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27)
427화. 사신(四神)으로 엮인 과거 (2)
“…….”
다탁을 사이에 둔 사람 중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침묵은 답답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종명이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한창 업무 중인 관리의 시간을 빼앗은 것은 그렇다 치고.”
종명이 탐경을 보았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오히려 이런 자리가 흥미로운지, 한 번씩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엿보이기까지 했다.
“이분은 어떻게 알고 모셔 왔나?”
이분이라고 하였다.
승선포정사사의 좌포정사는 종이품(從二品)의 최고위 관리다. 상대의 나이가 많다고 대우할 필요가 없는 지방 권력의 핵심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이미 서로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연호정이 말했다.
“무림인이 관리를 억압하는 것보다, 관리가 어려워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설득하는 그림이 더 괜찮다 싶어서 말이오.”
“……내 분명히 말하는데.”
종명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자네의 그런 태도가, 자네가 속한 집단을 위험 집단이라고 보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미 무림인 자체를 위험 요소로 생각하는 관리에게 굳이 가면 따위 쓸 필요 없다고 보오.”
종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사상이 어떤가를 떠난 문제라고 보네만.”
“그 사상이 옳은가, 그른가는 내 관심사가 아니오. 중요한 건 당신이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광동성을 더 살기 좋게 만들 방법이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지.”
“현실은 현실일 뿐이야.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 관리의 소임인 법.”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민초의 삶을 가꾸는 것 역시 관리의 소임이 아니었소?”
“무림인에게 관리로서의 책무를 배울 만큼 나 자신이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네만.”
“그렇다면 대단한 착각임과 동시에 관리로서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세 살배기 어린애에게도 배우는 것이 선비라 하였거늘, 당신은 누군가에게 뭘 배운다는 인식 자체가 없군.”
경직되어 있던 종명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건 몰라도, 말로는 도통 당해 낼 수가 없겠다. 뛰어난 행정가로 행정 문제는 물론, 어떤 담판에서도 뒤진 적 없는 그로서는 뼈아픈 경험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 광동은 잘못되었소. 당신이 진정 광동을 위하고 나라를 위했다면, 저 썩어 빠진 암살자들이 십 년 넘도록 판을 치고 있도록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백도 정파 무림이 힘을 잃어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진즉에 알아챘을 것이오.”
“모든 잘못을 나에게 전가하고 싶은 모양이군.”
“이제 보니 배울 자세도 안 되었을뿐더러, 듣고 싶은 것만 걸러 듣는 못된 버릇까지 함양하신 분이었소이다.”
“자네!”
종명의 언성이 높아졌다.
“더 이상의 방종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법도가 있으며 규율이 있어! 국가가 관리를 괜히 뽑는 것이 아니야!”
“말 돌리지 말고, 인정할 것부터 인정하는 게 좋겠소.”
“정녕 옥에 갇히고 싶은 것인가!”
“당신은 실패한 행정가요.”
“……!!”
날 선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는 한마디다.
실패한 행정가. 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수식어가 종명의 입을 콱 틀어막았다.
“승선과 도지휘, 제형은 각자의 권리와 책임이 분명하여 서로에게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였소. 그러니 광동성이 이 지경이 된 것을 당신 하나의 잘못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針小棒大)일 수도 있소. 그러나…….”
“…….”
“재무와 외무 행정에 있어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받을지언정, 질서를 위시한 복리 등의 소극적 행정에서 당신은 분명히 실패했소.”
“…….”
“삼권이 분립되었다 한들, 현재 광동성의 특수성을 보면 암살자 건에서만큼은 제형안찰사사가 가장 욕을 먹어야 할 거요. 그런데도 굳이 당신에게 온 것은, 민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장 먼저 포착할 수 있는 위치가 좌우포정사이기 때문이오.”
연호정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림이라는, 실재하면서도 환상처럼 보이는 세상을 위험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으니 행정 대상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차라리 제거할 생각이라도 있었다면 모르되 그조차도 않고 놔두었으니 그 틈에서 기생충들이 번식하고 있었던 게지.”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할 말은 한 가지뿐이야.”
잔뜩 붉어진 얼굴로, 종명이 말했다.
“더 이상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네. 좌포정사인 나의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지금까지의 무례 역시 없는 셈 쳐 줄 걸세.”
“…….”
“돌아가게. 국가의 일은 관리가 알아서 할 것이야. 더는 끼어들 생각 말게.”
그때, 탐경이 말했다.
“전에 주각(周覺),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지.”
순간 종명의 얼굴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필시 주각이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탐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똑똑한 사람은 고지식할 필요가 없는데도 나이가 들면 누구보다도 고지식해진다고.”
“…….”
“고지식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문제는, 어떤 조직이든 운영자에게 있어서만큼은 그것이 죄가 되지. 고지식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그 외의 일은 신경 쓸 생각을 못 하거든.”
종명이 떠듬떠듬 말했다.
“어르신께서 그분의 이름을 언급하신다 한들, 저는 절대로…….”
“겁이 나는가? 내가 그 친구에게 압력을 가해 자네를 수렁으로 빠트릴까 봐?”
