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0)
40화. 격(格)의 차이 (6)
“아버지.”
“들어오너라.”
연호정이 가주실로 들어왔다.
훅.
연호정이 들어서자마자 짙은 땀 냄새가 진동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수련 중이었더냐?”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쯤 할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연위가 연호정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처럼 장포를 걸치지 않고 착 달라붙는 무복을 입은 그였다. 땀에 젖은 무복은 몸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커졌군.’
연호정의 몸은 몰라보게 변화했다.
길쭉하기만 했던 두 다리는 적당히 부풀어 올라 철탑처럼 단단해졌다. 여전히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어깨와 흉부, 팔뚝이 예전보다 훨씬 탄탄했고 근육의 질도 선명해졌다.
넉 달만의 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다. 극한에 이른 훈련과 모자라지 않는 영양, 적절한 휴식은 물론 초회복을 가능케 한 내공 덕이었다.
물론 말이 쉽지, 누구라도 이러기 어려웠다. 애초에 뛰다가 쓰러질 정도의 훈련을 거르지 않은 것부터가 정신력이 남다르다는 뜻이었다.
“두어 달 전에는 오히려 더 말랐던 걸로 기억한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리지 않았더냐.”
“말씀 들었다면 여기까지 성장했겠습니까.”
실제로 두 부자는 거의 팔십 일 만에 보는 것이었다. 연위가 일부러 연호정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다니, 아들이지만 참으로 독한 놈이 아닌가.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것 같다.”
“예. 슬슬 변화를 줄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연위가 서류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가끔은 들러서 차 한 잔씩하고 가거라.”
연호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앉거라.”
“예.”
자리에 앉은 연호정이 물었다.
“한데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꼭 할 말이 있어서 불러야 하는가.
마음은 그랬지만, 실제로 일이 있어서 불렀다. 연위는 서류 몇 장을 빠르게 검토하곤 한옆에 둔 서신을 건넸다.
“네 앞으로 온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따로 서신이 올 게 있었나?
‘억?’
생각해 보니 한 군데 있었다.
연호정이 허겁지겁 서신을 열었다. 곧이어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의뢰비 내놔, 이 도둑놈아.
첫 구절을 읽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제기랄! 금세 조사 마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애먹었잖아! 댁은 알고 있었지? 그러네, 알고 있었네. 씨바, 쓸데없이 부탁 들어줬다가 내 돈만 왕창 깨졌소!
거지한테 돈이 웬 말이야? 이 인간은 자신이 후개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대부분 조사는 마쳤소. 두어 달 안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늦어져서 미안하우. 보름 후에 찾아갈 테니까 음식이나 맛깔나게 차려 놓으쇼. 내 입맛 만족 못 시키면 깽판 놓을 줄 알아.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고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결실이란 과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크게 맺힌다는 걸.
‘조사가 끝났군.’
조사한 내용도 서신으로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와서 얘기한단다.
‘둘 중 하나야. 기밀을 유지해야 하거나, 내용이 지나치게 방대하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보름 후라…… 조금 빠듯할 수도 있겠어.’
가득상이 충분한 정보를 알아 왔다면, 그때부터가 바로 연호정이 움직일 때다.
그전까지 몸을 최대한 정비해 놔야 했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게 강호다. 적어도 지금보다 한 단계는 더 성장해야만 한다.
“서신에 가득상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더구나.”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는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설마 개방의 후개냐?”
“그렇습니다.”
“후개와는 언제 연을 맺었더냐?”
“회합 때 맺었습니다.”
연위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너무 미세해서 그게 미소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
“잘했다.”
연위는 젊은이들이 개방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신까지 보낸 걸 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관계를 구축한 것 같았다.
“개방이 구대문파와 함께 거론되는 이유가 있다. 그러한 방파의 후계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굳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네 독한 성질머리를 받아 줄 사람이 어디 흔하겠느냐.”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보름 뒤에 찾아온다고 합니다. 손님으로서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십만개방의 후계자다. 하물며 아들의 친구라 하는데 당연히 환영이다.”
연호정이 서신을 품에 넣었다.
연위는 서신의 내용을 묻지 않았다. 아들이 굳이 말해 주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오늘 수련은 거기서 끝내겠다고?”
“예? 아, 예.”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마뜩잖은 내용이 있는지 끝까지 서류를 보던 연위가 몸에 걸친 장포를 벗었다.
“따라오너라.”
가주실 뒤편.
비연심법을 벽라진기로 변화시킬 때 들렀던 곳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아주 좋군.’
연무장의 상태도 상태지만, 잡다하지 않아서 좋았다.
연무장 중앙에 선 연위가 뒷짐을 진 채 물었다.
“여전히 창봉술을 익히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연위가 손으로 병기 거치대를 가리켰다.
“하나 골라 보거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병기를 골라 보라? 그 말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아버지와 비무라고?’
순간 연호정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와는 한 번도 비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께 지도를 받은 기억은 있지만, 극히 힘들었던 기억만 있었다.
거치대로 간 연호정이 몇 자루 창을 둘러보며 물었다.
“제대로입니까?”
“무슨 뜻이냐?”
“제대로 봐주실 겁니까?”
연위의 눈이 빛났다.
“그러지 않을 거면 굳이 널 불렀겠느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연호정이 창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냥 장창이 아니었다. 길쭉한 창날 좌우로 초승달 모양의 칼날이 달린 장병기, 바로 방천극(方天戟)이었다.
