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49)
349화. 암투(暗鬪)의 승자 (3)
화르르륵!
충천하는 화광의 색이 점점 밝아졌다.
화기(火氣)의 농도가 더 짙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사그라들던 생기(生氣)가 작은 불티만 있어도 되살아나는 산불처럼 다시 거세졌다는 것이다.
당관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증화독(增火毒)을 썼는데도 멀쩡하단 말이지?’
증화독은 그의 체내에 결집한 독정(毒精)에서 꺼내쓸 수 있는 백여덟 가지 독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화기(火氣)를 더하는 독이었다.
독기(毒氣)는 그 특성상 불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바, 오히려 수렴과 증폭을 통해 화기를 일순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는 게 바로 증화독이었다.
화약과는 다르다. 화약은 폭발을 일으키지만, 증화독은 생화학 작용으로 인간 근본의 화기를 건드린다.
당관은 그걸 쓴 것이다. 요뢰의 무공을 보고, 그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화기를 쏟아부어 몸이 버티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한데 죽기는커녕 사그라들던 생기가 다시 본래대로 돌아온다?
후욱!
하늘 높이 치솟던 불꽃이 요뢰의 단전으로 쑥 들어갔다.
“커헉!”
요뢰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그래도 몸에 무리가 가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화르르륵!
홍련순화공이 재차 가동되며 또다시 강렬한 화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상을 입었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울혈을 뱉어 시원해진 듯 얼굴에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부서진 오른 주먹은 회복하지 못했지만.
“재미있군.”
요뢰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하독(下毒)의 순간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화약을 쓴 건가?”
“그거야 네놈이 알 바가 아니다. 그나저나…….”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죽지?”
승부에 임했을 때, 당가인(唐家人)은 절대 교만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천한 놈이니 잡것이니 했지만, 당관의 눈은 끊임없이 요뢰의 약점과 한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도로 농락했고, 힘으로 밀어붙여 봤으며,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자 장법과 각법으로 독의 배출구를 박아 넣은 것이다.
한데 죽지 않았다. 실패한 것이다.
쿵!
요뢰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과연 당가의 수장다웠다. 화통한 승부를 바랐거늘, 이따위 꼼수나 쓰다니.”
당관이 피식 웃었다.
“승부에서 낭만을 찾는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들을 못 봤다. 인생은 삶과 죽음의 연속이야. 승부의 미학이란 죽이고 살아남는 것임을 알아라.”
“그거 좋은 강의로군.”
요뢰가 으르렁거렸다.
“죽이고 살아남기, 어디 한번 해 보도록 하지.”
콰앙!
요뢰가 달려들었다.
이전과 다르지 않은 속도였다. 빠르지만, 당관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퍼퍼펑!
요뢰가 좌장을 휘둘렀다.
당관이 아니라 그의 주변을 향해서였다. 애초에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회피할 곳을 차단한 것이다.
콰르릉!
당관의 좌우로 거대한 불의 벽이 생겨났다. 신화교의 절기, 열화신장(熱火神掌)의 쌍화벽(雙火壁)이었다.
그때까지도 당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 요뢰를 바라볼 뿐이었다.
요뢰가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콰앙!
당관이 선 자리에 큼직한 구덩이가 생겼다.
피할 곳은 두 군데. 허공과 후방이었다.
당관의 선택은 허공이었다. 신법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요뢰가 사방으로 열화신장을 뻗었다. 놀랍게도, 부서진 오른손에서도 화염 줄기가 치솟았다.
화르르르륵!
거대한 화염의 강이 순식간에 대지를 휘감았다.
반경 십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화염이었다.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듯, 요뢰의 얼굴 역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대를 만들었군.’
상대의 독이 자신에게도 통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자신만의 무대를 만든 것이다.
‘나쁘지 않아.’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 생사결의 기본이다.
‘하지만.’
번쩍!
허공에 떠 있던 당관의 몸이 일순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보여 주던 신법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찰나지간 요뢰조차 당관을 놓쳤을 정도였다.
파아앙! 파앙!
