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78)
378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3)
후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귓가를 살랑였다.
사락.
바람과 함께 날아온 나뭇잎이 눈을 감은 연호정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한 줄기 광채가 뿜어졌다.
피유우우우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철전 한 발이 정확하게 나뭇잎을 노렸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퍼억!
짧게 올려 친 백룡부가 철전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 빠름과 매서운 관통력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쉽게 쪼개 버린 감이 있었다. 신병(神兵)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끼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힘의 수급이 완벽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묵비가 시위를 튕겼다.
피피피피핑!
보이지 않는 화살이 다섯 발이나 쏘아졌다.
무형탄 오연발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직선으로만 쏘아진 게 아니었다.
어떤 화살은 직선으로 날아가고, 어떤 화살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온다. 어떤 화살은 다소 느리게 날아갔고, 또 어떤 화살은 반응조차 하기 힘들 만큼 빠르게 날아갔다.
상대의 대응에 혼란을 더하는 기가 막힌 궁술이었다.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쌍부를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무형탄 다섯 발이 시간을 두고 파괴되었다.
후웅.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에 나뭇잎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피이이이이잉!
표적을 놓치지 않은 묵비가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 화살 한 방을 날렸다.
구룡파천궁, 용아포였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지는 화살은 화포와도 같은 위력을 자아냈다.
번쩍!
허공 높이 날아올라 나뭇잎 앞에 선 연호정이 흑백쌍룡부를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콰앙!
공기가 뒤흔들리며 연호정의 몸이 살짝 뒤로 날아갔다.
우우우웅!
날아가면서도 발끝으로 경력을 뿜어낸다. 뒤로 훅 하고 밀려난 나뭇잎이 연호정의 몸을 따라 활강했다.
묵비가 다급하게 화살을 날렸다.
피피피피피핑!
무종지벽을 돌파한 궁수의 화살은 한 수, 혹은 두 수 이상의 고수라도 반응하기 힘들 만큼 빠르고 강력했다.
퍼퍼퍼퍼퍼퍼펑!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을 막아 내는 연호정의 도끼질은 더 이상 경지의 수준을 논할 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극도로 날카로운 기감으로 화살의 움직임을 모조리 꿰뚫어 본다. 동시에 그 순간에 가장 효율적인 사신무를 구사하며 최소의 움직임,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 방어하는데,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만한 실력이었다.
스륵.
사뿐히 바닥에 내려선 연호정이 쌍부를 허리춤에 걸었다.
“쳇.”
파라라락!
기가 막힌 신법으로 날아온 묵비가 그의 앞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다섯 합이면 뚫을 줄 알았는데.”
“화살이 한층 빠르고 날카로워졌어. 힘의 수급도 자유자재야. 확실히 예전보다 수준이 올라갔어.”
“그래 봤자 나뭇잎 하나 맞히질 못한걸요.”
“내가 막고 있었잖아.”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완전히 익숙해졌어. 고맙다.”
연호정 정도가 되면 처음 쥔 병기라도 달인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한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병기를 용도에 맞게 잘 다루는 것을 넘어, 완전히 자신의 무(武)에 녹아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병기에 대한 연호정의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았고, 도끼와 맨손 박투에도 능했기에 단시간 안에 흑백쌍룡부를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묵비가 물었다.
“확실히 광룡부와는 느낌이 다르네요. 일격의 파괴력은 줄어들었지만, 더 빠르고 정교하다는 느낌이에요.”
“병기의 형태와 무게의 차이지. 게다가 광룡부는, 말하자면 창(槍)과 도(刀)를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파괴 병기야. 일격의 파괴력은 천하 어떤 병기에도 뒤지지 않지만, 응변의 기지 없이는 방어와 연환격에 약점이 생길 수밖에 없지.”
“반면 흑백쌍룡은 변화와 연환격에 능하고, 그만큼 방어에도 특출난 거군요. 일격의 위력은 줄었지만요.”
“맞아.”
“뭐, 그것도 연 공자 수준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겠네요. 아닌 말로, 광룡부의 파괴력은 거의 공성병기라 부를 만큼 엄청나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거라면, 굳이 그만한 파괴력이 필요하진 않죠.”
“대신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를 상대할 때는 좋지. 특히 합공이 필요할 때 말이야.”
묵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많이 어렵나요?”
“뭐가?”
“연 공자는…… 이미 궁극의 영역에 도달해 본 사람이잖아요.”
흑암제 시절의 무공을 말하는 것이리라.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지금 나의 깨달음은 흑암제 시절의 그것이지. 다만 육체와 내공의 괴리가 아직도 상당해.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글쎄. 단숨에 그 경지에 다다를 만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군.”
“신기해요. 중원의 무(武)는 보통 불가와 도가의 신공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맞는 말이야.”
“즉 육체와 내공이 부족해도 깨달음이 궁극의 영역에 닿아 있다면, 신(身)과 기(氣)가 그 깨달음에 맞추기 위해 무섭게 발전한다고 알고 있어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신무는 불가나 도가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해. 물론 그 근원을 따지자면 영향을 전혀 안 받지는 않았겠지만, 사신무는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배제한 철저한 투쟁술이지. 그래서 거창하게 필살기(必殺技)라 부를 만한 초식도 없어. 그저 그 순간, 그 전투에서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적을 참살하는 것이 주목적이야.”
“주작공이라고 했던가요? 그게 살법이라면서요?”
