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19)
419화. 평화와 분란 사이 (5)
“허억! 허억!”
야율적은 자신의 호흡이 이 정도로 거칠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주르르륵.
“끄윽!”
일순 잘려 나간 좌측 어깨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극단적인 점혈 수법으로 철저하게 출혈을 막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상은 심해졌고, 그럴수록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이 소실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출혈을 막으려 혈(穴)에 모은 내공마저도 조금씩 소모될 정도였다.
혈에 박아 둔 내공까지 모두 소모되면, 그때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막을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다.
‘괜찮아.’
흐릿해지는 눈을 어떻게든 치떴다.
‘그래도 괜찮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야율적은 마침내 십구 번 통로와 이어진 야성의 백삼십육 번 소비동(小秘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화산대연을 터트릴 수 있는 거대한 격발추가 보였다.
쿠구궁! 쿠궁!
비동이 흔들렸다.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 곳곳에서 온갖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암제단 중 절반 이상이 죽었을 것이다. 중간에 유군 부대원들도 침투하여 싸움을 벌였으니, 필시 피해가 막심했을 터.
그나마 다행인 건 암제단 전원이 독과 암기에 능하다는 것이었다. 저쪽에 초절정고수 두 명이 있다 해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움찔!
격발추를 향해 걸어가려던 야율적은 순간 하반신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곤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정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잠시나마 목숨을 붙들고 있는 정도, 딱 그 정도가 그에게 남은 힘의 전부였다.
‘안 되는구나.’
불타오르는 충성과 신앙의 힘으로 화산대연을 터트리는 것은 물론, 본교에 연락을 취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실수였다. 자신은 이쪽 병력의 힘을, 이쪽의 계책을 너무 가볍게 여겼다.
‘연락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살고 교에 현재 상황을 보고하는 것보다,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화산대연을 터트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마지막에 와서야 교를 위해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쉽다. 아쉽지만, 사신(邪神)께서 정해 주신 나의 삶이 여기까지라면 별수 없는 일.’
야율적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야명주 하나만이 박혀 있는 비동은 좁고 어두웠다. 공기가 오가는 미세한 통로와 입구를 제외하곤 사방이 막혀 있었다.
하지만 야율적은 천장을 보는 게 아니라 하늘을 보고 있었다.
천장 너머 하늘, 그 하늘 너머의 신(神)을 보고 있었다.
‘신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어찌하여 나의 삶을 이곳에서 종결시키려 하시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치열하게는 살았다.
신을 위해서 살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나답게 살았다. 교의 명령에 절대복종했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야율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실체 없는 신이, 점차 하나의 표정을 그리고 있었다.
평생에 단 한 번 본 얼굴. 사음교를 이끄는 신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이기도 한 인물.
당대 사음교의 교주, 그가 거기에 있었다.
“……대업을 이루소서.”
야율적이 하나 남은 손을 격발추 위에 얹었다.
이 격발추는 장정 열 명의 힘을 합쳐야 작동했다. 평소의 야율적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이 격발추를 누르는 데에만 모든 내공과 근력을 쥐어짜야 할 판이었다.
야율적이 눈을 감았다.
그러곤 지혈을 위해 고정해 두었던, 극히 미세한 내공까지도 모두 손에 집중시켰다.
푸화아아악!
좌측 어깨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끄으으으윽!”
있는 대로 힘을 끌어 올리는 야율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대량의 출혈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창백해졌다.
‘더…… 조금만 더!’
쿠우우웅!
격발추가 조금씩, 조금씩 눌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외부 요인으로 화산대연이 터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격발추는 총 세 단계의 걸쇠로 잠겨 있었다.
야율적이 입술을 깨물었다.
딸칵!
눌린 격발추가 첫 번째 걸쇠를 넘었다.
이제 고작 첫 번째일 뿐이었다. 야율적은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으으으윽!”
딸칵!
곧이어, 격발추가 두 번째 걸쇠를 넘었다.
“허어어억!”
야율적은 순간 숨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폐장 능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들숨을 쉬려 해도 공기가 들어오질 않는다.
공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힘을 줄 수가 없다. 심지어 그에게는 시간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가 계속 흐르고 있기에 쉴 시간이 없었다.
“이익!”
이를 악문 야율적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선천지기(先天之氣)까지 끌어 올렸다.
어차피 죽으면 하늘과 땅으로 흩어질 기운이었다. 조금 더 앞당겨질 죽음이 무섭다고 아껴 둘 때가 아니었다.
후우우웅!
일순 야율적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의 다 소모된 선천지기가 폭발한 것이다.
야율적이 힘차게 격발추를 눌렀다.
“으아아아아!”
그때였다.
콰앙!
소비동의 벽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수십 개의 돌조각이 야율적의 몸과 머리를 후려쳤다.
경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야율적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한 발을 내디뎠다.
“안 돼!!”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딸칵!
격발추가 마지막 세 번째 걸쇠를 넘었다.
퍼어억!
동시에 야율적이 옆으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쿨럭!”
입 밖으로 쏟아 낸 핏물이 새빨갰다. 물론 야율적은 자신이 토해 낸 피 색깔이 어떤지 볼 수 없었다.
쿠르르르르릉!
“이, 이게 뭐야? 설마 작동된 거야?!”
“……작동되었소.”
순간 야율적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익숙한 목소리군.
“빌어먹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 고위 관리 곁에 있는 모든 암살자가 즉시 담당 관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렇소.”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폭발이 크고 연기가 거세다곤 해도 광동성이 얼마나 넓은데!”