충격파가 당관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단숨에 좌측 이십여 장 밖으로 이동한 당관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한 자루 작은 비수가 들려 있었다.
마침내 꺼내 든 비수. 화광을 받아 번뜩이는 비수 날이 요사스러운 광채를 뿜어냈다.
당관이 손목을 튕겼다.
피유우우우웅!
일직선으로 날아간 비수가 화염의 벽을 뚫고 요뢰의 어깨 앞까지 도달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요뢰가 재빨리 상반신을 틀었다.
퍼엉! 퍼억!
단숨에 쌍화벽의 마지막 벽까지 뚫은 비수가 작은 바위에 박혔다.
요뢰의 화기와 발경을 생각하면, 그 관통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쌍화벽의 방해가 없었다면 바위 네다섯 개는 우습게 뚫고 들어갔을 위력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관이 두 손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피피피피핑!
일곱 자루의 얇은 비수가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묵비의 화살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빠른 속도였다.
이렇게 된 이상 화염의 강과 벽을 둘러쳐 거리를 둔 의미가 없어진다.
요뢰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퍼퍼퍼퍼펑!
불꽃을 뚫고 지나간 비수가 요뢰의 후방으로 날아가 땅과 바위, 나무에 박혔다.
당관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그렇군.’
저 불꽃의 장벽은 단순히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감각을 공유하고 있단 말이지.’
비수가 화벽에 닿은 순간을 읽어 낸다. 요뢰가 비도칠연(飛刀七連)을 기가 막히게 피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요뢰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콰릉!
어지럽게 넘실거리던 화벽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되어 당관에게 질주했다.
극치에 이른 기공술이었다. 권법가임에도, 기공에 대한 이해가 높아 이런 식의 장거리 공격도 가능한 것이다.
독을 피하고, 비수의 공격을 읽어 내며, 나아가 원거리 전투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이런 짓을 벌이는 것.
가히 초일류라는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일 상대가 평범한 무림인이었다면, 동등한 경지라 한들 이런 전투 방식에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당관이었다.
“……재미없는 놈이군.”
다시 한번, 파악 완료다.
번쩍!
당관이 질주했다.
화염의 벽으로 보호받는 요뢰를 향해서.
‘뭐지?!’
무섭도록 확대되는 당관의 기세를 느끼며, 요뢰는 잔뜩 긴장했다.
‘무슨 자신감으로?’
뭐가 되었든,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수 합 만에 공략법을 떠올려서, 자신이 알아서 쓰러지게 만든 놈이었다. 순화공의 화정(火精)을 든든히 채워 두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열양공을 익혀 놓고도 불에 타서 죽을 뻔했다.
‘뭐가 되었든, 넌 절대 날 이기지 못할 것이다.’
웬만한 내상이나 탈골, 과다 출혈은 물론 내장이 상해도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정의 회복력이었다.
‘얼마든지 받아 주마.’
번쩍!
요뢰가 전면으로 화염을 집중시켰다.
콰르르르릉!
화룡(火龍)이 땅을 깨부수며 당관을 향해 쏘아졌다.
‘분명 움직일 것이다.’
이 화력을 정면으로 받아 낼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좌우나 허공으로 날아들어 자신을 공략할 터.
‘난 준비가 됐다. 얼마든지 피해 봐라!’
그때였다.
쾅!
요뢰의 눈이 흔들렸다.
“뭐?”
쾅! 콰쾅! 콰앙!
전면에서 화탄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화탄이 터지는 건 아니었다. 굉음은 비슷했지만, 폭발력이 달랐다.
‘대체 무슨 짓을?!’
설마 자신의 몸에 화기를 불살랐던 그 수법으로 화벽을 터트리고 있는 건가?
짧은 순간, 요뢰는 쏘아 내던 화염에 의념을 집중했다.
콰앙!
‘큭!’
요뢰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동조된 감각으로 전해지는 충격파가 너무 거셌기 때문이다.
‘이놈…….’
요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정면으로 깨부수고 있다고?!’
콰르릉! 콰콰쾅!
무지막지한 발경으로 화염의 폭풍을 박살 내는 당관.
그리고.