“……!!”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능력이 다른 법이지. 하나, 지금의 자네를 보니 광동성이 아니라 자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네.”
“어르신.”
“그것도 나쁘다고 볼 수 없지. 관리는 사람 아니던가? 문제는, 자네 자신을 위해서라도 광동의 민심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지금보다 더 위를 원했다면, 그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도록 밤잠을 설쳐 가며 광동을 관리했어야 했네. 왜냐고? 그것이 자네가 그 많은 녹봉을 받는 이유이기 때문일세.”
“…….”
“자네 윗선 중 바보도 많고 욕심 많은 자도 많지만, 성품이 순후하고 안목 좋은 사람도 많다네.”
“……?!”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자네가 밑바닥에서부터 지금 그 위치에 올라올 때까지 무수히 많은 정적을 제거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 자네의 정치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뜻일세.”
종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탐경의 목소리는 연호정보다 훨씬 담담하여 한가롭게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실린 무게감은 굉장했다.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든 관리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든, 자네는 광동의 행정을 이런 식으로 놔둬서는 안 됐네. 난 행정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자네의 잘못이 작지 않다는 것만큼은 알겠구먼.”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자네가 만들어 온 역사에 흠이 될까 봐? 하면 그러지 말지 그랬나?”
“……!!”
“이미 벌어진 일, 자네 역사에는 이미 오점이 남아 버렸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가지야. 그 오점을 덮어 버릴 정도로 뛰어난 수완을 보여 주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 관리도 아니고, 하다못해 영향력 강한 소림사에서조차 발을 떼어 버린 노인이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종명의 안색은 지극히 창백해져 있었다. 탐경의 말이 그냥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살리지 말 걸 그랬소.”
“……!!”
“과격하게 들리시오? 상관없소. 지금 이 시각에도 비명을 지르는 민초들을 생각하면, 일을 제대로 못 한 관리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고, 천 개의 목이 달아나도 죄를 사면받을 수 없소.”
연호정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잔뜩 날이 서 있는 소방이 있었다. 쇠사슬로 양손이 묶인 채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나찰(羅刹)과도 같았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시오?”
“……?”
“새외, 사음교라는 사교 무리의 잔당이오. 그리고 사음교는 신화교라는 집단과 손을 잡고 무림과 황실을 전복하여 중원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소이다.”
“뭐, 뭐라고?!”
종명은 깜짝 놀라서 소방을 바라보았다.
소방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사음교더러 사교 무리라고 한 연호정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처단한 그 암살자 역시 사음교에서 파견한 간자였소. 그자는 훗날 벌어질 전쟁에서, 중원 최남단의 봉쇄선 역할을 함과 동시에 유사시 지원 병력까지 도맡을 전력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지.”
번쩍!
연호정의 눈빛이 극도로 차가워졌다.
“당신이 보지 못한, 보지 않으려 했던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소. 그리고 그 일은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며, 실제로 당장 건드리기에는 너무 큰 일로 번져 버리기까지 했지.”
“그, 그 말이 정녕 사실인가?!”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사실이냐고 물었네!”
“좌포정사씩이나 되는 관리의 썩어 버린 머리통을 뒤흔드는 자리에서 거짓말은 하지 않소.”
“이, 이런!”
종명이 벌떡 일어났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은 마시오. 이미 놈들의 마수가 고위층까지 뻗어 있으니.”
“……뭐?”
“입을 봉하란 말이오. 그 안건에 대해 잘못 입을 놀리는 순간, 당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달아날 것이오. 당신 곁에서 칠 년 동안 함께해 왔던 암살자보다 열 배는 무서운 작자들을 파견하겠지.”
“……!!”
“또한, 그 이전에 함부로 나불대다간 내가 먼저 당신을 죽일 것이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시겠소? 우리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
“당신은 이제 벗어날 수 없소. 이 노인의 말마따나 둘 중 하나요. 입 꾹 다물고 광동을 제대로 손보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든지.”
“…….”
“어차피 자기 보전에 환장한 사람이니, 입조심하라는 말은 더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좋군.”
연호정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은씨세가 측과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 같더군.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광동을 살리는 길을. 미리 말하건대, 광동 무림의 도움 없이 당신의 행정이 잘 먹히리란 착각은 더는 하지 마시오. 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겠소.”
연호정은 승선포정사사에게만 들른 것이 아니었다. 탐경과 소방을 데리고 도지휘사사는 물론 제형안찰사사까지 닷새에 걸쳐 돌았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탐경의 존재감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각 부의 최고 권력자들조차 탐경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더하여 소방이라는 존재가 있으니 일 처리가 아주 쉬웠다. 연호정이 먼저 판을 깔면 탐경이 구슬리고, 마지막으로 소방의 존재가 회심의 일격이 되어 관리들을 의도대로 이끌 수 있었다.
그렇게 닷새 동안의 순회는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 이로써 내가 할 일은 다 끝난 것인가?”
“수고하셨소.”
탐경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네 차례인가? 우리 거래 말일세.”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