‘좋군.’
창대까지 통으로 철로 만들어져 무게도 굉장했다. 연호정은 방천극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걸로 하겠습니다.”
“설마 극도술(戟刀術)도 연마했느냐?”
“창봉술의 연장입니다.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위는 생각했다.
‘이게 최선이다? 훗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란 말이지?’
가만히 아들을 보던 연위가 마찬가지로 거치대에서 한 자루 검을 꺼내 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중검(重劍)입니까?”
연위가 멈칫했다.
“알아보느냐?”
“예에. 무게감이 보통이 아닌데요.”
연위가 든 것은 중원의 여느 패검(佩劍)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이 검은 명장(名匠)에게 부탁해 일부러 무겁게 만든 중검이었다.
연위는 아들의 눈썰미에 놀랐다.
‘병기의 성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군.’
대단하다. 이런 것은 감각 좋은 둘째도 못 보는 것이었다.
스르릉. 쿵!
땅에 떨어진 검집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올라오너라.”
연호정은 심호흡을 했다.
‘이거 긴장되는데.’
아버지는 강자다. 예전에 느꼈던 기파만으로 칠대세가 중 최고봉이라 느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호정이 긴장한 이유는 아버지가 강자여서가 아니었다.
터엉.
연무장으로 들어온 연호정이 견봉에 방천극을 걸쳤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서서히 자세를 낮추고 어깨에 방천극을 걸친 아들의 모습에서 빈틈 하나 없는 단단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네 무공을 봐주려 한 이유를 아느냐?”
연호정은 두근거리는 속내와 다른 말을 꺼내 들었다.
“아들의 무공을 봐주는 데에 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오늘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연위는 돌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왜 그러십니까?”
“……그 얘기는 대무(對武)가 끝난 이후에 말해 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연위가 자세를 취했다.
우우우웅.
강철검이 은은한 울림을 발했다.
연위의 자세는 독특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왼손으로는 뒷짐을 졌다. 오른손에 든 강철검은 하단으로 내렸는데, 심지어 시선도 연호정이 아닌 검 끝으로 두었다.
멋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자세. 그러나 아무리 봐도 실전적인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 군자연(君子然)한 모습 속에 드리워진 강철 같은 기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스르르륵.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의 예기.
극도로 연마된 내공이 신체를 안정적으로 잡아 주고, 하단으로 내린 검 끝은 단숨에 하늘을 가를 듯 막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언제부터일까.
연위에게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파가 서서히 연호정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섬뜩하리만치 예리한 기운이었다. 너무 날카로워서 차마 손을 가져다 대기도 겁날 정도의 기운이었다.
‘검극사기(劍極思氣)!’
벽산연가 오대신공 중 하나.
극에 이른 기운을 농축시켜 기질을 높이고, 기질을 높인 상태에서 다시 한번 극한까지 불린 절정의 신공이었다.
‘게다가 저 자세는…… 군자팔검세(君子八劍勢)로군.’
검극사기가 오대신공 중 하나라면, 군자팔검세는 연가의 삼대검법 중 하나였다.
즉, 연위는 연가 최고의 무공들을 펼칠 생각이었다. 위력이야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두 개의 절학을 동시에 꺼내 들었다는 것은 이번 비무에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뜻이리라.
연호정의 눈에서 푸른 광망이 일었다.
쿵!
힘찬 진각과 함께 방천극을 양손으로 쥔 연호정이 더더욱 자세를 낮추었다.
연위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저 파지법(把指法)은?’
마치 도끼로 나무의 밑동을 후려칠 것 같은 자세였다.
독특하기로는 군자팔검세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군자팔검세의 자세가 정(靜)적이라면, 연호정의 자세는 동(動)적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두 부자 사이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오너라.”
“갑니다.”
연호정이 연위를 향해 뛰어들었다.
투우웅!
땅을 박찬 소리가 마치 전고(戰鼓) 소리 같았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빠르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방천극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사선으로 쪼개져 들어오는 일격!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일격이었다. 혈육이 아니라 적에게 휘두르기라도 한 양, 살벌한 위력과 속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연위의 검이 부드럽게 중단으로 올라갔다.
카아아앙!
방천극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굉장해.’
자루까지 통째로 철로 만든 방천극의 무게는 아버지가 든 검의 세 배 이상이었다.
그런데도 가볍게 튕겨 나갔다. 검신(劍身)에 실린 내공이 충격적일 정도로 대단했다.
이번 일격으로 알았다. 초반의 가벼운 교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전력으로 가야 한다. 아버지의 무공은, 연가의 신공은 연호정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대단했다.
콰앙!
연호정의 진각이 후원 전체를 진동시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진각이었다. 땅을 통해 치솟는 반탄력을 이용한 연호정이 빛살과도 같은 일격을 뽑아냈다.
후웅!
연위의 눈이 커졌다.
태산이라도 쪼갤 듯 내리쳐지는 방천극의 기세가 그야말로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력을 떠나, 그 기세만큼은 천하의 고수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위가 짧게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방천극이 튕겨 나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연호정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동시에 연환장(連環掌)이 고스란히 연위의 가슴을 향해 퍼부어졌다.
그야말로 허를 찌른 일격이었다.
연위의 눈에 놀라움이 일었다.
퍼어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