 명성 자자한 제갈세가의 가주요, 무림맹의 군사라 깐깐한 사람일 줄 알았거늘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인상이었다.
송국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무림 제일의 연맹이거늘, 맹의 최고위 인사인 군사님의 거처치고는 참으로 소박합니다그려.”
제갈문호가 빙긋 웃었다.
“과한 치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워낙 바쁘기도 하여 보기 좋은 것보다는 실용적인 부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더군요.”
바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뱉는다. 꼬인 사람이 들으면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 바쁜 사람을 만나자고 한 꼴이 되니까.
송국현이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에서 가장 바쁜 분께서 이리 시간을 내주셨으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갈문호가 손사래를 쳤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맹의 업무가 제아무리 바쁘다 한들, 귀인(貴人)과의 독대를 거절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물며 맨손으로 시작해 중원 경제의 거목으로 성장하신 분인데, 제가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해도 모자라지요.”
“허허허.”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이룬 노력과 결과를 보고 감탄해 준다. 송국현은 제갈문호가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제갈문호가 물었다.
“그나저나, 중원 최고의 전장을 이끄는 분께서 어인 일로 기별도 없이 이 모자란 사람을 찾아오셨습니까?”
중원 최고의 전장.
처음 전장을 세웠을 때부터 중원 제일을 노린 송국현은 전장의 이름 자체를 중원전장(中原錢莊)이라고 지었더랬다.
흔하다면 흔하고, 야심 차다면 야심 찰 수 있는 이름.
그 이름은 지금 전설이 되었다. 열두 살의 나이로 세상에 나와 삼십 년 만에 중원삼대전장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송국현의 나이 쉰다섯인 지금에 와서는 그중 최고라 칭송받는 전장이 되었다.
대륙 경제에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일대 거인. 중원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巨富)라기엔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이지만, 두 눈에 깃든 지혜와 총기만큼은 제갈문호에 뒤지지 않았다.
송국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는 돈보다 귀한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그중 하나가 시간입니다. 바쁘신 분께 기별도 없이 왔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허허.”
“이 사람이 전장 일을 하면서 꽤 여러 사람과 친분을 나누었습니다. 현재 하남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의 좌포정사(左布政使)인 우공(禹恭) 선생도 그중 하나지요.”
승선포정사사.
위지휘사사가 지역의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를 통괄하는 기관이고, 도지휘사사가 한 개의 성을 총괄하는 군정(軍政) 기관이라면, 승선포정사사는 한 성의 통치를 담당하는 행정 기관이었다.
승선포정사사는 좌우(左右) 포정사를 수장으로 둔다. 말하자면, 송국현은 하남성 최고위 행정 기관의 수장과 연을 맺은 셈이었다.
“한데 얼마 전, 우공 선생께서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탁이라니요?”
“제갈세가 측에서 관리들을 초청하여 관부 측 상황과 동태를 알아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송국현이 말을 이었다. 상당히 위험한 말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담담하고 침착했다.
“우공 선생께서 많이 불편해하시더군요.”
“그러셨군요.”
송국현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 대답은, 진정 제갈세가가 관부 측 동태를 살피고 있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데, 굳이 거짓말로 순간을 모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하물며 중원전장의 수장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쓸데없는 거짓말로 대화의 즐거움을 퇴색시키고 싶진 않군요.”
송국현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관림불침조약.
제국과 무림은 서로에 관여하지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갈세가는 지금 그 유서 깊은 조약을 독단적으로 어긴 것이며, 심지어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까지 했다.
송국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갈문호는 제갈세가의 가주이며, 해박한 지식과 깊은 지혜로 유림(儒林)에서도 존경받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이리 위험한 일을 벌인 것일까?
“그 이유를 말씀드리기 전에, 저 역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장주님께서는 혹, 고위급 관료들과 거래를 하고 계시는지요?”
송국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고위급 관료들과의 거래? 표현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뇌물을 주고 이득을 보고 있냐는 말이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었다.
