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47)
447화. 흔들림 (2)
촤아아악!
뜨끈한 물로 수욕을 마친 후, 또다시 찬물을 머리에 뿌린 청년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사람이 몰입을 하다 보면 식음과 수면도 잊는 법이다. 하물며 씻는 거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청년은 반나절이 넘도록 수욕을 하며 묵은 때를 잔뜩 벗겼다. 손톱과 발톱도 싹 자르고, 엉킨 머리카락도 깔끔하게 베어 버렸다.
그러자 특유의 환한 피부와 서글서글한 눈매가 드러났다. 광기에 젖어 칼날처럼 번뜩이던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한없이 깊고 맑은 눈빛이 몹시 보기 좋았다.
“흐음.”
옷을 입고 연무장으로 나온 청년, 연지평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강량이 있었다.
“아, 형님.”
강량이 피식 웃었다.
“깨달음이라도 있었던 거냐? 아니면 드디어 알아 버린 거냐? 네 녀석의 꼴이 개방에서도 받아 주기 힘들 만큼 무자비했다는 걸.”
연지평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였습니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아. 냄새는 안 났거든.”
“……죄송합니다.”
“진짜다. 신기하더라니까.”
연지평은 그저 웃어만 보았다.
그런 연지평을 보는 강량의 눈이 빛났다.
‘달라졌군.’
연지평의 눈빛도, 자세도, 그리고 분위기도.
엊그제 보았던 연지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단 몸과 옷차림이 말끔해져서만은 아니었다.
‘달라졌어. 눈빛은 물론, 수습되지 않아 팔방으로 요동치던 검기도.’
연지평의 검기는 그 농밀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처음에는 그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곳에서 수련하는 동안 밀도가 점점 깊어지더니, 나중에는 검기의 가닥 하나하나가 실검(實劍)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검기라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면 무용지물인 법이었다. 타고난 신력의 소유자가 보검을 들고 휘두른다 한들, 고수가 든 나뭇가지만도 못한 위력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지평의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수습했다. 실낱같은 기운 한 자락 찾아보기 힘들 정도야.’
사방으로 거칠게 날뛰어 대던 검기의 다발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연지평을 보던 강량이 이내 히죽 웃었다.
“지평.”
“예, 형님.”
차아아아아앙!
일순간 뽑힌 검이 연지평의 목덜미를 향해 송곳처럼 쏘아졌다.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은 일검이었다. 강량 역시 놀고만 있진 않았던 듯, 발검에서 쾌검(快劍)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이 소름이 끼칠 만큼 깔끔했다.
“…….”
강량의 검이 연지평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연지평은 여전히 깊은 눈으로 강량을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연지평을 보던 강량이 검을 회수했다.
“왜 피하지 않았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요.”
“살기를 뿜었는데? 설마하니, 살기의 허실(虛實)을 간파했다는 거냐?”
연지평이 고개를 저었다.
“허실을 파악하기 이전에, 형님께서 제 목을 날릴 리가 없잖습니까?”
강량은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혹시 또 알아? 나중에 한 여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다 칼까지 뽑을지?”
“그럼 그때 가서는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슬쩍 자극해 보려고 한 말인데, 대응이 상당히 부드럽다.
꾸민다고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마음이 그만큼 안정되고 여유롭다는 뜻이리라.
‘무공의 질적 상승을 떠나, 혼란으로 가득하던 마음을 완전히 바로잡았군.’
스르릉! 탁!
강량이 납검했다.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보기 좋다.”
참으로 그다운 한마디였다.
연지평이 입을 열었다.
“형님의 검력 역시 엄청나게 발전했네요.”
“보이냐?”
“예, 보입니다.”
“어땠냐?”
“저와는 다르더군요.”
강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를 수밖에 없지.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를 논할 필요는 없겠지만,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는 아직까지 내가 위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네가 손장난을 좀 친다면 내가 위험하겠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여전히 평온한 어조였다.
목소리에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말하는데도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다.
강량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너와 형님은 어쩌다가 그런 괴물들이 됐는지 모르겠다.”
“괴물이라니요?”
“형님은 그 나이에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며 대문파 장문인조차도 눈 아래로 보는 무(武)를 쌓았고, 너는 경험도 일천한 녀석이 몇 달 골머리를 앓았다고 정검(靜劍)을 깨닫지 않았더냐.”
정검.
정검이란 곧 검의 무수히 많은 경지 중 하나를 뜻한다.
정검이란 경지는 단계를 나눌 수 없는 경지다. 연지평보다 무공 수위가 낮아도 정검을 깨달을 수 있고, 성천의 강자라도 정검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말이 정검이지, 기실 그럴듯하게 부를 단어가 없어서 그리 부를 뿐이었다.
다만 강량은 알고 있었다. 정검을 깨달은 연지평의 검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한 점 흔들림 없이 주인의 의지를 그대로 실행할 수 있으리란 걸.
분노로 눈이 뒤집혀도,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져도 그의 검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강량의 물음에, 연무장 벽 너머에서 연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평이 혼란 가득한 검을 수습했으니 칭찬해 줘야 할 때라는 건 알겠다.”
팔짱을 낀 채 벽 뒤에 기대어 서 있던 연호정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담을 넘었다.
담을 넘은 그가 곧장 연지평 앞까지 걸어왔다.
“…….”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연지평의 키는 연호정과 거의 비슷했다.
