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02)
402화. 난장(亂場) (2)
“음?”
“왜 그러십니까, 사형?”
“잠시.”
범오가 멈추자 이철경 역시 신법을 멈추었다.
이철경이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불산입니다. 크게 급한 일이 아니라면 선사분들을 먼저 뵙는 것이…….”
“그게 아닐세.”
범오가 형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투기(鬪氣)는……?”
살기, 혹은 투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의지가 기를 통해 체외로 방출되는 것을 뜻한다.
절정고수 수준이 되어도 투기와 살기의 특색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눈앞에서 직접 발산되는 중이라면 모를까, 조금만 거리가 벌어져도 그것이 누가 발산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란 극히 어렵다.
그러나 범오 정도가 되면 얘기가 달랐다. 특히 소림의 무공을 익힌 그는, 잔존하는 투기만으로도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그 투기를 한 번이라도 느껴 봐야 가능한 일이지만.
“익숙한 투기인데. 분명 어디선가 느껴 봤던…… 아!”
범오가 일순 탄성을 질렀다.
“유군이다. 멸사군인지 탕마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유군의 투기야.”
맹 내를 돌아다니며 두어 번 느껴 봤던 투기였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어떤 부대의 투기인지 알아볼 생각은 못 했지만, 유군이 훈련을 하면서 발산한 투기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잔존하는 이 투기는 그 기세가 제법 생생했다.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사제.”
“예, 사형.”
범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이 투기가 심상치 않네. 나는 이 흔적을 따라갈 테니, 자네는 먼저 불산으로 향하도록 하게.”
이철경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느끼신 겁니까?”
“……모르겠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뭔가 다급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우우웅.
범오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진기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보세.”
말릴 새도 없었다. 어느새 범오가 금강부동신법을 펼치며 투기가 흐르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이철경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달라지긴 달라지셨어. 무공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물론 사람의 근본까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지금의 범오는 한층 더 진중하고 신중해 보이긴 했다.
이철경이 자신을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달려 볼까.”
파아앙!
그렇게 두 사제가 불산을 앞에 두고 찢어졌다.
* * *
연호정의 눈에 불이 붙었다.
우우우우우웅!
광룡부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진기 때문이 아니라 연호정의 살벌한 의지가 그대로 도끼에 실렸기 때문이다.
검으로 치자면 검명(劍鳴)의 경지다. 진정한 검아일체(劍我一體), 병장기에 사람의 마음을 담아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한다는 지고한 경지였다.
야율적의 눈이 깊어졌다.
“……이거, 정말 굉장하군.”
중원의 무(武)와 새외의 무(武)는 다르다.
그러나 거쳐 가는 길은 다를지라도 결국 무도(武道)의 종착지는 하나로 귀결되는 법이다. 지금 연호정이 보여 주는 살기 넘치는 부명(斧鳴)은 사음교에서도 그 경지에 달한 자가 열이 넘지 않는 경지였다.
저것은 무공의 강약과는 관계가 없는,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하물며 감정이 격양된 와중에 자연스레 펼쳐지는 수준이라면, 저 청년의 깨달음은 반신사도(半神師徒)급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진기의 힘은 분명 자신보다 아래인데, 기파만큼은 자신조차 뼈가 저릴 만큼 대단했다. 나아가 그 깨달음은 기파 이상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심신의 조화가 맞지 않는다고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무공을 궁구(窮究)했으면 삼십이 안 된 나이에 저만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벽산호장이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린다더니,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군. 그 정도 깨달음이라면, 십 년 내에 성천의 강자와 비견될 만한 고수가 되겠어.”
소방이 차갑게 읊조렸다.
“상대를 과대평가하지 마. 놈은 그저 그럴듯하게 보이는…….”
“너야말로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저놈의 도끼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여 우리를 반으로 쪼개 버릴 듯하다. 본교에도 원로분들을 제외하고 저만한 경지에 오른 자는 존재하지 않아.”
소방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교주의 사생아 중 손에 꼽히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천재란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세상은 넓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청년이, 그 깨달음만큼은 이미 반신사도의 영역에 접어들었다니.
“뭐가 됐든 상관없어.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뿐이야.”
“그건 맞는 말이지.”
연호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본교라…… 분명하게 지칭하는군.”
야율적이 쓰게 웃었다.
“소방의 혈음사기를 알고 혈음장의 투로를 모조리 파훼한 놈이 너다. 이미 본교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게 분명하거늘, 굳이 숨길 건 또 무어냐.”
“그도 그렇군.”
연호정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다독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고 싶었다. 두 연놈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후,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다져 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살기가 들끓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참았다. 사음교를 향한 살기는 이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살기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고, 나아가 무엇이 우선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네 본진에서 지진이 났다고 들었다. 보고로는 초고수끼리의 격전이 아닌 이상 그만한 충격은 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역시 그랬군.”
야율적의 눈이 한순간 싸늘해졌다.
창백한 안색과 맞물린 그의 눈빛은 혹한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네놈의 술책이었구나. 우리를 싸우게 하려는.”
“실패로 돌아가 유감이다. 꼴을 보아하니, 그 지진이라는 것도 이쪽을 방심케 하려는 수작이었던 모양이야.”
“똑똑하군.”
