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05)
405화. 난장(亂場) (5)
치리리리리링!
짱짱하게 당겨진 교룡쇄가 조금씩, 조금씩 야율적의 몸을 파고들었다.
치이이이익!
음한백기와 음화홍기로 교룡쇄의 힘을 상쇄하려 했지만, 그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음신의 양대 절기인 음한과 음홍은 음양이기(陰陽異氣)를 다루는 신통한 무공이다. 하지만 애초에 두 기운을 동시에 발산하여 파괴력을 자아내는 무학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천하 어떤 무공보다 은밀하고 확실한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 정면 승부가 아닌, 침투와 폭발로 사람의 육신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는 최강의 암경(暗勁)이 음한과 음화였다.
어떤 의미로는 사신기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라면 사신무는 공방과 회피, 반격 모든 부문에 있어 완성형에 달한 무공이기에, 정면 승부에선 음신의 무공보다 훨씬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묘하군.’
급박한 상황이지만, 야율적의 두 눈은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고 있었다.
‘갑자기 내공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하물며 위기의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힘의 농도가 증폭됐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사람들은 말한다. 죽음의 위기를 겪고 나면 크게 성장한다고.
무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절체절명의 순간 번개처럼 들이닥치는 깨달음으로 한순간 큰 진전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전’이라는 단어에는 ‘최초’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순간의 깨달음으로 무공의 경지가 상승할 수 있지만, 신세계에 들어선 뒤라면 외려 익숙하지 않은 경지에 전투력이 급감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것이 생사결 도중이라면 더하다. 깨달음을 얻은 데에 따른 무공 구현 방식의 변화에 당황하여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놈은 달라.’
연호정은 다르다.
이놈은 분명 경지의 상승을 이루었다. 이 찰나지간에!
그러면서도 몹시 자연스러웠다. 마치 지금의 경지에 올라서 본 경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증폭된 내공의 수급이 완벽했으며, 힘의 한계와 최소치를 절묘하게 읽어 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되었다가 천우신조로 본래의 경지로 진입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처럼 익숙하게 내공을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놈, 설마하니 힘을 숨기고 있기라도 했던 것인가?!’
너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보니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뭐가 되었든.’
야율적의 눈이 사마현에게로 향했다.
사마현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자괴감, 살기와 서글픔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음신의 힘만으로는 힘들어. 처음부터 기습의 수를 노렸어야 했거늘.’
이 또한 자만이었다. 음신의 무공으로 정면 승부를 결해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는 자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으나, 상대의 순간적인 성장으로 인해 오판이 되어 버렸다.
훅!
야율적의 몸에서 음신지기(陰神至氣)로 자아내던 기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츠츠츠츠.
이내 그의 몸에서 회흑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증오로 가득했던 사마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윽!”
옥청이 신음을 흘리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야율적이 순간적으로 방출하는 기운의 여파가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물론 단순한 내공 발산의 압박감이라면 옥청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옥청은 군병 중 무종지벽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옥청이 외쳤다.
“대수님! 조심하십시오! 보통 사악한 기가 아닙니다!”
그렇다.
야율적이 뿜어내는 진기는 도가 무공의 극치라는 옥청의 혼원기조차 짓눌러 버릴 만큼 강대한 사기(邪氣)였다.
진기의 수준을 논하자면 검선의 모든 깨달음의 집약된 혼원기가 밀릴 리 없다. 다만 옥청의 경지가 낮은 탓에, 압도적인 사기 앞에서 충격을 받는 것이다.
치리리리리링!
교룡쇄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음신지기를 뿜어내던 때와는 힘의 강도가 확연히 달랐다. 교룡쇄를 완전히 장악했던 주작화기가 야율적이 뿜어내는 회색빛 사기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드러내는 힘인가.”
카아아앙!
교룡쇄가 힘없이 풀려나갔다. 그 와중에도 부서지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재질 하나만큼은 놀라웠다.
“중원 음지의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 과거의 힘을 애써 잊으려 했거늘.”
푸스스스.
시체처럼 창백하던 야율적의 피부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우두둑! 우두두두둑!
놀라운 변화의 연속이었다. 야율적의 골격이 조금씩 커진 것은 물론 근육도 눈에 띄게 부풀었다.
얼굴의 생김새는 그대로였지만, 덩치가 커지고 혈색이 바뀌니 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면서도 평범하던 인상이, 이제는 무척이나 전투적으로 느껴졌다.
잠시지간 음신지기를 버리고, 사음교의 신공을 꺼내 든 야율적.
그런 야율적을 보는 연호정의 눈은, 뜻밖에도 몹시 평온했다.
화아아아악!
야율적이 뿜는 사기는 광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변화한 기파만큼이나 그의 눈빛도 짐승의 그것처럼 살벌해졌다.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놀이는 끝이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콰앙!
“컥!”
야율적이 피를 토하며 날아가 나무 한 그루를 부수고 바닥에 쓰러졌다.
눈이 번쩍 뜨였다.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했기에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번 한 수로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야율적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뭐, 뭐야?’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은 야율적의 눈에, 적백의 아지랑이를 뿜고 있는 연호정의 모습이 보였다.
화르르르륵!
바람에 불이 섞인 것 같기도 했고, 타오르는 불을 바람이 이끄는 것 같기도 했다.
