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390)
390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4)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형.”
“…….”
“제가 반갑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강해졌군.”
“하하, 사형답습니다. 칠 년 만에 보는 사제에게 건네는 인사치고는 너무 딱딱해요.”
“왠지 어려워서.”
“제가요?”
“속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천재. 본사의 무승들을 전부 합해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린아라 불리던 자네가 이제는 한 문파의 수장이 되었잖은가.”
“칭찬이 과하십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금강권문(金剛拳門)이라 하였지? 자네가 이끄는 문파.”
“그렇습니다.”
“본사를 제외, 하남에서 손에 꼽히는 문파라고 명성이 자자하더군.”
“다 소림본사의 지원 덕분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어찌 본문이 이만큼이나 컸겠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능글맞은 성격은 그대로다.
하지만 범오는 이철경을 무시하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 달리 이 녀석은 신중하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소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성격이 맞지 않아 대하기가 다소 껄끄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사제는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문주가 되어서 이리 밖으로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건가? 천하의 이철경이라 하면 후기지수 중 제일을 논하는 실력자이거늘.”
“하하, 그것도 다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옛날에도 후기지수 중 제일이란 말은 들어 본 적 없는걸요.”
범오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
“예. 그리고 탕마군장 모용우도 있지요.”
범오는 순간 팔 한쪽과 발등이 시큰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벽산호장.’
본사의 큰 어른, 방장 공공대사가 보는 앞에서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기지수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폐관과 면벽으로 소림의 무(武)를 경지에 이르도록 연성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약관이 갓 지난 청년에게 몇 합 만에 박살이 난 것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아니,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범오가 생각했을 때, 연호정은 지나치게 치사한 방법으로 싸움을 이끌었다.
그것은 정파의 싸움이 아니었다.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었단 말이다. 기습을 하는 것도 모자라 발등을 밟고, 감각을 현혹시키는 그런 술수들은 결코 백도 정파의 무공이라 할 수 없었다.
범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때는.
분을 못 이겨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그에게 깨달음을 안겨 준 것은 바로 공공대사였다.
‘미숙하도다. 비무를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법이거늘 고작 한 번의 패배를 겪었다고 평정심도 되찾지 못하다니. 네 녀석의 오 년 면벽은 다 헛것이었느냐?’
‘사백님! 그 작자의 무공은 정파의 무공이 아닙니다!’
‘하면? 사파의 무공이란 말이냐? 내가 보기엔 진기에 사기(邪氣)가 묻어 나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공(魔功)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본사의 신공 못지않은 성스러운 기운을 몸에 담은 정통의 신공이었거늘.’
‘그런 게 아닙니다! 기습이라니요? 정정당당한 비무에서 기습을 하고 발등을 밟았습니다! 그건 흑도의 무뢰배나 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하면, 네가 익힌 소림의 무공이 고작 흑도의 술수에도 대응치 못할 만큼 가벼운 것이었더냐?’
‘……!!’
‘패배는 패배다. 그것이 생사결이었다면, 너는 지금처럼 내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죽었을 거란 말이다.’
‘하, 하지만……!’
‘비겁한 술수라고 하였느냐? 하면, 연 군장이 비겁하지 않은 술수로 정면 대결을 하면 네가 이겼을 거라 생각하느냐? 제 실력도 다 꺼내지 않고 손쉽게 꺾어 버린 상대인데, 본 실력을 다 드러내면 대체 몇 합 만에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
‘골방에 틀어박혀 주먹질만 한다고 어디 실력이 는다더냐? 무공의 이치에는 통달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치를 육신으로 풀어 내지 못하는 무공은 반쪽짜리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네 무공은 그와 같다.’
‘…….’
‘패배를 겸허하게 수용하라. 승려가 되어 호승심이 지나친 것도 부덕의 소치라 여겨야 마땅하거늘, 이리 못난 모습을 보여 줄 줄이야. 아무래도 네 녀석에게 차기 나한당주의 직책은 지나치게 무거웠나 보다.’
‘바, 방장 사백님!’
‘나한당주란 소림의 무(武) 그 자체다. 단순히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소림의 무는 철옹성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무(武)에는, 상대의 어떤 수법에도 무너지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투쟁술도 포함된다.’
‘…….’
‘성품 이전에, 네 기량 자체가 나한당주에 어울리지 않는다. 실력이 모자라면 겸허하기라도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리 못난 모습을 보여 줄꼬? 나는 지금의 네 모습에서 강호의 삼류 잡배의 그림자가 보인다.’
‘……사백님?’
‘내, 오늘 너에게 크게 실망하였다. 오 년 동안 대체 무엇을 배운 것이야? 너 역시 재능만 믿고 활개 치다가 한 번의 패배로 부러져 버린 무수히 많은 고목(古木) 중 하나였던 게야?’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맹에 있든 본사로 돌아가든, 아니면 천하를 주유하든 막지 않겠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스스로의 변화에 자신을 갖기 전까지는 내 거처의 문을 두들길 생각은 말아라.’
독하디독한 말이었다.
범오는 공공대사가 누군가에게 그런 실망감을 표출한 걸 본 적이 없었다. 한데 그 대상이 자신이 된 것이다.