“이 산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시뻘건 연기를 못 볼 바보는 없소. 화산대연이라는 이름이 왜 생겼겠소? 실제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외다. 그리고…….”
“……?!”
“화산대연에선 만리추종향처럼 특수한 향이 대량으로 뿜어져 나오오. 암살자들이 맡을 수는 없지만, 훈련받은 추적견(追跡犬)들이 수십 리에 걸쳐 포진해 있소. 늦어도 반 시진 안에 목표 관리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이오.”
“그럼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그 추적견들부터 죽이면 됐잖아요!”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고, 어디에 퍼져 있는지도 모르오. 추적견들 잡자고 광동에 있는 모든 개를 잡아 죽일 작정이오?”
“…….”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소.”
“……또 뭐죠?”
“반 시진 후, 이곳 야성도 무너질 거요.”
“제길!”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야율적은 은근히 놀랐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사마현에게는 화산대연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만 알려 주었을 뿐이다. 반 시진 후 야성이 무너진다는 사실까진 알려 주지 않았다.
‘아깝구나. 아까워.’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사화문의 제조법을 독자적으로 알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한데 이제 보니, 기관진식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인재는 정말 찾기 어렵다. 사마현이야말로 차기 음신으로서 하늘이 내려 준 인재였다.
자신도 그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기에 차기 음신으로 만든 뒤 사음교로 데려가 새로운 지파를 만들려 하였다. 그 꿈이 무산된 지야 오래지만,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별수 없지. 그래도 마지막 임무는 달성했으니…….’
그때였다.
“그렇게는 안 돼.”
퍽!
순간 야율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끄아아아악!”
수천 개의 바늘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며 온몸의 신경을 헤집는 듯하다.
죽음을 받아들인 순간,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내지른 후에는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야율적은 좌측 어깨에서 줄줄 쏟아지던 피가 어느새 멈춰 버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기억나나? 이 수법 말이다.”
“……!!”
“음신지법의 천고침수공(千拷針手功)이다. 별다른 장비 없이, 내력의 조절만으로 상대를 끔찍하게 고문할 수 있는 음신의 살법(殺法) 중 하나지.”
“커헉!”
“보이지 않던 눈이 뜨일 것이고, 들리지 않던 귀가 트일 것이다. 한 줌의 생기(生氣)라도 남아 있는 한, 넌 나의 허락 없이 절대 죽을 수 없다.”
야율적이 떨리는 눈으로 사마현을 바라보았다.
이곳까지 오며 수많은 암살자를 죽였는지, 그의 몸 전체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현의 얼굴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고, 호흡 역시 들리지 않았다.
지극히 평온한 상태. 숱한 전투를 치르고도 암살자로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가만히 야율적의 눈빛을 보던 사마현이 차갑게 웃었다.
“사음교인지 뭔지 하는 그 머저리 같은 곳에 연락을 취하진 못했군. 내 말이 맞지?”
“……!!”
사마현이 묵비를 돌아보았다.
묵비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진에 상황을 보고하지 못했다면 그 또한 다행이지만, 이것은 절반의 성공으로 봐야 한다. 이미 화산대연이 터져 버렸으니까.
사마현이 다시 야율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 야율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네, 네놈이……!”
“…….”
“죽여라. 나는 네놈의 원수가 아니더냐.”
“그럼 내가 널 살려 둘 줄 알았나? 당연히 죽일 거다.”
스륵.
사마현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이격 필살의 비수, 오직 야율적을 죽이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을 갈아 댄 두 자루의 비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냥은 죽일 수 없다. 야성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반 시진이 십 년처럼 느껴질 만큼의 고통을 겪은 이후에야 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놈!”
사마현이 묵비에게 말했다.
“난 이자를 처리하겠소. 일행과 먼저 떠나시오.”
“안 돼요.”
“무슨 의미요?”
묵비가 야율적을 노려보며 말했다.
“난 대수께 이 자의 목숨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았어요.”
“이놈 목숨은 내 것이오. 이놈의 목을 노리는 자는 많겠지만, 제일 순위의 권리는 내 것이란 말이오.”
“그렇다면 증명해요.”
“증명이라니?”
“이자의 목을 잘라 오든 시체를 가져오든, 죽었다는 증거를 내게 가져와요. 그럼 이만 빠져 주죠.”
사마현이 차갑게 웃었다.
“날 믿으시오?”
“대답만 해요.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내 화살은 당신의 심장을 향할 거예요.”
“…….”
“…….”
가만히 묵비를 노려보던 사마현이 다시 야율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전에 당신의 상관과 만났던 그곳에 던져 두겠소. 이만 꺼지시오.”
“좋아요.”
파악!
묵비가 서둘러 통로를 빠져나갔다. 암살자들을 죽이고 아군을 대피시켜야 했다.
야율적을 보는 사마현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미소가 어렸다.
“시작할까?”
야율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사마현이 붉게 달아오른 손으로 야율적의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치이이이이익!
“크아아아아악!”
* * *
“헉!”
도지휘첨사 고율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보고도 모르시는가. 땟물 줄줄 흐르는 늙은이일세.”
“한데 어찌 내 첩의 목을 조르고 있는가! 당장 그 더러운 손을……!!”
“이 손을 치우면 자네가 죽어.”
“……뭐?”
버둥거리는 여인의 목을 잡아 쥐고는 높이 들어 올린 노인이 히죽 웃었다.
“자네는 운 좋은 줄 알게. 우리도 다 구하지는 못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