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10)
410화. 뒤흔들다 (4)
옥청의 상세는 생각보다 중했다.
“내부 장기가 많이 상했습니다. 상상 초월의 압력에 의해 찢어져 출혈을 일으켰는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즉사를 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
“천만다행히도 오장육부를 극도로 순한 진기가 감싸고 있어서, 상처를 입은 즉시 복구에 들어갔군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회복을 극대화하여 어느 한 군데도 초월 회복을 노리지 않고 모든 장기가 정상화되도록 만든 듯합니다.”
“이 친구는 무당의 도사요.”
“역시 그랬군요. 내 비록 무당의 도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나름대로 도가 무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도가의 무공은 순리를 따르지요. 대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에, 자체적인 치료 또한 비정상적인 회복보다는 다소 느려도 확실한 정상화를 목표로 합니다.”
백지신의(百智神醫)는 명성보다 훨씬 더 차분한 사람이었다. 백 가지 지혜에 능통한 의원이란 별호처럼 아는 것도 많았다.
“다만, 좌측 허리 뒤편에 자상(刺傷)을 입었군요. 꽤 깊습니다. 상처가 예리하진 않은 것이, 고수의 검격에 당한 건 아닌 듯합니다.”
“그렇소. 충격의 여파로 부러져 버린 검이 뚫고 들어갔소.”
“위험한 부위입니다. 신장(腎臟)이 위치한 곳인데, 신장은 회복이 불가능한 장기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진기의 흐름을 보건대…….”
백지신의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칼날이 신장에 닿았습니다. 치명적이지요. 패혈(敗血) 이전에 과다 출혈로도 죽을 수 있습니다. 신장에는 혈관이 많거든요.”
“알고 있소.”
“극한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내부 장기는 물론 미세한 혈관까지도 수복할 수 있는 믿기 힘든 공능을 선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의 나 정도면 가능하오.”
“이 환자는 그렇지 않군요.”
“그렇소.”
“한데, 상처를 입은 흔적은 있되 정작 신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보기에 패혈의 증상도 없고, 심지어 다른 장기보다 유독 생기가 넘치는군요.”
“다행이구려.”
“다행입니다만, 의원으로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입니다. 이유인즉, 이치에 맞지 않는 몸 상태라면 그 원인과 과정을 정확히 알아야 후속 치료에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백지신의가 진지하게 물었다.
“연 호장께서 도우셨습니까?”
연호정이 멸사군의 수장이라는 소문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새로이 창설된 의정군의 대수라는 소문은 아직 퍼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간혹 벽산호장이라는 별호에서 호장을 따와 연 호장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곤 했다.
“그렇소. 내 비록 의원은 아니지만, 사람의 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소. 신의 말씀대로 저 부위에 저만한 깊이의 상처가 나면 치명상으로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더군.”
“잘 아시는군요.”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사람만 때려잡을 줄 아는 개백정이라서 말이오.”
“한데 어떻게 치료한 것입니까? 제아무리 고수라도 본인의 몸을 다루는 것과 타인의 몸을 치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특히나 이런 부위는 더더욱.”
“내게는 남들에게 없는 신통한 내공심법이 있소. 그중 하나를 써서 상처를 봉합하고 신장 능력을 극대화한 것뿐이오.”
현무기(玄武氣).
현무는 북방의 수기로서, 인체 중 신장을 담당한다.
백지신의의 말마따나 신장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장기였다. 절반만 남아도 회복이 가능한 간장과는 달리 신장은 한번 나빠지면 그걸로 끝이다.
하물며 칼이 들어갔다면 말할 것도 없다. 암만 대단한 내공심법을 익혔다 한들, 이 정도로 말끔하게 고쳐 놓을 순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신기의 무한한 공능 중 하나였다. 물론 연호정의 경지가 높고 사신기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그런 무공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소.”