얼마나 실망스러우셨으면 그런 말씀까지 하셨을까. 패배감에 젖었던 범오는, 공공대사의 차디찬 말에 혼이 달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몇 달 동안, 범오는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 간간이 주먹질은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분풀이에 불과했을 뿐 수련이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무공을 배운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운공조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몸은 무거웠고 관절에는 녹이 잔뜩 슨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범오는 맹 내의 소림승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이철경을 찾아왔다.
“광동성으로 향한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방장 사백님께서 내리신 명이 있어서요.”
“무림맹의 유군 부대를 지원하러 가는 겐가?”
“그렇습니다. 광동성에는 저희 가문과 연이 있는 분들께서 은거하고 계십니다. 그분들과 함께 남부 무림의 분위기를 바로잡으라는 것이 방장 사백님의 명이었습니다. 물론, 유군 부대가 판을 정리한 이후의 일이지만요.”
이철경이 눈에 의아함이 맺혔다.
“한데 사형께서도 가십니까?”
“…….”
범오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골방에 틀어박혀 생각에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신이 지나치게 오만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오만은 곧 정저지와(井底之蛙)라는 사자성어로 귀결된다.
물론 깨달은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자네가 괜찮다면.”
“예?”
“내가 동행하는 것에 자네가 동의한다면, 이번에는 함께하고 싶네.”
이철경의 얼굴에 작은 놀라움이 피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범오 사형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만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데 사형이, 사제인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피로에 젖은 눈으로.
그 사실이 이철경에게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가 비록 일문을 이끄는 수장이라 하나, 사형께선 마땅히 저보다 더 어른이십니다. 사문의 어른께서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마뜩잖다면 내 따로 행동할 터이니 부담 갖지 말게. 자네 나름대로 임무가 중할 텐데, 사형이 되어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네.”
“……!”
범오를 보는 이철경의 시선이 묘해졌다.
‘방장 사백님께서 말씀하신 게 이것이었나.’
그는 공공대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네게 동행을 요청할 수도 있다. 한 번씩 ‘녀석’의 거처 앞을 지나치는데, 진기(眞氣)는 둔탁해졌을지언정 불같았던 기도에 조금씩 청아함이 묻어 나오더구나. 하나,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서 수행이나 하진 못할 것이다.’
‘예?’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녀석이니만큼, 만약 너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잘 보살펴 주도록 하거라. 물론 녀석이 움직일지는 모르겠다. 그저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말아라.’
이철경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방장 사백님께서 말씀하신 ‘녀석’이란 사람이 바로 자신의 사형, 범오였다는 것을.
‘사형께서도 변하고 계시는구나.’
분명 뭔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이철경이 미소를 지었다.
“사형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저야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 다만, 피해는 주지 않도록 노력하겠네.”
“하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외려 제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세.”
“한데,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
“남부에 따로 볼일이 있으신지요? 어인 일로 저와 함께 가려 하시는지가 궁금해서 그럽니다.”
범오의 눈이 깊어졌다.
“봐 두고 싶은 사람이 있네. 그저 그뿐이야.”
* * *
푸르르륵!
적풍이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적풍을 다독인 연호정이 드넓게 펼쳐진 광동성의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넓군.’
광동성은 상당히 더운 날씨를 자랑한다. 광동의 겨울이, 중원 북부의 가을과 비슷하거나 더 따뜻할 정도였다.
때는 봄날이었고, 광동의 봄은 생각보다 더 후덥지근했다. 내가고수들인 의정군에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세하게나마 체력을 깎아 먹을 요인이 될 수 있다.
‘뭐가 되었든 의정군을 함부로 끌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 일망타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섣불리 도시로 보내서는 안 돼.’
당대 음신, 즉 야율적은 광동성에 자리를 잡고 있다.
뒷세계의 거물인 만큼 묵룡부가 똬리를 튼 호남성에 비견할 만한 영향력을 자랑할 것이다. 당연히 도처에 정보원들을 배치했을 것이며, 의정군이 움직이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야율적에게 정보가 들어갈 것이다.
‘사음교.’
연호정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야율적은 사음교 출신의 고수라 하였다. 그 사실을 양천에게 전해 들었을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삼교로 한데 묶여 있지만, 흑암제 시절 가장 많이 부딪쳤던 주적이 바로 사음교였다. 당연히 신화교의 무장전(武將戰) 때와는 기분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은 마음을 다스렸다.
숙명의 적과 마주할 때마다 감정이 들쭉날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더욱 차분해져야 옳다.
주작기를 다독이며, 연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사음교 출신이라지만, 음신이 되기 위해서는 선대의 암살공을 완벽하게 체득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음신의 암살공은 명실공히 천하제일이야. 말하자면 야율적, 그놈은 사음교의 무공에 천하제일의 암살공까지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까다로운 적이었다. 음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자의 무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를 잘 아는 그였기에 긴장도 됐다.
‘다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내공으로 안력을 극대화한 그의 시야에,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산 하나가 들어왔다.
‘놈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게 다행이지.’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말했다.
“탕마군은 전방 좌측 야산에 대기한다. 멸사군을 삼십 리 거리에 하나씩 배치하여 정보 전달이 용이하게 하겠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촤르르르륵!
적풍의 안장에 묶어 두었던 교룡쇄와 광룡부를 들쳐 멘 연호정이 적풍의 등에 두 발을 디뎠다.
“시간 끌지 말고, 후딱 처리하자고.”
파아앙!
연호정이 달려 나가자 그 뒤를 멸사군이 따랐다.
음신과의 싸움, 중원 남부 뒷세계와의 일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