중원 여기저기를 다니며 워낙 거친 삶을 살았기에 연호정의 피부는 하얗지 않았다. 반면 연지평은 땡볕 아래에서 고된 수련을 했음에도 하얗기만 했다.
생김새는 닮았지만 연호정의 인상은 연위처럼 날카로웠고, 연지평의 인상은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서글서글하고 안온했다.
둘은 그렇게나 닮았고, 그렇게나 달랐다.
하지만 강량은 오늘처럼 이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특히나 눈이 그랬다.
‘눈빛이 아주 판박이네.’
거친 손속과 파격적인 언행과는 달리 연호정의 눈빛은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연지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색이 다를 뿐, 정검을 깨달은 연지평의 눈빛도 연호정 못지않게 맑고 깊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벌써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기특하다.”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형님의 존재 자체가 저에게는 챙김이요, 배움입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이 영역에 다다를 수 없었을 겁니다.”
“깨달음을 얻으면서 말솜씨도 늘었구나.”
“진심은 어떤 수식어보다도 화려한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연호정이 비로소 표정을 풀곤 연지평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연지평이 악악 죽는 소리를 냈다.
“방금 씻어서 말렸어요! 헝클어집니다!”
“이놈아, 넌 지나치게 반듯해. 좀 헝클어져도 된다.”
한참 동안 장난을 치던 연호정은 문득 연지평의 요대에 걸린 낡은 검집을 보았다.
“마치 십 년은 쓴 것 같구나.”
“아, 이거요?”
“다른 검으로 바꿔 줄까?”
“괜찮습니다.”
“정말이냐? 네 검, 여전히 반으로 부러진 상태 아니냐?”
연지평이 슬쩍 검을 뽑아 보았다.
연호정의 말마따나 그의 검은 반으로 뚝 분질러져 있었다. 그 반검(半劍)을 여태 메고 있었던 것이다.
연지평이 다시 납검하며 말했다.
“누군가의 눈에는 부러진 검으로 보이겠지만, 또 누군가의 눈에는 하루가 십 년 같았던 지옥을 함께 이겨 낸 동반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연지평은 지옥이라고 하였다.
비록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평생을 합친 수련보다 열 배는 더 힘든 수련이었다.
연호정은 동생을 인정했다. 동생의 무공이 아니라, 동생이 처음으로 느낀 절망의 벽을 깨부수고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을, 진정 무인다운 무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연호정이 말했다.
“아직 정확한 시일이 정해진 건 아니다. 광동에서 처리할 일도 남았고, 너희가 모르는 늙다리들도 한 번 더 만나야 해서 말이야.”
“……?”
“다만 그런 일들은 전부 근시일 내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강량은 눈치가 빨랐다.
“어디 가십니까?”
“그래.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렇군요.”
“다만, 의정군은 여기에 남는다. 힘의 공백이 생겨 버렸으니, 무림맹의 부대가 남아 삿된 조직이 커 나가는 걸 막아야 해. 의정군은 존재 자체만으로 흑도 세력의 개문을 막는 억제력을 가질 수 있다.”
연호정이 강량을 보며 말했다.
“아마 가는 도중 묵룡부에 들를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순간 강량의 눈빛이 돌변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분노를 드러낸다거나 살기를 뿜지는 않았다.
연지평이 검으로 마음을 다스렸다면, 강량은 인생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에게는 그러한 진득함이 있었다.
“이번에는 널 좀 이용하고 싶은데, 생각 있느냐?”
강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든지 이용하십시오. 저도 양천 낯짝이나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잊기 힘든 낯짝일 텐데?”
“그때 그자는 저를 보지 않았지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지평,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연지평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함께 간다고 할 줄 알았더니, 이건 또 의외다.
“자신만의 사고에 갇혀 날뛰는 동안, 저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했습니다. 제가 도울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진정한 무인이 된 동생에게는, 사소한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아는 대인(大人)의 씨앗까지 자라고 있었다.
착하고 선하지만, 자신의 줏대는 확실하게 지키고 있다.
그에 연호정은 새삼 확신했다. 훗날 연지평이 연가 역사상 손에 꼽히는 가주가 될 거라고.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다. 떠나기 전, 너희 둘의 검이 얼마나 벼려져 있는지 구경이나 하자.”
“예.”
“편히 쉬어라. 그리고 지평.”
“예, 형님.”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인자함으로 가득했던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정리는 이쯤 하면 됐고.’
모용우에게도 말했고, 묵비에게도 전했다.
이제 남은 것은 보타의 문제와 불산의 늙은이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끝나면, 그땐 바로 맹으로 갈 것이다.
‘시간이 없군. 일단 속 편하게 기절해 있는 사람부터 깨워야겠어.’
* * *
“…….”
수일 만에 눈을 뜬 화운의 얼굴은 상당히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쓰러지기 전과 달랐다. 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욕망으로 가득하지도 않았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오랜 시간 기절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왜 기절해 버렸는지도.
‘…….’
화운은 재차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의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일어나시오.”
순간 화운은 움찔했다. 방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의 눈에, 연호정과 정안이 보였다.
정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고님!”
“……정안.”
왜일까? 차마 정안의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화운의 귓가에, 다시 연호정의 목소리가 틀어박혔다.
“고개 숙일 자격 없소. 그런다고 동정이라도 받을 줄 알면 오산이외다.”
“……!”
“일이 제법 바쁘게 돌아가고 있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나중에 가지시고, 우선 따로 얘기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