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65)
365화. 강자의 권한 (7)
쉬이이익!
시퍼런 검날이 허공을 베고 지나갔다.
검의 움직임 자체는 유려한데, 그 속도와 날카로움은 유검(柔劍)과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검을 다루는 검사의 마음이 잔뜩 날이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사, 연지평이 충혈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제법 큼직한 바위가 가만히 앉아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파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연지평이 무서운 쾌검을 휘둘렀다.
사사사사삭!
불안정한 감정 상태임에도 검첨의 한 치 길이로 바위의 표면을 베고 지나가는 정교한 검술을 구사했다. 배우고 익힌 무공이 몸에 완전히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파바바바바박!
바위에서 돌가루가 튀어 올랐다.
예리함과 정교함이 돋보이는 검술이었지만, 진기의 섬세함 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진기를 제대로 실었다면 돌가루가 튀기도 전에 검풍에 스러졌을 것이며, 조금 더 예리했다면 돌가루 자체가 튀지 않았을 것이다.
기술은 몸에 익었지만, 심리적인 문제로 인해 진기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보다도 연지평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익!’
이를 악문 연지평이 냅다 좌수를 날렸다.
쿠웅!
바위가 크게 들썩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위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무게도 실로 대단할 것이다. 그런 바위를 반쯤 띄워 버릴 정도이니, 참으로 대단한 내공이었다.
그러나 연지평은 만족하지 못했다.
카앙!
단숨에 검을 땅에 박아 넣는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고작 이 정도구나.”
연지평이 탄식을 내뱉었다.
“고작 이 정도야.”
객관적인 경지만 두고 봤을 때, 연지평은 아버지인 연위는 물론 형인 연호정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 두 사람은 무종지벽을 돌파한 것을 넘어, 태산의 칠부와 팔부를 거니는 진짜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지평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로 절정고수의 영역에 도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연호정이야 이미 지나쳐 온 길을 되돌아간 것이기에 빨랐을 뿐, 재능으로는 감히 연지평에 비할 순 없다.
앞으로 오 년, 십 년 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텐가.
연호정이 최고의 무공과 뒤를 돌아보지 않는 추진력, 헤아릴 수 없는 생사결로 사십 대에 이르러 완성한 흑암제로서의 경지를, 연지평은 순수한 노력만으로 삼십 대에 이룰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금이었다.
“후욱!”
숨을 크게 내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연지평은 복잡한 눈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약하다. 너무 약해 빠졌어. 이렇게까지 무력한 놈이었구나, 나는.’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무림맹에서 형에게 가르침을 받고 난 이후였을 것이다.
연지평은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재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고, 덕분에 가능과 불가능을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연지평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더 정교하고 확실하게 보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더욱 통렬한 패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정도 실력으로는 아버지와 형님께 아무런 도움이 안 돼.’
만약 자신의 실력이 지금보다 월등했다면.
정녕 그랬다면, 이번 싸움에 자신도 참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혈육이라서? 어려서? 그렇지 않다.
형님이지만, 연호정 역시 이번 전투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그런데도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도 모자라 크나큰 전공을 세우고 돌아오지 않았는가.
‘즉,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연지평이 눈을 감았다.
‘멀었구나.’
인정받지 못한 사실이 슬픈 게 아니었다. 진짜 슬픈 것은, 자신이 약해서 형님을 거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보다 강해서 이번 싸움에 함께했다면, 그래서 형님이 해야 할 일을 조금이나마 분담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형님이 자리에 눕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럼 자연히 아버지의 얼굴에 깃든 수심도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연지평이 혼란을 느끼고, 나아가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
그건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좋아도, 내 가족에게 힘이 되지 못한 순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연지평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강량이 있었다.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는 거, 처음 봐.”
“아! 형님 오셨습니까.”
강량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위를 보았다.
그물 같은 검상 수십 개가 그어진 바위는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듯했다.
강량의 눈빛이 돌변했다.
차아아아앙!
발검(拔劍)과 함께 시퍼런 검광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찰칵.
어느새 뽑은 검을 휘두른 강량이 착검했다.
발검, 참격, 회수의 세 단계가 무척이나 빠르고 정교했다. 이전의 강량에게선 보지 못했던 귀신같은 솜씨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쩍!
착검을 한 뒤에야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직선형 검경(劍勁)이었다. 어찌나 예리한 일격이었는지, 잘린 바위의 단면이 유리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연지평은 크게 놀랐다.
강량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떠냐? 내 일검(一劍)이.”
“대, 대단하십니다.”
“그래? 난 아직 부족해 뵈는데.”
“아닙니다. 그처럼 빠르고 정교한 쾌검은 아버지 이후로 처음 봐요. 정말 대단하세요.”
“고맙다.”
“한데 대체 언제 그런 검기(劍技)를……?!”
“글쎄다? 네가 네 아버지와 형님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던 시간에?”
연지평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단순히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그 안에 심상치 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강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평소에 항상 침착하고 예의가 바르던 너였다. 한데 지금의 너는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구나. 갈 길 잃은 분노로 진기마저 흔들리고 있어.”
“…….”
“가주님과 형님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냐?”
