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38)
438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6)
“……하여, 의정군이 묵룡부주 양천의 제자 홍관을 필두로 다수의 암살자를 제거하며 광동성에서 벌어진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과 탄성이 흘러나왔다.
청성의 장문인 풍벽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의정군이외다. 기대에 부응해 주는구먼.”
맹의 봉공 중에서 자신의 거취를 분명하게 하지 않은 자가 몇몇 있었다. 풍벽자 역시 그중 하나였다.
정치와는 담을 쌓은 사람들. 평생 무공을 익히고 작게는 문파, 크게는 천하를 위해 힘써 왔던 사람들이다. 경륜도 있고 머리도 좋지만, 굳이 속세의 힘 싸움에 자신을 던지려 하지 않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풍벽자는 이상적인 백도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가진바 능력과는 별개로.
제갈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이 끝났으니 곧장 철수하라고 명해야 함이 마땅하나, 광동 측 백도 무림이 입은 타격이 워낙에 컸던지라 힘의 공백이 메워지기 전까진 대기를 시키는 것이 옳은 줄로 압니다.”
“으음, 맞는 말이오. 중요한 것은 악의 뿌리를 뽑는 일이 아니외다. 더 이상 악이 싹트지 않게 만드는 것이지.”
풍벽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문호의 말에 동의했다.
그때, 공동파 장문인 등천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군사의 말씀이 실로 옳소. 그러나 맹의 힘이 지나치게 분산되는 것도 썩 좋지 않다고 생각하오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의정군의 힘이 강력한 것은 사실이나, 유군 부대 하나가 빠졌다고 본맹의 힘이 분산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본맹에는 의정군 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대가 존재합니다.”
“물론 그렇소. 의정군은 맹의 부대 중 하나일 뿐이오. 그러나 본맹의 이름값을 세상에 알린 것 역시 의정군이오. 이제 의정군은 무림맹을 대표하는 부대가 되어 버렸소.”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제갈문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하여, 등 봉공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등천교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맹주 선거까지 내년으로 미뤄진 참이외다.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민심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나, 맹주도 뽑지 않은 상황에서 대외 활동이 너무 잦은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오.”
그에 풍벽자 역시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것이 어찌 문제가 되오?”
“보시오. 흑도는 투왕 양천이라는 절대고수 아래 힘을 집결했소. 그러나 전체적인 전력, 특히나 고수진의 질을 보았을 때 묵룡부는 본맹의 상대가 될 수 없소.”
“한데요?”
“문제는 본맹과 묵룡부의 근본적인 차이외다. 같은 연맹이라지만, 본맹은 무수히 많은 문파가 대의(大義)를 위해 모였소. 맹주라도 있다면 모를까, 하나의 구심점이 없는 지금으로선 대외의 일에 발 빠른 대응을 하기가 어렵소.”
“으음.”
“반면 묵룡부는 다르오. 말이 연맹이지, 묵룡부는 투왕이 통치하는 소국(小國)이나 다름이 없소. 투왕은 휘하 조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묵룡부는 언제나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반응할 것이오.”
등천교가 제갈문호에게 물었다.
“군사께 묻고 싶소. 이 차이가 작다고 생각하시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작지 않습니다. 등 봉공 말씀대로, 한 수장의 즉각적인 명령을 받는 조직의 속도감은 다수의 수뇌부가 운영하는 조직의 신중함을 앞설 때가 많지요.”
“그렇소.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를 떠나, 묵룡부에는 힘이 있소. 투왕 양천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지금까지야 그자도 숨죽이고 있었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순간 본맹의 힘이 각개 격파당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소.”
지나친 과격함으로 여러 사람의 눈총을 받아 왔지만, 등천교의 발언은 결코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언젠가는 이 사안에 대해 분명히 해결을 봐야만 했다.
다만, 이 사안에 대한 해결책을 당장 논의하지 않은 것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제갈문호는 상황에 따른 중요도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의문이었다.
‘왜 이 시점에?’
언제라도,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을 한 사람이 등천교라는 데에 있었다.
등천교는 모용군의 사람이었다. 본인은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모용군에게 휘둘리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설마.’
제갈문호가 모용군을 힐끔거렸다.
모용군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 다시 야욕을 드러낼 생각이던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다. 다만, 삼교를 상대하면서 본 모용군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물론 모용군의 야심 역시 죽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만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제갈문호는 자신의 눈을, 연호정의 판단을, 연위의 직감을 믿었다. 세 사람이 보기에, 모용군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다시 야욕을 드러낼 사람은 아니었다.
‘다 떠나서, 맹주 선거를 내년으로 미루자고 건의한 것은 모용군이었다. 이쪽을 방심케 할 수작이라고 볼 수 없어. 그 정도로 치졸한 인물은 아니야.’
심지어 모용군은 제 동생인 모용우의 목숨까지 걸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았으니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모용군에게 있어, 모용우라는 존재가 비할 데 없이 강력한 전력이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그렇다면.’
제갈문호가 다시 등천교를 바라보았다.
등천교는 또렷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단독 판단이란 말이군.’
왜? 이유가 무엇일까?