백지신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의원이라면 백이면 백 불신했을 말이었다. 특히나 백지신의처럼 내외공 등 무공에도 능통한 의원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백지신의는 연호정의 말을 믿었다.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본 이상, 연호정의 말을 거짓이라고 매도할 수가 없었다. 환자 몸에 약력(藥力)의 흔적이 없기에 영약을 썼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결정적으로 무림맹의 장군이라 할 만한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백지신의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 삼십 년이 넘도록 의술에 매진했습니다만, 그와 같은 내공술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믿기 어렵다는 거 알고 있소.”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신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연 호장의 내공심법이 신묘하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하필 신장에만 특효인 진기라고 보기는 힘들 듯합니다. 혹 다른 장기에도 특효인 기운을 지니고 계십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백지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그렇다고 안심해도 될 단계는 아닙니다. 환자의 심신이 워낙 강건하여 예상보다 회복은 빠르리라 보지만, 호장께서 도와주신다면 환자의 회복을 획기적으로 당길 수 있겠습니다.”
“어딜 손보면 되겠소?”
“심장입니다. 신장 다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곳으로, 환자의 진기로 보호되고 있긴 하나 그 진기가 당장이라도 꺼질 듯 간당간당합니다.”
“바로 시작해도 되겠소?”
“그러시지요.”
그렇게 옥청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연호정은 주작화기를 이용해 옥청의 심장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깨달음과 경지를 떠나, 주작화기는 사신기 중 가장 거칠고 흉포한 기운이었다. 멀쩡한 심장에 막강한 힘을 보태 주는 데엔 탁월하지만, 문제가 생긴 심장을 낫게 만드는 일은 다른 삼신기보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의 진기 도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본인의 무공 경지를 상승시키기 위할 때보다도 몇 배는 더 심한 심력 소모를 겪어야 했다.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옥청은 자신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탈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연호정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땀이 옥청의 옷깃을 적셨다.
‘너에게 신세계를 보여 준다고 하였어. 아직 그중 일 할도 채 보여 주지 못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면 안 돼.’
본디 죽음이란 허무한 것이다. 누군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허무한 이유로 죽기도 한다.
적어도 그런 경우가, 자신의 부하들에게는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연호정은 성심을 다해 옥청의 심장을 보호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후우, 되었습니다.”
백지신의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환자의 진기를 회복에서 안정으로 유도했습니다. 심맥 보호도 확실하니, 기운은 없을지라도 조만간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고생하셨소.”
“이 사람보다 호장께서 더 고생이 많았습니다. 반나절 동안 심맥을, 그것도 이리 안정적으로 보호하다니요. 화후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소.”
“걱정하지 마시고, 호장께서는 이만 쉬시지요.”
연호정은 백지신의가 쉬란다고 쉴 성격이 아니었다. 쌓인 문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옥청을 치료하고 나오자마자 가득상이 나타났다.
“괜찮수?”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소. 조만간 정신을 차릴 거라고 하오.”
“옥청 말고, 대수 말이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사경을 헤매는 부하도 있는데, 내가 안 괜찮을 이유는 또 뭐요?”
“말 살벌하게 하는 건 여전하구만.”
“실제로 괜찮소. 당장 작전을 실행해도 될 만큼.”
가득상이 묘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내 나름대로 대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댁은 상상을 초월하는 양반이외다.”
“무슨 말씀이오?”
“얼마 전 회의에서 봤을 때보다 진기가 엄청나게 잠잠해졌소.”
“…….”
“약해진 건 절대 아닌데, 분위기가 무척이나 침착해졌소이다. 대수가 풍기는 특유의 위압감도 많이 줄었소. 전혀 다르지만, 마치…… 공공대사님을 떠오르게 하는구려.”
“과찬이오. 아직 대사에 비하면 모자람이 많소.”
가득상이 포권을 취했다.
“축하하오. 또 한 계단 오르셨구려.”
연호정은 가득상의 축하를 가벼이 받지 않았다. 마주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여유와 절도가 엿보였다.
