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43)
443화. 검(劍)에 실린 미래 (5)
놀란 것은 화운만이 아니었다.
‘이 사람.’
정안은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세상에 대해 몰라도 사람은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잘 알면 세상을 잘 알 수 있다.
정안은 아직 세상은커녕 사람도 잘 몰랐다. 그녀가 진심을 나누며 만나 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면 그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정안은 연호정의 마음을, 그의 기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분노? 안타까움?’
사람의 감정은 어느 한 가지에 지배되지 않는다. 몹시 복잡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정안은 연호정의 복잡한 마음을 읽었다. 그중 가장 부각되는 감정이 바로 분노와 안타까움이었다.
‘무엇에 분노하는 거지? 무엇이 그리도 안타까운 걸까?’
대답 없는 화운을 향해,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소. 나는 그 많은 문파가 실패했으니 보타암도 실패할 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오. 같은 의미로, 많은 문파가 평화와 안녕을 시도했는데 보타암이라고 그와 같은 대의를 내세우지 못할 까닭도 없소. 그것은 조직의 자유외다.”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이 옹졸한 식견을 가진 놈이 보기에, 지금 귀빈의 말씀은 일관성이 없는 듯하오.”
“일관성이 없다니요?”
“고통받는 민초를 구제하고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강호에 나선다? 그럴 수 있소. 하지만, 그와 같은 방법이 꼭 귀 지파에서 검후가 나와야만 가능한 일이오?”
화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말씀드렸듯, 차기 검후의 자격에 맞는 후보는 이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강단과 순후함이라면…….”
“동시에, 귀빈께서는 반드시 검후가 존재해야만 보타가 세상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다고 보시는구려.”
“네?”
“검후가 그리도 대단하오? 검후라는 직책은 어찌 얻을 수 있소? 무공이 뛰어난 자가 얻는 칭호요? 아니면 깨달음이 남달라야 얻을 수 있는 칭호요? 그도 아니면, 불가에서 말하는 미래불(未來佛)과 같이 언젠가 세상을 구제해 줄 신(神)적인 존재요?”
“……!”
“상대 지파에서 검후를 배출하면, 평화에 이바지할 방법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오?”
“호장께서 잘못 이해하신 듯한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이 아이야말로…….”
“무림에 나서고자 하는 이유는 또 뭐요?”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림에 나서서 문파를 개설하고, 모두가 알아주는 조직이 되어야만 평화를 위해 힘쓸 수 있소이까? 그저 민초들의 삶에 녹아드는 방법도 있고, 하다못해 명성을 이용해 재물로써 민초를 풍족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거늘, 어찌 무림에 나서려 하시오?”
“호장.”
“조금 전에 말씀드렸소이다. 귀빈의 말에는 일관성이 없다고. 귀빈의 말이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실이 바로잡혀야만 하오.”
“……?”
“귀빈의 지파에서 검후를 배출해 보타암의 주인이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거라면, 지금까지 귀빈께서 하신 말씀이 일관성을 갖게 되오.”
화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보타암의 상징이었던 검후는, 이제 실질적인 힘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왜 힘이 되어야 하냔 말이오.”
“네?”
“무림에 나서지 않으면 그만이오. 더 솔직히 말해 드리리까? 무림에 나서 봤자, 그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절망과 자괴감뿐이외다.”
“호장.”
“보타암이 문파가 아닌 사찰이라면, 그대들이 가진 진정한 힘은 무력(武力)이 아닌 불심(佛心)이오. 한데 어찌하여 무력을 안고 세상에 나오려는 것이오?”
“……!”
“그대들이 가장 잘하는, 그대들의 진심이 깃들어 있는 불심을 안고 세상에 나서면 안 되는 것이오? 검후가 부처라도 되는 거요? 어찌 그리 검후에 집착하는 것이오?”
“집착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집착이 아니라면, 진정 귀하의 지파에서 검후가 나와야만 보타가 세상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인데.”
연호정의 눈에 매서운 엄기(嚴氣)가 어렸다.
그 눈빛은 흑암제의 눈빛도, 벽산호장의 눈빛도 아니었다. 순전히 상대보다 더 오래 살고 많이 겪은, 엄한 선배의 눈빛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분노와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던 화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뻣뻣해졌다.
“보타암에 바보만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린지 모르지 않을 것이오. 만에 하나 오로지 그것만이 진리요, 구제라고 믿는 거라면, 그대들은 세상에 나서기 위한 수행 이전에 상식부터 배워야 함이 옳소.”
“보타암을 모욕하는 거라면……!”
“언제부터요?”
“……?!”
“고루한 역사 운운하며, 세상에 나가 민초들을 구제한다는 명목하에 검후라는 상징을 내세워 속세에서의 성공을 바라게 된 때가 언제부터냐는 것이오.”
“호장!”
“부끄럽지 않소이까? 당신들의 후계자 앞에서?”
“뭐, 뭐라고?”
연호정이 정안을 바라보았다.
정안은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후계자를 잘 키워 냈소. 한때나마 난세를 끝장내기 위한 최고의 가치가 힘이라고 확신하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
“보시다시피 나는 고집도 세고 오만하며, 남의 말 따위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벽창호외다. 나 같은 놈에게 수만 자루의 검이 겨눠진다 한들 생각이 바뀌겠소? 반성이란 걸 하겠느냔 말이오.”
