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37)
437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5)
묵비가 나가자 자리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말했다.
“따로 하달할 일이 생기면 말해 줄게. 형님은 탕마군과 멸사군 좀 다독거려 줘.”
모용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멸사군도?”
“왜? 의정군의 이인자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냐?”
“어…… 뭐, 그건 그렇지만.”
괜스레 이인자라고 불리니 쑥스럽기도 하고 묵비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탕마군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떠나, 아직 두 부대는 진정한 하나가 되질 못 했어. 물론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판은 깔아 줘야지.”
“음, 연제의 말이 옳네.”
“두 부대의 성격이 워낙에 다르지만, 상황에 따라 함께 작전을 펼쳐야 할 때도 있어. 임무 하나가 끝났으니, 이제 슬슬 서로의 장단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나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네. 다만, 멸사군 측 군사가 있을 때 추진해 보려고 했었지.”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부딪쳐 보는 것도 좋지. 마침 시간이 붕 뜬 것 같으니까, 이럴 때 시원하게 부딪치게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알겠네. 그렇게 하지.”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별일 없으면 이따 술이나 한잔하세. 어떤가?”
“별일이 없으면 말이지.”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형으로서 하는 말인데, 연제는 쉬는 법도 좀 알아야 하네. 연제가 다시 보기 힘든 천재라는 거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둘러보면 인재는 많아.”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탕마멸사에 관한 권한을 형님한테 주는 거잖아?”
“사람 참.”
그렇게 모용우가 방을 나섰다.
연호정이 사마현을 보았다.
사마현 역시 연호정을 보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무슨 일이오?”
“뭐가?”
“억지로 사람들 다 내쫓고, 내게 따로 할 말이 뭐냔 말이오.”
“억지로 쫓은 건 아니야.”
“뭐가 되었든 내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로군.”
“많지.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
“나 역시 묻고 싶은 게 있으니 잘되었소.”
“그래? 그럼 먼저 물어보게.”
사마현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뭐요?”
연호정이 작게 웃었다.
“대단한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만.”
“나로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소.”
“그런가.”
“그렇소.”
“그럼 간단하게 대답하지. 우리와 함께하자.”
“거절하오.”
담담한 제안에 칼 같은 거절이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왜지?”
“장난하는 거요? 나는 암살자요.”
“나도 알아, 인마.”
“홍관, 아니 야율적이라고 했지. 그놈은 내 부모를 죽이고 내 기억을 지운 채 날 암살자로 키웠소. 그렇게 산 세월이 평범하게 지낸 세월보다도 길었소.”
“그것도 알아.”
“안다면 다행이군. 나는 암살자가 되었소. 내 삶에서, 내가 보고 배운 지식이 떨어져 나갈 일은 없을 것이오.”
떨쳐 내고 싶어도 떨쳐 내지 못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연호정은 사마현의 말을 이해했다. 원수가 자신을 암살자로 키웠다. 어떻게든 원수는 죽였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암살자로서의 기술과 삶뿐이었다.
그런 것은 떨쳐 내라, 다른 삶을 살아라 등의 말 따위로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미 사마현의 몸과 영혼은 암살자의 그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적어도 사마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연호정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계속 암살자로 살 생각인가? 새로운 음신이 되어, 과거 전설로 남았던 음신의 명성을 이어 가고 싶은가?”
“…….”
“아직 정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렇소.”
적어도 사마현은 솔직할 줄 알았다. 그것이 연호정이 사마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제의하는 내 쪽에서야 아쉽지만, 그것이 네 녀석의 선택이라면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지.”
“…….”
“말했듯, 나는 너를 영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라고 한 거야. 다만 그사이에 공사가 다망해서 지금껏 널 잡아 두고 있었군.”
“사람 불러다 놓고 이만저만 실례가 아니로군.”
“한데 그 시간에 넌 뭘 했지?”
“……?”
“열흘이 넘는 시간이 있었는데, 네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조차 정하지 못했나?”
사마현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열흘 만에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고작 열흘? 웃기지 마라. 묵 부장은 가족 같은 사형제의 죽음에서 벗어나는 데 사흘이면 족했고, 제 삶의 목적을 정하지는 못했을지언정 한 발을 떼는 결정에 하루도 걸리지 않았어.”
“……!”
“깊게 생각하는 건 좋지만, 유별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고민했는데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일단은 걸어 보는 수밖에 없잖아? 그게 인생 아니던가?”
“…….”
“태어났으니 살고, 죽을 이유가 없기에 사는 거라면 그것도 네 자유겠지. 다만 그렇게 살려거든 적어도 암살자 짓은 하지 마라.”
“왜 그렇소?”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하는 순간, 네 녀석이 죽을 이유가 생겨난다.”
“……!!”
“서슴없이 죽여 주마. 죽고 싶다면, 그 일을 하도록 해.”
사마현의 눈이 살짝 충혈되었다.
“협박하는 거요?”
“농담처럼 들렸나?”
“웃기는군. 대의라는 명목하에 적지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는 건 백도 정파라고 다를 바 없소.”
“말 한번 잘했다. 적어도 우리는 대의라는 명분이라도 있지, 넌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어서 돈 받고 사람을 죽이냐? 고민 깊은 명분조차 없이, 그 알량한 목숨줄 이어 가려고 사람 죽이는 일을 하는 너는 도대체 어떤 놈이냐?”
사마현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연호정의 말은 암살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먹고살려면 사람 죽이지 말고 농사를 지어. 장사를 하든 장사치 밑으로 들어가서 노역이라도 하든, 평범한 일을 해. 그것만으로도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
“왜? 배운 암살 기술을 써먹지 못한다는 게 아쉽나? 아니면 그 일들이 만만해 보이냐?”