백호금기와 주작화기를 동시에 끌어 올린 연호정의 기파는 야율적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차분했지만 치명적으로 느껴졌고, 담담하면서도 폭발적인 일격을 내칠 수 있을 듯했다.
“수왕사기(獸王邪氣)로군.”
“……?!”
“기도를 보니 십 성 대성의 경지거늘, 그간 수련을 게을리했나? 대성한 것치고는 진기의 흐름이 좀 답답해 뵈는데.”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네놈, 수왕사기를 어찌 아는 것이냐?”
생각해 보면 이놈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소방의 혈음사기는 물론, 혈음장의 투로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혈음장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혈음의 무공으로도 모자라 수왕사기까지 알다니?
치리리리리링!
교룡쇄가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저 알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연호정이 하는 것이라곤 손목을 까딱이는 것뿐이었다.
“오너라. 너의 힘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게 해 주마.”
순간 야율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애송이가!”
파아아앙!
야율적이 연호정을 향해 질주했다.
엄청나게 낮은 자세였다. 마치 네발짐승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나아가는데, 그 위압감이 실로 대단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야율적이 폭발적인 일권을 쳐 냈다.
콰앙!
연호정의 몸이 출렁였다.
“감히 본교의 무공을 무시해?!”
콰앙! 콰아아앙!
“본교의 무공은 천년의 역사를 거쳐 완성된 무적의 절기들이다! 네놈들이 만들어 온 무공과는 격이 달라!”
퍼어어엉! 퍼퍼퍼퍼펑!
야율적의 백타술은 굉장했다.
음신지기로 구현하는 백타술과는 또 달랐다. 그때의 백타술이 빠르고 날카로우며 살법의 기교에 특화되어 있었다면, 지금의 백타술은 지극히 거칠고 완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짐승의 격투술. 권법과 조법(爪法)이 합쳐져 상대를 파괴하고 난자하는 극살의 무공이었다.
“네놈의 시체를 백 조각으로 찢어 본교의 위대함을……!!”
순간 연호정의 손이 야율적의 쌍권 사이로 파고들었다.
퍼어어어억!
“쿨럭!”
야율적이 또다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푸스스스스.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춘 연호정의 양팔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야율적의 무공을 모조리 막아 낸 것이다.
“사음의 무공이 그리도 뛰어난데 왜 음신의 무공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군.”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야율적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엄정한 기운이 어렸다.
“결국, 네놈도 무(武)의 진리를 모르는 반쪽짜리에 불과할 뿐이다.”
우우우우우웅!
연가신단이 서서히 회전했다.
신단의 회전에서 오는 막강한 진기 생성을 이용하지 않았음에도 야율적의 모든 공격을 막아 낸 데다가, 손쉽게 반격까지 가한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폭발적인 힘으로 일거에 적을 섬멸하는 특유의 방식을 사용한 게 아니라, 부드럽게 적을 무너트리는 수법을 쓴 것이다.
‘이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간 놓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어.’
시작은 양천과의 비무였다.
수백 합을 나눈 건 아니었지만, 연호정은 양천과 싸우며 또 다른 무리(武理)에 젖어 들 수 있었다.
그 무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연호정이 양천보다 약하기 때문이었다. 깨달음은 양천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을 넘보는 그였지만, 실질적인 힘이 약해 양천에게 일격을 먹이기 위해선 그간 얻은 모든 전투술을 써먹어야 했다.
한 합의 교환에도 수십 개의 대응을 떠올렸고, 그중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허를 찌르는 공격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양천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너지기는커녕, 제대로 된 피해 한번 주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양천 역시 전투술의 달인이었으며 힘의 크기에서 비교가 안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이나 양천이나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무(武)를 지향하는 건 마찬가진데,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 어렴풋이 떠오른 것은 신화교의 무장들과 싸우러 가기 전, 승현진인이 보여 주었던 신기(神技)에 이른 권법이었다.
‘태극권!’
승현진인의 태극권은 전혀 위력적이지 않았다.
상대를 공격하기보다는 방어하는 데에 더 능했고, 기술을 거는 것보다는 받아 주고 밀어 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흑암제 시절보다 약해진 지금의 연호정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에는 굳이 단련할 필요가 없었던 무리가, 지금에 와서는 부족했던 한 조각이 되어 연호정의 무공을 완성(完成)에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연호정의 진기(眞氣)는 그 깨달음을 수용하며 극한의 경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이제는 코앞이다.’
우우우우우웅!
연가신단의 회전 속도가 빨라지며, 고농도로 진화한 사신기(四神氣)가 그의 육신을 초고속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당장이라도 하늘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주먹질 한 번에 만근의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후 하고 입김만 불어도 거목의 뿌리까지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극치(極致)다.
초절정의 영역,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 영역의 극치에 도달한 궁극의 무사가 여기에 있었다.
‘이제 무극의 영역까지는 단 한 걸음!’
여기서 깨달음을 얻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리 놀랍진 않았다. 지금의 이 변화를, 상황을 연호정은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쿠우우우웅!
그때, 저 후방에서 거센 충격이 일었다. 진을 형성한 멸사군과 소방이 격전을 벌이는 소리였다.
연호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믿었다.
물론,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다.
“이제 끝내도록 하지.”
연호정이 교룡쇄를 휘둘렀다.
촤르르르르륵!
뱀처럼 꿈틀거리던 교룡쇄가 야율적의 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