후욱!
소매가 다 타 버린, 그러나 드러난 살갗은 너무나도 멀쩡한 손 하나가 요뢰의 목을 노리고 뻗어 왔다.
파악!
요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당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너무 지독했다.
그 순간, 당관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부아아아아앙!
당관에게 모여든 화염 폭풍이 그 회전력을 따라 하늘 높이 솟구쳤다.
바로 그때, 당관의 몸에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빛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암기였다.
파바바바바박!
화벽으로 먼저 방위를 알아챌 때와는 체감 속도가 차원이 다르다.
요뢰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였다. 쏟아지는 암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요뢰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 거대한 몸으로 전면을 가득 메운 암기 세례 대부분을 피해 내는데, 뛰어난 동체 시력과 유연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 많은 암기를 모조리 피할 순 없었다. 요뢰의 어깨, 복부, 허벅지, 상완 등 여러 부위에 네다섯 개의 작은 암기들이 박혔다.
치이이이익!
“크윽!”
요뢰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암기에 맞은 부위가 허연 연기를 토해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열양공이 아니었다. 이건 독이었다. 독 중에서도 융해(融解)에 있어선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화골산(化骨酸)이 암기에 발라져 있었던 것이다.
피슉! 피슉!
요뢰는 재빨리 홍련화의 진기를 운용해 화골산의 침투를 막았다.
물론 화골산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뢰 정도의 고수가 뿜는 진기는 화골산의 독력보다 밀도가 높다.
치이이이이익!
근육을 넘어 뼈까지 침투하던 화골산이 모조리 증발했다.
그리고 그 잠깐 새에.
당관이 요뢰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요뢰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애송이.”
당관의 손이 요뢰의 가슴 정중앙을 후려쳤다.
퍼억!
“컥!”
요뢰가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생각보다 충격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솟구치던 진기를 산산이 흩어 놓는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던지라, 일순간 강제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당관은 바로 그 틈을 노렸다.
퍼버버버버벅!
일곱 번의 장력이 도장을 찍듯 요뢰의 상반신 전체를 찍었다.
훅!
사방을 뒤덮던 화염이 요뢰를 향해 모여들었다.
“힘을 비축하려는가? 소용없는 짓이다.”
휘이이이잉!
산불이라도 난 듯 사방을 태우던 불꽃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렸다. 요뢰가 모조리 빨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더군. 그래서 그리 허점이 많은 건가? 젊었을 적, 저 멀리 남만(南蠻)에서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던 기괴한 놈들과 몇 번 싸운 적이 있었는데, 놈들도 너와 비슷했더랬지. 그놈들 역시 회복력 하나만 믿고 무모하게 달려들더라, 이 말이야.”
당관이 손을 들어 보였다.
치이이익!
그의 손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팔다리가 잘리거나 내장 하나가 날아가도 죽지를 않더군. 그래서 내가 어찌한 줄 아느냐?”
요뢰가 핏발 선 눈으로 당관을 노려보았다.
당관이 하얗게 웃었다.
“오장육부를 통째로 녹여 버렸다.”
당가천독수(唐家千毒手).
입문은 쉽지만, 대성하기는 도반삼양귀원공에 필적한다는 당가 절정의 수공(手功)이었다.
그리고 당관은, 칠 년 전 천독수를 대성했다.
“전설상의 강시가 아닌 바에야, 내장 기관이 다 녹고도 살 수 있는 놈은 없지.”
주르르륵.
요뢰의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당관이 비수 한 자루를 들곤 허공에 일자로 선을 그었다.
서걱!
요뢰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분리된 상체에서 검붉은 피와 녹아내리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살덩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미있었다, 덩치 큰 애송이.”
몸을 돌린 당관이 타 버린 소맷자락을 툭툭 털었다.
“옷이 상했군. 쯧, 나도 멀었어. 벌레 하나 잡자고 옷까지 태워 먹다니, 창피해서 원.”
퍼어엉!
한 줄기 폭음과 함께 요뢰의 시체가 꺼멓게 타들어 갔다.
그렇게 오호무장 요뢰가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