“감사하오.”
“축하연은 이곳 일이 끝난 뒤 돌아가서 해 주겠소.”
“축하연은 무슨.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말씀해 주시오.”
어지간하면 몇 번 더 능글거렸겠지만, 가득상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연호정에게서 풍겨 나오는 부드러운 위엄이 가득상을 자연스레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신의 본진, 야성이라고 하더이다. 허위 정보에 낚인 구백의 암살자들이 이곳에서 이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고 있었소.”
“지금은?”
“본진으로 이동 중이더군.”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야율적, 그놈이군.”
“그렇소. 우두머리의 직접적인 명령이 떨어진 게 아니고서야 그 많은 인원이 이리 빨리 움직일 순 없지. 그 짧은 사이, 나름대로 내외상을 치료한 것 같소.”
“십 년이 넘도록 뒷세계의 왕으로 군림했던 놈이오. 비상용으로 영약 몇 개쯤 지니고 다녀도 이상할 게 없소.”
“맞는 말이오.”
“하면, 현재 야율적을 위시한 암살자 구백 명이 탕마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단 말이오?”
“정확히는, 야성 인근에 흩어져 주둔 중이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둔이라니? 대놓고 말이오?”
“그렇소.”
암살자 주제에 군인처럼 전선 앞에서 주둔하고 있단다.
참으로 웃기는 노릇이 아닌가 싶지만, 그 암살자를 이끄는 자가 사음교에서 파견한 특급 세작이자 극한의 무공을 갈고 닦은 야율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뭔가 노리고 있군.’
가득상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천하를 좀먹는 암살자들이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오. 이건 심각한 일인 동시에,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소.”
“절호의 기회?”
“그렇소. 암살자는 세상의 병폐 중 하나요. 그런 작자들이 거리낄 것 없이 모습을 드러내 민심을 흉흉케 하고 있소.”
실제로 흉흉해지기도 했겠지만, 가득상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면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여론을 움직여 암살자 세계를 단번에 정리해 버리자는 뜻이오?”
가득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구랴.”
꽤 대담하고도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중원 무림 최고의 세력이라는 무림맹도 민심과 여론에 신경을 쓴다. 막 나간다는 인식이 강한 흑도의 무리는 더더욱 눈치를 본다. 그만큼 여론이란 무서운 힘이다.
가득상은 그 여론을 이용해서 이참에 암살자, 살수라는 족속들의 뿌리를 뽑아 버리자고 말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오만, 우리는 지금 임무 수행 중이오. 어떤 일이 터져도 임무가 우선이외다.”
“대수의 말씀이 옳소만, 임무와 함께 대의(大義)도 챙길 수 있는 기회이니 말씀드리는 것이오.”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나아가, 놈들을 잡는 과정에서 사음교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수 있…….”
“그것이로군.”
평온한 얼굴로, 그러나 무언가 깨달은 눈빛으로 연호정이 말했다.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오?”
“사음교였소.”
“잉? 사음교?”
연호정의 얼굴에 은근한 살기가 일었다.
차분한 여유가 인상적이었던 얼굴에 살기가 이니, 풍겨 나오는 살벌함이 두 배가 되었다. 가득상이 저도 모르게 움찔한 이유였다.
“야율적이 굳이 최정예 암살자들을 동원해 야성을 에워싼 이유…… 사음교요. 사음교밖에 없소.”
“그니까 그게 무슨 말…….”
“잠시 실례하겠소. 사마현, 그 망할 놈과 얘기 좀 해 봐야겠소.”
“어어? 이보시오, 대수! 연 대수! 야! 연 공자!”
어느새 연호정이 가득상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가득상이 툴툴거렸다.
“또, 또 저 혼자만 알고 발바닥에 불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아오, 진짜 내가 실력만 됐어도 머리통을 갈겨 버렸을 텐데.”
그가 가래침을 탁! 뱉었다.
“연 공자! 같이 가!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