“…….”
“한데 이 소저는 그걸 해냈소. 나로 하여금 과거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단 말이오. 그것은 검이 아닌 눈과 마음의 힘이었소. 수만의 고수도 하지 못한 일을, 나보다도 약한 소저가 해냈단 말이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정안을 향한 그의 미소는, 화운을 엄하게 질책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처럼 보였다.
“힘은 필요하오.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소. 그러나, 이 소저와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힘이 설 곳은 줄어들게 마련이오.”
“…….”
“나는 그것이야말로, 언제가 될지 모르는 평화의 시기를 조금이나마 앞당기는 방법이라 생각하오.”
화운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호장께서는 나보다도 어리숙하군요.”
“그래 보이오?”
“그래요. 세상은 좋은 사람의 웃음만으로는 바뀌지 않아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보타가 세상으로 나가려 하는 겁니다. 미약하게나마 힘이 되기 위해서.”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지 않겠소. 말릴 명분도 없고. 하지만 그것이 귀하의 지파에서 검후가 나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소.”
“……아쉽군요.”
드르륵.
화운이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산호장은 그 실력만큼이나 안목이 뛰어난 천재라고 하던데,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소문이란 때때로 과장되게 마련이지. 나는 소문처럼 대단한 사람이 못 되오.”
“그래요. 새삼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래서 세상은 무서운 것이로군요.”
정안은 당황하여 화운을 보았다.
“사고님! 말씀이 지나치세요!”
“닥치거라!”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질책이었다. 아니, 말이 질책이지 신경질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정안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변하셨다고는 해도, 사고께서 자신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화운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무림맹 본단으로 가 봤자 자기들끼리 싸움질이나 해 대는 통에 제대로 된 대답을 얻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찾아온 사람이 당신이에요. 적어도 벽산호장은 당대 무림맹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으니까.”
“그리 들으셨소?”
“그리 들었는데, 사실과는 다르다는 게 유감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로 한 조직을 대표할 수가 없어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 보셨소. 모자람이 과한 사람이외다.”
“괜한 발걸음을 했군요. 차는 잘 마셨어요. 정안, 일어나거라.”
정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화운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운이 버럭 소리쳤다.
“일어나래도!”
그때, 연호정이 물었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 화를 내게 하는 것이오?”
“더 듣고 싶지 않군요.”
“자식처럼 여겨 온 후계자의 눈과 마음보다, 스스로의 자존심과 욕망을 우선시하게 된 건 언제부터요?”
“닥치세요!”
순간 연호정의 말투가 바뀌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없었을 것 같은가?”
화운이 움찔했다. 찰나지간 바뀐 상대의 분위기가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온 것이다.
“천하에 나와 세상을 바꾸겠다며 인생을 불사른 사람은 많다. 그중 그 말에 진심을 담은 사람은 한 줌도 되지 않지. 그리고 그 한 줌도 안 되는 사람 중 꿈을 실현시킨 사람은,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난 듣지 않겠어요.”
“그래, 대부분 당신 같았지. 길을 걷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이거늘, 하물며 수행자인 당신마저도 귀를 닫고 자신을 관조하지 못하게 만들었지.”
“……!”
“그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욕망에 졌다.”
“닥쳐!”
훅!
화운의 몸에서 매서운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갈무리되었을 땐 범부처럼 보였지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기파가 그녀를 일대 고수로 변모시켰다.
놀랍게도 그 기파의 수준은 거의 연호정에 근접해 있었다. 보타암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저 기파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입증해 낸 것이다.
“불법을 따르는 자에게 그따위 모욕이라니! 당신이 무림맹의 장군급 인사가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죽였을 거란 말인가?”
“……그래.”
화운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상처 입은 자존심, 그것도 지파의 후계자가 보는 앞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스스로가 허상으로 만들어 낸 자존심에 상처 입은 채 화를 내고 있었다.
“죽였을 것이다.”
정안이 소리쳤다.
“사고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
“당신이 죽여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부처다. 깨달음을 통한 진리에 다다르기 위해선 부처조차 죽일 강단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수행자가 아닌 나도 아는 사실이야.”
“속세의 알량한 무를 익힌 잡부 따위가 내게 불법을 논해?!”
“적어도 지금의 당신보다는 차라리 내가 불법에 더 가까운 것 같군. 불경 한 줄 읽어 본 적 없는 내가 말이야.”
“이놈이……!”
스르륵.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리 사과하겠다.”
“닥쳐라! 너의 사과 따위는 듣지 않겠다!”
“애초에 난 당신들을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어.”
“뭐라?!”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잘 보고 계셨소이까?”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묻는 연호정.
놀랍게도, 허공에서 들려오는 대답이 있었다.
“보았소. 그리고 들었소.”
화운은 물론 정안조차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먼저 부처를 죽여 보신 스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소?”
“그저, 안타까울 뿐이오.”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엔, 정말 안타까움 외의 감정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과 감정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짓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화운이 버럭 외쳤다.
“누구냐!”
스르르륵.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
그는 바로 범오였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소림의 범오가 보타의 각자(覺者)들께 인사드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