“쉽게 말하지 마시오.”
“어렵게 꼬아서 말하면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쉽게 말해 주는 거다, 멍청한 놈아.”
“…….”
“조언이랍시고 몇 마디 더 해 주지. 원수에게 암살자로서의 삶을 강요받았다? 벗어나라. 부모 형제를 죽인 암살자 놈의 기술 따위를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상대로 발휘하며 산다면, 넌 죽었다 깨어나도 야율적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어.”
“……!”
“반대로, 그 또한 앞으로 얻을 무수히 많은 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네 녀석과 하등 관계가 없는 사람의 목숨을 취할 생각은 마라.”
연호정의 눈에 엄기(嚴氣)가 서렸다.
“힘은 책임이다. 그리고 그 힘은, 작게는 문무(文武)에서 나오고 크게는 조직과 사회에서 나온다. 그래서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힘이 주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
“암살기(暗殺技)를 쓰고 싶다면 세상을 위해 써라. 암살기를 봉인하고 싶다면 무림을 떠나 평범하게 살아라. 이 말이 내가 널 위해 해 줄 수 있는, 열흘이 넘도록 뭐 하나 정하지도 못한 우유부단한 놈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맹에서 제법 많은 공금을 받았다. 사람 하나 먹여 살리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어. 우리와 함께하든, 평범하게 살든, 아니면 암살자로 돌아가든 이곳에서 편하게 고민해라.”
“…….”
“다만 우리가 언제 떠날지는 모른다. 그 안에 결정을 내리도록 해.”
사마현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당신은 참 단순하게도 말하는 사람이오.”
“일을 단순하게 만들지 않으면 시시각각 목숨이 위험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건 나나 너나 똑같아. 한데…….”
“…….”
“야.”
“……?”
“생각해 보니 여기 내 방 아니냐? 왜 내가 일어서야 하냐?”
“…….”
“할 말 없으면 썩 나가, 인마.”
물끄러미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사마현이 벌떡 일어나더니 쿵쿵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삐졌나?”
좀 과하게 말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마현은 솔직한 녀석이었다. 나이에 비해 성취도 뛰어났고, 암살자로 키워졌음에도 타인에게 공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부러 독하게 말했다. 이 정도 자극에 엇나가진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결정하지 못했다면 일단 움직여 보기라도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얘기하다 보니 답답해져서 지나치게 쏘아붙인 감은 있지만.
“참 힘든 녀석들 많다.”
연호정이 의자에 머리를 묻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한 시진 후.
눈을 감고 연가신단의 힘을 다각도로 고민하던 연호정의 기감에 가득상의 인기척이 잡혔다.
‘확실히 후개도 늘었어.’
그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있음에도 며칠 전보다 실력이 늘었다. 증가한 진기의 밀도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연호정은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 후.
“대수. 들어가겠소.”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가득상이 들어왔다.
“어떻게 되었소?”
가득상의 얼굴은 상당히 진지하고 어두웠다. 연호정의 표정 역시 절로 심각해졌다.
“일이 아주 껄끄럽게 돌아가고 있소.”
“무슨 뜻이오?”
“연 대수를 만나고 싶다 하더이다.”
“…….”
“대충 둘러댔지만 막무가내더군. 물론 무림맹 정보 고문으로서 그자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소이다. 다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구려.”
“그렇소.”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아까 후개가 이리 말했소. 묵룡부주 양천이 무림맹 본단이 아닌 내게 먼저 서신을 보낸 것은, 나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기에 내린 선택이라고.”
“그렇소.”
“한데 보타암의 다른 지파에서도 나를 보자고 하는군. 이게 무슨 의미 같소?”
“저쪽에서도 알고 있는 거요. 대수의 영향력을.”
“보타암이 정보 쪽으로는 맹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
가득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묵룡부주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사람을 보낼 테니 잘 맞아 달라고 서신을 보낸 거였나?”
이로써 양천이 보타암 사태에 깊게 관여되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연호정 측에서 거기까지 들여다보리라는 걸, 양천 역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 처리가 빠르고 부드러워. 이전보다 훨씬 더.’
음황신장의 독소를 배출시키는 과정에서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양천이 보타암을 작정하고 박살 내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건드리기 힘든데.’
그러지 말라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말할 수가 없다.
지금의 양천은 과거의 양천이 아니었다. 비록 보타암이 백도로 분류되는 문파긴 하지만, 워낙 독립적인 색채를 가졌기에 쉽게 끼어들 수가 없다.
‘여기에 나까지 끼워 넣겠다는 건, 정말 제대로 해볼 자신감이 있다는 거야.’
가득상이 물었다.
“만나 보겠소?”
“거절 못 하셨다며? 만나야지, 그럼.”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아니오. 외려 고맙소. 후개가 드디어 내 일 처리 방식을 이해해 주기 시작한 것 같소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도끼는 두고 가시오.”
“사고 안 칠 거요.”
“술꾼한테 술독을 맡기지.”
“그럴 거면 왜 만나라고 한 거요?”
“젠장, 그러게나 말이외다.”
가득상이 투덜거렸다.
“내일 정오로 잡겠소.”
“후개.”
“말씀하시오.”
잠시 고민하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묵룡부 측 정보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주시하시오.”
“응? 묵룡부는 갑자기 왜?”
“보타암의 지파가 세 개라고 하지 않았소? 그중 하나는 묵룡부, 하나는 이쪽이라면, 남은 하나는?”
“……!”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안 가오. 그래서 주시해 달라는 거요.”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설마하니 지랄맞게 움직이진 않겠지만…… 양 부주도 정치가가 다 된 것 같아서 말이오.”
정치가는 자신이 당한 걸 절대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