송국현은 이번에도 침착했다.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제 주머니를 털어 관리들에게 돈을 쥐여 준 적은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다만, 그로 인해 큰 이득을 보는 등의 불공정한 거래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전장의 공금을 빼돌린 적도 없지요.”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내 비록 과거지사가 깨끗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람을 대한 경험만큼은 제갈문호보다 앞서 있는 그였다. 제갈문호의 눈이 날카롭다 한들, 송국현이 작정하고 표정을 관리하면 진심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장주님께서는 상계의 거물이십니다. 그런 분께서 관리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이 돈을 쥐여 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를 취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만,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갈문호의 얼굴이 서서히 바뀌었다.
무표정한 얼굴. 사람이 한자리에서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변화였다. 송국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관림불침의 조약을 어긴 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여러 문제가 터질 것입니다. 조약을 어긴 제가 할 말은 아닙니다만, 관부 측에서도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
“저였다면, 아니 어느 정도 관록이 있고 정치를 아는 사람이면 직접 연락을 해 왔을 것입니다. 제아무리 사정이 있다 한들 말이지요. 한데 뜬금없이 장주님께 부탁하여 제게 말을 전하는군요.”
“군사님.”
“제가 왜 관부 측 동태를 살피고 있느냐 물으셨습니까? 답해 드리지요.”
우우웅.
제갈문호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맺혔다.
순간 송국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건강을 위해 양생술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제갈문호는 세상이 알아주는 초절정고수였다. 그만한 고수의 살기 어린 눈빛을 대하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관부를 장악하려는 불손한 무리가 있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불손한 무리가 막강한 무력을 지닌 미지의 조직이라는 사실도요.”
“……!”
“이미 그 조직의 고수들이 위지휘사사와 도지휘사사에 관리로 침투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런 놈들이 행정 기관인 승선포정사사라고 놓쳤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위지휘사사, 도지휘사사, 승선포정사사는 각자가 하는 일이 다르다.
세 기관은 서로에게 신기할 정도로 관여하지 않았으며, 덕분에 각 기관 자체가 지극히 독립적이었다.
그래서 제갈문호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확신했다면, 이미 하남성 관부 전체를 어떻게 요리할지 진즉에 작전을 세웠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장주님께서는 황실과 관부를 전복하려는 미지의 조직을 알고 계셨습니까?”
“모, 몰랐습니다.”
“정말입니까? 혹, 이미 그들과 손을 잡으신 건 아닙니까?”
“군사님!”
“아니면 장주님과 연을 맺은 관리들이, 이미 그들에게 포섭된 것도 모르고 인연을 유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송국현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지기도 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할지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송국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제갈문호가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민감한 사안인지라 장주님의 마음을 떠보려고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
“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좌포정사 어른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여쭈어본 것이니, 부디 부족한 이 사람을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복잡한 얼굴로 제갈문호를 바라보던 송국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별거 아닌 심정으로 찾아온 길이거늘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야 할 듯싶습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셨군요. 역시 지혜가 대단하십니다.”
불손한 무리가 황실과 관부를 전복하려 한다.
이것은 천하가 경악할 만한 정보였다. 한데 제갈문호는 그런 정보를 송국현에게 스스럼없이 말해 주었다.
즉, 송국현을 이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신화교와 연관이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절대 놔주지 않을 것이다.
송국현이 물었다.
“진정 그러한 세력이 있다면, 관부 측 최고위 인사들과 직접 만나 보시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까 싶어 부득불 과격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어.”
“장주님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그때 지금의 무례를 사죄드리겠습니다. 먼 길 오셨는데, 참으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국현이 입맛을 다셨다.
“말씀드렸듯 이 사람은 바쁘지 않습니다. 무림맹 구경도 할 겸 며칠 눌러앉아 보지요.”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화를 내거나 분을 삭이는 건 물론이요, 본인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 송국현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구구절절 떠들어 봤자 의미도 없을 것이고, 화를 내 봤자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도 알게 하는 것. 송국현이 상계의 거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한데 그 조직의 이름이…….”
그때였다.
“군사님. 멸사군장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제갈문호의 눈빛이 또 한 차례 돌변했다.
“드시라 해라.”
“예.”
잠시 후.
드르륵.
문이 열리고, 거대한 도끼를 든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