등천교는 이내 그 이유를, 듣는 사람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모두가 알아야 할 사실인 것 같으니 말하리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새외에 심상치 않은 집단이 있다는 정보를 받았소.”
순간 회의장 안의 분위기가 급전직하했다.
풍벽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상치 않은 집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요. 새외의 어떠한 조직이 우리 중원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소이다.”
“뭐, 뭐라고?!”
풍벽자의 얼굴에 경악 어린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정보를 처음 듣는 사람 모두가 깜짝 놀라 등천교를 보았다.
등천교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본문인 공동파는 북쪽 새외에 인접해 있소. 물론 서쪽의 끝인 곤륜만큼은 아니지만, 본문이 남들 못지않은 부(富)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옥문관까지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오.”
옥문관(玉門關)은 감숙의 끝으로, 돈황은 물론 그 너머의 서쪽 지역과 중원을 잇는 마지막 관문이다.
공동파는 공동산에 똬리를 틀고 있고, 공동산은 감숙에 있다. 물론 공동산에서 옥문관까지의 거리는 끝과 끝이라 몹시 멀지만, 공동파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여 감숙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옥문관에서는 온갖 상인들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소. 그 과다한 정보를 거르는 것만으로도 본문의 정보단은 일 년에 하루도 쉬기 힘들 지경이오.”
“…….”
“아시겠소? 적어도 중원 최북단과 새외 측 정보에 있어서는 본문 역시 개방에 뒤지지 않소. 아니, 그 이상이지. 즉, 이 정보가 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오.”
“그렇군요.”
“내, 이 자리를 빌려서 군사께 묻고 싶소.”
등천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군사라는 직책상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척,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다른 봉공분들과 달리 지나치게 담담하시군.”
“…….”
“이 사실, 알고 계셨소이까?”
가만히 등천교를 보던 제갈문호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알고 있었소.”
순간 모든 사람의 눈이 공공대사에게로 향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외의 심상치 않은 무리가 준동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은 알고 있었소.”
“뭐라?!”
등천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대사께서도 알고 계셨단 말이오?!”
“그렇소. 그리고 그 사실을 군사에게 알려 준 것도 나요.”
“……!!”
상상을 초월하는 폭탄 발언에 좌중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제갈문호와 연위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모용군조차도 공공대사의 발언에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릴 지경이었다.
등천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알고 계셨으면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단 말이오?”
“그렇소.”
“……이 부분,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오! 어찌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셨소?”
공공대사는 담담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으니까.”
“뭐라?!”
“빈승은 그들, 정확히는 삼교(三敎)라고 해야겠지. 삼교 측이 얼마나 오랜 시간 중원을 노렸는지를, 그리고 그 힘이 능히 중원을 휩쓸 만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소.”
“그렇다면 더더욱……!”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관부와 황궁, 나아가 무림에까지 침투하여 이미 판을 깔고 있었다는 것도.”
“……?!”
공공대사가 차를 홀짝였다.
“빈승은 부처를 모시는 자요. 하나, 제아무리 부처를 모신다 한들 속세에 나온 이상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소.”
“…….”
“문제는 그 평화를 이루는 과정이오. 결과가 나빠도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괜찮은지도 모르겠고, 과정이 나빠도 결과만 괜찮으면 좋다는 의견에도 동의하기 힘드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번쩍!
일순 공공대사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등천교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자존심 때문에 기어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조금만 마음을 풀고 있었다면 진작 시선을 피해 버렸을 정도로 공공대사의 눈빛은 부담스러웠다.
“다만 우리 중 누구도 모르는 새에 그들이 중원 땅을 잠식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한 번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외다.”
“…….”
“더 최악이 있소. 만에 하나, 우리 중에 삼교의 세작이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겠소?”
“……!!”
“싸움다운 싸움조차 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어느새 저들이 조종하는 대로 대국을 관망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허무하게 패배하게 될 거란 말이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이 발언이 여러분들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고 있소. 하나, 빈승으로서는 쉽사리 정보를 공개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오.”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들의 전력은 이미 완성형이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닌 완벽한 승리를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중원에 스며들었을 뿐, 실질적인 전력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중원 무림과 승부를 낼 수 있을 정도라고 추측되오.”
공공대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지켜 온 비밀도, 이제 와선 등 봉공 덕분에 허사가 되었구려. 나와 군사는 우리 봉공 중 혹여라도 세작이 있는지, 세작이 있다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를 조사하고 있었거늘, 진짜 세작이 이곳에 있다면 이제 더 철저히 숨으려 할 것이오.”
등천교는 당황했다. 갑자기 공공대사가 자신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찌 나 때문이라고……?!”
“등 봉공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외다. 나 역시 봉공들을 속인 죄가 있으니, 그에 관해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오.”
“…….”
“다만, 군사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은 소림의 이름으로 용납하지 않겠소. 천하를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하다면 모두를 속여서라도 선(善)을 이뤄야 할 사람에게 그런 사소한 일로 뭐라 하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가 아니겠소?”
“…….”
“돌을 던지려거든 내게 던지시오. 나의 오만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지겠소이다.”
“……그 말, 분명히 기억하겠소.”
“한 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을 것이오.”
공공대사가 제갈문호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소, 군사?”
공공대사가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제갈문호는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