귀신처럼 정확한 안목이었다.
연지평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지만, 왠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연지평의 표정을 살피던 강량이 툭 던지듯 물었다.
“지금의 내 검이 대단하다고 했지?”
“예? 아, 예.”
“너는 그리 봤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지금 내 눈에는 검로(劍路)를 뒷받침해 줄 힘의 부재가 보인다. 예리함은 살렸지만, 그 예리한 참격을 밀어붙일 근본적인 힘이 부족한 것이지.”
“……!”
“힘을 채우면 또 속도 제어가 버거워질 것 같다. 속도를 제어하고 나면 예리함을 살리기가 힘들어지겠지. 그렇게 차근차근 해결해 가다 보면, 다시 또 힘이 부족해질 때가 올 거야.”
강량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검도(劍道)에는 정말 끝이 없어. 검은 곧 무도(武道)이니, 무도 역시 끝이 없겠지.”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내려 다시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지평.”
“……예.”
“넌 무엇을 하고 있었지?”
“…….”
“가주님과 형님 두 분께서 비밀리 힘든 임무를 수행하러 가셨다? 걱정스러운 일이지. 안타까운 일이기도 해. 만약 그 두 분께서 내 힘을 인정했다면, 내가 전력(戰力)으로서 인정을 받았다면 이번 임무에 데려갈지 말지 고민이라도 하셨을 거야.”
“…….”
“하지만 너와 마찬가지로 난 그 임무에 함께하지 못했다. 내가 흑도 출신이라서?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한데, 그게 어쨌다는 것이지?”
“예?”
“나는 전력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내가 말하는 전력에는 임기응변 능력, 실전 경험, 안목 등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어.”
“…….”
“즉, 날 데려가지 않은 건 단순히 무공이 약해서만이 아니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지.”
“……!”
연지평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다. 하지만 강량처럼 저리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자괴감이 들었고, 아버지와 형님에 대한 걱정이 지나치게 컸다. 형님이 다쳐서 돌아온 사실에 화가 났고, 그 분노는 스스로에 대한 강한 실망으로 표출되었다.
그렇다면 강량은?
“그렇다고 이미 사지(死地)로 떠나 버린 두 분이 돌아올 때까지 손가락 빨면서 걱정이나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진즉 열심히 하지 못했나, 왜 진즉 그만한 경험을 쌓지 못했나 하늘을 보고 한탄이라도 할까?”
“저는…….”
“그 두 분을 보내고 내가 한 일은, 밤잠을 줄여 가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강량이 손가락으로 연지평을 가리켰다.
“지금 너처럼 바위에 화풀이를 하는 건 진정 검을 휘두른 게 아니야. 나는 그 모든 걱정과 분노를 애써 잊고, 오로지 검에 빠져들었다. 왜냐? 걱정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하니까.”
“……!”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어. 즉, 이미 출맹한 순간 남겨진 사람은 두 분을 믿는 수밖에 없다. 살아 돌아올 거라고, 마땅히 임무를 달성할 거라고.”
“…….”
“문제는 나야. 두 분을 믿고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걱정? 내가 온종일 두 분을 걱정한다고, 실패할 임무가 성공하게 될까?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공했을 임무가 실패로 돌아갈까?”
“…….”
“자신을 지나치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재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 너나 나나 검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족속들이야. 그렇다면 한번 지나면 돌아오지 않을 하루라는 시간을 오로지 본인에게 투자했어야지.”
강량이 바위를 가리켰다.
“이것이 그간 내가 얻은 결실이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적어도 어제의 나보다는 나아졌어. 열흘 전의 나로선 막연했던 검격이었고, 한 달 전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결과물이야.”
연지평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량은 그러지 마라, 그래선 안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대답을 바라지 않는 화두를 던졌고, 그 상황에서 자신은 어찌 처신했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연지평은 부끄러웠다.
그는 지난 십 수일 동안 무공 수련은커녕 혼란스러운 마음을 바로잡기도 바빴다. 그러나 강량은 곧바로 현실을 직시했고, 나아가 검에 매진하여 지금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졌구나.’
재능은 땔감이다. 질 좋은 땔감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불은 더 강하게 타오르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땔감은 어디까지나 불씨가 있어야 타오르는 법, 재능에 불씨를 날려 주는 것이 바로 노력이다.
노력은 단순히 매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상태를 보는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주변 상황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노력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강량은 그것을 해 냈다. 덕분에 이토록 놀라운 검법을 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끄러미 연지평의 얼굴을 보던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쫓아가고 있던 대상이 정체를 겪으면 쾌재를 부를 줄 알았는데, 어째 좀 짜증이 나더군.”
“예?”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강량이 몸을 돌렸다.
“정상이 높을수록 산을 타는 맛도 있는 법이지. 너는 십 수일 전에 내게 정복당한 야산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넌 나의 흥미도 끌지 못할 만큼 무너져 버렸어.”
“……!”
“다시 큰 산이 되어 다오.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내 눈에 불이 붙게 해 다오. 나 또한 너의 가슴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태산이 되어 천하를 굽어보고 있겠다.”
연지평의 눈에 생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