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67)
367화. 나아갈 길 (2)
“그래서, 그놈은 깨어났소?”
“그렇소.”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약해 빠졌구려. 산더미만 한 도끼를 휘두르고 다니느라 몸이 삭기라도 한 모양이오. 보약이라도 한 제 지어 줘야 하는 거 아니오?”
꽤나 공격적인 어투였지만, 이것이 당관의 말투였다.
나아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싸운 전우였으니, 이전보다 더 마음이 간다. 연위는 웃으며 답했다.
“본디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난 상처가 더 깊다고 하였소.”
당관이 뜨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놈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그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리요?”
당관이 생각하는 연호정은 천하의 개백정에,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희대의 성격 파탄자였다. 일대 협객으로 추앙받는 제 아비와는 닮은 구석이 손톱만큼도 없는 몹쓸 놈인 것이다.
물론 지닌 바 무공이 출중하고 머리도 좋으며 눈치도 빠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빈말로도 연호정이 착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 싸가지가 되려면 강철 같은 마음가짐이 필수다. 차라리 태산이 무너졌다는 말을 믿지, 연호정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가 없었다.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호정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외다. 그저 녀석이 건드린 일들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감당이 되지 않았을 뿐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그간 호정은 삼교 측을 신경 쓰랴, 모용가주를 견제하랴 발 빠르게 뛰어다녔소이다. 사람은 신경 쓸 게 많으면 피곤해지는 법, 그간 알게 모르게 피로가 많이 쌓였다고 하더이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웃기는 말이외다. 그놈은 자신의 역량을 잘 알고 있는 놈이오. 수습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손도 대지 않았겠지.”
만약 지금의 연호정이 당관의 말을 들었다면 엄청 머쓱해 할 것이다.
“그 또한 맞는 말씀이오.”
“놈이 쓰러진 것에 대단한 이유는 없소. 정신력 부족, 체력 부족이오.”
지나치게 단정적인 말이지만, 또한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를 정신력으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정신력에 한해서 연호정은 천하제일을 논해도 손색이 없다.
문제는 그의 정신력을 육체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왕왕 있기도 하지만, 연호정만큼 심신의 괴리가 지나치면 무조건 파탄이 나게 되어 있다.
오히려 연호정이 그간 벌인 일을 생각하면, 그 피로가 지금에야 터진 게 용할 지경이었다.
당관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그놈 덕을 보긴 했소이다. 녀석이 놈들을 제대로 파지 않았다면, 신화교인지 망할교인지 하는 놈들이 하남성 군부와 행정 기관을 장악, 중원 전체를 뒤흔들 뻔했소.”
“맞는 말씀이오.”
중원 대륙에서 하남성은 중부에 위치한다.
바둑으로 치자면 중앙 천원(天元)이 적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천원이 적에게 잡히면 대국에서의 승률은 급전직하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심지어 싸움다운 싸움을 해 보기도 전인 상황이라면 사태는 더더욱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잘 대응하면 적들을 고립시킬 수 있겠지만, 자칫하다간 중원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어떤 의미로 연호정은, 이번 작전만으로 중원 전체를 구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관이 연호정을 인정하는 이유였다.
“문제는 놈들이 하남성 관부에만 암약하고 있었느냐인데…….”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지역을 건드리진 않았을 것이오. 그러기엔 놈들이 하남성에 파견한 전력이 지나치게 대단했소.”
“음, 그건 그렇소.”
신화교 몰래 암습으로 선공을 가해서 하나하나 무너트렸기에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만약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 많은 초절정고수와 관부의 힘으로 무림맹 전체가 고립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남성에는 소림사까지 있으니, 그 피해가 더 커졌을 것이다.
투입된 고수들의 무공, 경험, 그리고 정보력의 우위 덕에 큰 피해 없이 승리를 맛볼 수 있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투입된 고수 중 절반 혹은 그 이상이 삼도천을 건넜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말로 빛나는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소. 우리는 신화교, 그 망할 놈들만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소. 하지만 그 전에, 신경 써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소.”
“음?”
“신화교가 다른 곳에 고수들을 침투시켰다면, 그건 정말 섬뜩한 일이 될 것이오.”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다른 지역에도 침투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하지 않았소?”
“지역이 문제가 아니외다.”
“하면?”
“황궁.”
“……!”
당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렇다. 그것을 잊고 있었다.
연위의 얼굴 역시 덩달아 굳어졌다.
“맹의 고수들과 정보력, 그리고 인맥 등으로 관부에 암약한 신화교 측 고수들을 물리칠 수 있었소. 하지만 황궁은 다르오.”
“……다르지.”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당관조차 황궁이라는 단어 앞에선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황궁이란 곧 제국의 심장이자 머리다.
사람은 팔 하나가 잘려도 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머리가 날아가고 심장이 뽑혀도 사는 사람은 없다.
만약, 신화교가 황궁을 장악하고 있다면?
“그런 일은 없소.”
창밖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관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고, 연위는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그’가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위가 말했다.
“같이 싸운 전우였다고는 하나, 명백한 타인임은 분명하오. 타인의 대화를 엿듣는 것도 모자라 대화에 불쑥 참여하는 것은 썩 바르다고 보기 어려운 일이외다.”
“들어가도 되겠소?”
동문서답이다. 당관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부가 통째로 녹고 싶다면 어디 그래 보시든가.”
대놓고 독을 풀겠다는 소리였다.
그냥 하는 협박이 아니라서 더 무서운 말이었다. 사천당가의 주인이 하는 말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면, 들어가겠소이다.”
츠츠츠츠.
당관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살기가 뻗어 나왔다.