“왠지 일이 너무 쉽게 돌아간다 싶었지.”
연호정이 백룡부로 소방을 가리켰다.
소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저 도끼로 겨눠지는 것만으로도 살기가 치솟았다. 저 망할 놈에게 당한 건 둘째 치고, 음정단까지 소모했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저년 성격을 보니 천수를 누리긴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저만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재능 이상의 눈이 필요한 법이지. 분란을 조장하려 한 건 사실이었지만, 너무 일찍 부딪쳤다기에 이상함을 느꼈다.”
“…….”
“과연 내 예상이 맞았군. 함정이었어. 그리고 너희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연호정이 사마현을 힐끔거렸다.
“저 천둥벌거숭이가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
야율적은 감탄을 터트렸다.
“너, 정말 똑똑하구나.”
머리 회전이 가히 발군이다. 드러난 상황으로 인과 관계를 유추한 것도 모자라 그간의 과정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저 안목은 가히 신기(神技)였다.
야율적이 말했다.
“그렇다. 저 천둥벌거숭이가 나의 섭혼술을 깬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사마현의 눈이 흔들렸다.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야율적은 자신의 동태를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당했구나.’
사마현은 내심 이를 갈았다.
‘정말이었어. 무림맹 측에서 실수한 게 아니라 내가 실수한 거였다. 음신은 나를 주시하고 있다가 이곳에 병력을 파견한 거야.’
일망타진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무림맹 측에 전한 서신 중 하나를 중간에서 가로챘을 것이다.
‘……빌어먹을.’
사마현은 통렬한 패배감을 느꼈다.
지금껏 상대를 완벽히 속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야율적의 손바닥 위에서 뭣도 모르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뭔가를 노리고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더군. 물론 최종적으론 원수인 나를 죽이려 하겠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일을 꾸미려는지를…….”
“뭐, 그건 됐고.”
연호정은 야율적의 말을 칼같이 끊어 냈다.
“그간 서로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지. 그만하면 충분해.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겠나?”
“…….”
“보아하니 둘만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소방이 이죽거렸다.
“고작 너희 따위 족치는데 뭘 더…….”
“패배한 개새끼는 입 좀 다물지.”
“뭐, 뭐라고?!”
화아아아악!
소방의 몸에서 혈음사기가 무섭게 불타올랐다.
“빌어먹을 새끼! 네놈들의 그 황당한 진법만 아니었다면 넌 진즉에 죽었어! 고작 혈음장의 파훼법을 아는 정도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안다. 그걸 아니까 진법을 펼친 거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넌 졌다. 뭐가 되었든 졌으니 패배자라 불려 마땅하지. 내 아량이 아니었다면, 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짖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심적 안정을 찾아 가는 그였다. 지금의 그는 저 두 사람을 사음교도가 아닌 평범한 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반면 소방은 달랐다.
“이……!”
화르르르륵!
그녀의 양손에 모인 혈음사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기세였다.
그때, 야율적이 손을 들었다.
“진정해라, 소방.”
“…….”
“영악한 놈이다.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게 없어.”
소방이 입술을 깨물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당장 쳐 죽여 버리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흥분해 버리면 손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었다.
후우우웅.
소방은 애써 혈음사기를 다독였다.
그때였다.
“그래, 개는 주인 말을 잘 들어야 밥그릇이라도 지킬 수 있는 법이지.”
“……?!”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년은 앞으로도 저놈 말을 잘 듣도록 해라. 적어도 네년보다는 나은 것 같으니까.”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치이이이이익!
애써 다독였던 혈음사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소방이 악귀처럼 외쳤다.
“개자식이……!!”
콰앙!
순간 연호정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놀랍게도 그에게 권풍(拳風)을 쏘아 낸 것은 소방이 아니었다. 바로 야율적이었다.
야율적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가 더 길어져 봤자 의미는 없겠군.”
“……역시 그렇다니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광룡부로 막았지만, 이 한 방의 위력이 워낙 강렬했다. 그의 입가에 실처럼 가느다란 핏물이 흘러내렸다.
“확실히 네가 더 똑똑해.”
“됐다. 일단 널 죽여야겠다.”
번쩍!
야율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하얀 월광(月光)이 허공을 갈랐다. 연호정의 백룡부가 만들어 낸 참격이었다.
야율적의 수도(手刀)가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쩌어어어엉!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참격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부서져 버렸다.
번쩍!
연호정의 신형이 야율적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야율적의 눈이 빛났다.
이미 연호정의 움직임을 전부 읽고 있던 그였다. 그가 음화홍류의 기를 일으켰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네 본진은 지금 빈집이겠지?”
콰아아앙!
두 사람의 무공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연호정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야율적 역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연호정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이 품고 있는 뜻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래서 진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무슨 뜻이냐?”
“모르겠나?”
치리리리리링!
나무에 올라서서 교룡쇄를 푼 연호정이, 광룡부가 달린 쇠사슬을 빙빙 돌렸다.
“고래(古來)로 무혈입성(無血入城)은 최고의 승리라 평가받아 왔다.”
“……?!”
“잘 왔다. 덕분에 고지부터 점령할 수 있게 되었어.”
그 시각.
두두두두두!
오백의 탕마군이 음신의 본진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