“살법은 살법일 뿐이야. 물론 후반 초식으로 갈수록 위력도 상승하고 살기도 짙어지지만, 기예의 효율성 차이지 위력에 중점을 둔 건 아니거든.”
“복잡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복잡한 무공이라서 고민하는 맛이 있었나 보다. 차라리 여타 흔한 무공처럼 초식이 딱딱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편했겠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연호정은 사신무야말로 속세의 싸움에 있어 최강의 무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한 형(形)을 지니고 있지만, 때에 따라 자유로이 변형할 수 있다. 그래서 연성키 어렵고, 그래서 달인이 되면 어떤 순간이라도 대응할 수 있다.
즉, 사신무를 연성하는 것만으로도 초식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급상승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연성하는 사람은 열불이 날 만큼 어렵겠지만.
“근데요.”
“응?”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 공자가 나이 오십 전에 그만한 경지를 이룩했다면, 처음 사신무를 연성했을 때부터 전반적인 기량 향상이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것도 꽤나 크게.”
“뭐, 그건 그렇지.”
“아무리 사신무가 깨달음의 무공이 아니더라도, 이미 연 공자는 그 경지를 밟아 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상해서요. 사신무는 전장의 무공이라 생사의 싸움에서 그 발전과 효용이 극대화된다고 했는데, 어째 연 공자의 무공 상승이 예전과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
“아, 그렇다고 연 공자의 수준이 낮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엄청난 거죠. 나는 아직 연 공자가 거하는 경지의 꼬리도 못 보고 있는걸요. 다만…….”
묵비가 멋쩍게 웃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모르게 연 공자는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거든요. 하루가 지나면 또 한 차례 성장해 있고, 그걸 따라가려고 이 악물고 노력했는데도 고개를 들어 보면 어느새 더 멀리 나아가 있고.”
“음.”
“그래서 요즘은 이 사람한테도 인간적인 면이 있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묵비 딴에는 제법 조심스럽게 한 말이었지만, 연호정이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그러게? 묵비의 말도 일리가 있는데?’
사신무가 깨달음의 무공은 아니지만, 그가 처음 회귀했을 때를 생각하면 분명 육체와 진기가 무섭게 성장하긴 했었다.
물론 사신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벽라진결 덕분이기도 했고, 흑암제로서 이룩한 경지에 기공에 대한 이해와 효율이 가득했기에 누구보다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뭐지.’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정체되고 있는 건가? 나도 모르게?’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가득 박여 있던 손은, 어느새 진기가 활성화됨에 따라 다시 반들반들해졌다. 굳은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흑암제 시절처럼 그리 두껍지는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 나름대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노력이 지나치게 관성적이었나.’
그렇지는 않았다.
연호정은 매 순간 분명한 목표를 갖고 노력했다. 그의 눈은 흑암제 시절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 영역에 오르기 위해 진기가 항상 바짝 날이 서 있었다.
한데 왜 예전과 같은 성장은 없을까? 묵비 말마따나 진즉 걸어왔던 길인데? 하물며 치열한 전투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연 공자.”
“…….”
“연 공자?”
“응? 어? 왜?”
묵비가 헛기침을 했다.
“생각 중에 미안한데, 아버님께서 오셨어요.”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연위가 있었다.
“아버지.”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중이었느냐?”
“아, 예.”
순간적으로 고민이 깊었지만, 아버지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연호정이 표정을 바로 했다.
“모용군 건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
“어떻게 되었답니까?”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더구나.”
“그 말씀은……?”
“성공이다. 양 부주가 길을 터 주기로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가주의 얼굴을 보니 암묵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 모용군.”
나름의 소득을 얻었음에도 연위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연호정이 좋은 말로 그를 달랬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모용군은 철두철미한 자입니다. 묵룡부와의 관계를 대외적으로 드러내 파묻어 버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이걸로 양천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이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연위가 모용군에게 부탁할 때 제시한 것이 바로 묵룡부와의 관계를 묻어 두겠다는 것이었다.
명문 정파의 수장이 흑도 연맹의 수장과 거래를 했다? 외부에 알려지면 그야말로 천하가 뒤흔들릴 일이다. 모용군의 정치적 생명이 완전히 말살됨은 물론, 그의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모용세가 역시 진흙탕 속으로 빠지게 된다. 구주명가처럼 무림공적으로까지 몰리진 않겠지만, 앞으로 영영 어깨를 펴지 못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위, 정확히는 연호정은 그것을 조건으로 모용군을 움직이려 했다. 말하자면 어음이지만, 실효성 하나만큼은 확실한 어음으로 상대와 거래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모용가주를 쓰러트릴 패 하나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저…….”
“예?”
“그저 답답해서 그렇다. 세상 사람 마음이 전부 나 같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로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 투왕 양천 역시 걷는 길은 다를지언정 신의를 알고 배포가 있는 호협(豪俠)이라 생각했거늘, 결국엔 그도 속세의 욕망에 눈이 먼 일개 무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구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욕망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지요.”
“그래, 그런 모양이다.”
연위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찌 되었든 묵룡부주와의 거래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이제는…….”
“저희가 날뛰어야 할 시간이군요.”
“그렇다.”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묵 부장.”
묵비가 고개를 숙였다.
“네, 대수님.”
“의정군 전원 두 시진 뒤까지 남방대문 앞으로 집결하라 전하라.”
“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암살계의 제왕이라…… 역시 ‘그’ 명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