연위가 살짝 손을 들어 당관을 진정시켰다.
“이왕 예까지 오신 것, 일단 올라오시구려. 따로 하실 말씀도 있으신 듯한데.”
“알겠소.”
잠시 후, 일 층과 이 층을 지난 모용군이 방으로 들어섰다.
당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가로 뛰어들지 않은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내 거처도 아니거늘 함부로 창가에 드나들 수는 없지.”
“말 잘했군. 여기는 내 거처고, 나는 댁을 보기가 싫은데? 얼굴 봤으니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군.”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후회하실 텐데?”
뜻밖에도 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지금 내가 기분이 영 안 좋다는 거지.”
“…….”
“후회는 나중에 할 테니 이만 꺼져 주시게나. 한 줌 독수로 생을 다하고 싶지 않거든 말이야.”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아쉽구려.”
“뭐가 말인가?”
“당신과 내가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꽤 괜찮은 조합이 되었을 것을.”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는 듣기가 힘들군. 셋을 세기 전에 나가지 않으면 그대로 녹여 버리겠다.”
그때, 연위가 입을 열었다.
“당가주. 우선 얘기부터 들읍시다.”
“연가주는 빠지시오. 저 인간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귀가 자꾸 먹먹해지는 기분이오.”
연위가 모용군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 모용가주는 크나큰 야심만큼이나 똑똑한 사람이오. 쓸데없이 싸움을 벌이는 성격도 아니니, 얘기나 한번 들어 봅시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연가주께서 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면 시작부터 분위기가 상큼할 뻔했소. 참으로 대단하시구려.”
“과찬이시오.”
가만히 둘을 보던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소 대여는 해 주겠소. 나중에 술 한잔 사시오.”
“당가주.”
“이따 갈 때, 아랫것들에게 방 청소 싹 해 놓으라 전해 주시오. 코가 예민해서 썩은 내가 나는 곳에선 못 자거든.”
연위는 당황했다. 당관이 진짜로 나갈 기세였기 때문이다.
그때, 모용군이 말했다.
“이왕이면 당가주께서도 여기 계시는 게 좋을 것이오.”
“시끄럽군.”
“맹주 선거에 관련된 일이오.”
순간 당관이 멈칫했다. 동시에 연위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모용군의 미소가 흐릿해졌다.
“앉아도 되겠소?”
“…….”
“말씀이 없으시군. 하면 서서 말하리까?”
연위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나직이 한숨을 쉰 당관이 제자리로 돌아와 쿵!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앉아서 들을 테니 서서 말씀하시게. 의자가 없어.”
“그거야 상관없소.”
모용군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연위가 다소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맹주 선거에 관련된 일이라 하셨소?”
“그렇소.”
“……싸움 하나 끝났다고, 벌써 숨겨 둔 발톱을 드러낼 생각이시오?”
연위답지 않게 상당히 공격적인 어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화교를 향한 모용군의 살기가 진짜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즉, 지금은 맹주 자리를 놓고 대화를 할 때가 아니었다. 한데 대놓고 맹주 얘기를 꺼내다니, 연위로서는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오. 아니, 오히려 반대요.”
“반대라니?”
“맹주 선출, 다음 해로 미룹시다.”
“……!!”
설마하니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연위와 당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상대도 크게 놀랐다는 걸.
당관이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해 줬으면 하는데.”
“간단한 말이오. 연가주 말마따나 싸워야 할 적이 있는데, 차기 맹주니 선거니 하는 짓거리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소이다.”
“……!”
“그렇다고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을 맹주로 앉힐 수도 없는 노릇. 천만다행히도 무림맹은 잘 유지되고 있소. 아니, 유지 수준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지.”
“…….”
“지금 당장은 가만히 놔두어도 괜찮소. 다음 맹주 선거는 놈들을 어느 정도 박살을 내 놓고 난 이후에 치러도 괜찮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봉공회의에 발의할 생각이오?”
“그렇소.”
“…….”
“그래서 찾아온 것이오. 손을 들어 달라고.”
가만히 모용군을 노려보던 당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것 때문에 맹주 선거를 다음 해로 미뤄야 하지?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을 맹주로 세워 삼교와의 싸움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게 더 낫다고 보는데.”
“옳은 말씀이오. 하나는 놓쳤지만.”
“뭐?”
“놈들의 정체를 봉공회의에 알리지 않은 것은 세작이 침투했을 가능성 때문이오.”
모용군이 공격적인 어조로 말했다.
“당가주께서는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겠소?”
“흐음.”
“물론 봉공 하나하나를 조사해 봐야겠지. 하지만 두 분도 알다시피 그들은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수장들이오. 각 잡고 조사해도 한세월인데 맹주 선거를 하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오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위가 물었다.
“선거를 내년으로 미룬다 한들 당신이 뒤에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잖소?”
모용군이 씁쓸하게 말했다.
“날 못 믿으시는군.”
“그렇소.”
“……하긴,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따로 제안할 거리를 가져왔소.”
“무엇을 말이오?”
“합군.”
“합군?”
“유군 부대 두 개를 하나로 합치도록 힘을 써 보겠소. 그리고 그 수장을, 탕마군장이 아닌 멸사군장이 맡도록 힘을 써 드리리다.”
“……!!”
“탕마군장이 멸사군장 밑으로 들어가는 거요. 말하자면, 탕마군장의 생사여탈은 멸사군장의 손에 달려 있소. 그리고 탕마군장은, 십 년 만에 오롯이 얻은 내 동생이외다.”
“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모용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내가 허튼짓을 하고 있다 생각되면, 우의 목을 베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