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48)
448화. 흔들림 (3)
“후우.”
나직이 숨을 내뱉는 탐경의 얼굴은 고작 십수 일 만에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이번이 그를 힐끔거렸다.
“왜 한숨인가?”
“그냥 한숨이 나오는구려.”
“이 형님보다 먼저 가려고?”
“무슨 말이오?”
“한숨 자주 쉬면 수명 준다고 하지 않던가?”
“허허허.”
웃음을 터트리던 탐경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냥 생각이 많소이다.”
“어째, 경전의 내용이 잘 해석되지 않는가?”
“그거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새삼스러울 것 있겠소? 그저 죽을 때까지 탐구할 뿐이지.”
이번이 미소를 지었다.
“하면 그 아이 때문이로군.”
“아이?”
“연호정이란 아이 말일세.”
탐경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들고 있던 낡은 서적을 덮은 이번이 허리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만나고 난 연후에 자네는 참으로 많이 달라진 것 같네. 정확히는, 마치 과거 혈기 넘치는 자네로 돌아온 것 같아.”
“그렇게 보였소?”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우리 중에 자네처럼 열혈이었던 사람이 없지. 소림 역사상 가장 무서운 나한당주라 불리지 않았나? 일각에서는 명왕(明王)의 현신이란 소리도 했었지, 아마?”
“허허, 다 지나간 얘기를 뭣 하러 꺼내시오.”
“자네 힘내라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저 자네를 알라고 말하는 게지.”
“…….”
“세월의 삭풍은 강산만 바꾸는 게 아니야. 사람의 마음에도 그 삭풍이 스며들지. 젊었을 적에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뾰족했던 마음도, 나이가 들면 부들부들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
탐경이 이번을 바라보았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이번의 모습은, 비록 꾀죄죄하지만 도(道)를 깨달은 선인의 그것과 같았다.
그것은 그의 눈빛 때문이리라. 깊고 깊은 그의 눈빛은 마치 잡티 하나 없는 동경을 연상케 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의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자네는 과거와 달라졌어. 하지만 그 과거 또한 자네의 것이지. 안타깝게도, 자네는 과거의 자신과 완전히 유리되지 못했어.”
“그렇게 보이오?”
“그렇게 보이네.”
탐경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나도 아직 멀었구려.”
“과거의 자신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게 그리 실망할 일인가? 그렇다고 자네가 악업을 저질렀던 사람도 아닌데.”
“윤회의 비밀을 캐내어 부처의 도에 한층 가까워지기 위해 남은 생을 쏟아부었소. 그를 위해선 지난날 강호를 질타했던 나 자신을 잊고 도를 좇아야 마땅할 터인데.”
“…….”
“이젠 불처럼 화끈했던 주먹을 잊을 만도 한데, 아직도 이 마음에는 그 불씨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오.”
이번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하는 게야. 자네의 선택은 숭고했지만,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어야지.”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나도 이 일이 싫지 않소.”
“푸헐!”
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내 증손주와 범오가 와서 부탁한 일, 누구보다 먼저 나선 사람이 자네였지.”
“…….”
“그래, 관부와 얽힌 일이니 속세와 연을 끊은 우리라도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겠나? 하지만 자네는 달랐어. 자네가 움직인 동기는 관부가 무너질까 봐, 우리의 일에 차질이 생길까 싶어서가 아니야.”
탐경의 눈이 흔들렸다.
이번은 그 깊은 눈으로 탐경을 직시했다. 마치 그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자네의 가슴에는 아직 강호를 질타하고자 하는 생명력 넘치는 패기가 남아 있네.”
“……주책이로군.”
“헐헐, 나이가 많다고 꿈을 꾸지 말란 법은 없지. 아닌 말로, 이곳에 모인 우리도 꿈을 위해 모인 것 아닌가? 불사와 윤회의 상관관계, 그 미지의 틈새를 파고들어 진리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다면 더 빨리 세상을 평안케 할 수 있다는 꿈과 믿음.”
“…….”
“꿈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네. 다만, 어떤 꿈을 꾸느냐가 다를 뿐이지. 나는 자네가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네. 오히려 부러워. 그 나이에도 그만한 열정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번이 눈을 찡긋거렸다.
“꺾이지 않는 열정은 젊음의 상징이지. 육신과 무공은 늙었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젊다네.”
“…….”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멋대로 날뛰어 보게나.”
탐경이 떨리는 눈으로 이번을 바라보았다.
성격에 안 맞게 이곳에서 죽치고 있지 말고, 시원하게 세상으로 나아가라.
이번의 말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한 점의 서운함과 거짓도 찾아볼 수 없는 진심으로 꽉 차 있었다.
한참 동안 이번을 보던 탐경의 얼굴에 이내 푸근한 미소가 어렸다.
“멋진 시험이었소.”
“시험 아닌데?”
탐경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봤던 것은 호쾌하게 천하를 질주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아니오. 악을 짓누르고 세상을 평안케 했다는 보람이었소.”
“그런가.”
“그렇소. 다만, 이번에는 과거 흉내나 조금 내었을 뿐이오.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하오.”
“진심인가?”
“진심이오.”
탐경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진심이오. 어찌 진심이 아닐 수 있겠소? 앞으로도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겠지만, 그것은 집착이 아니라 추억이외다. 나는 방금 그걸 깨달았소.”
“허허허.”
“추억이 주는 환상에 짓눌려 날뛰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소이다. 적어도 그 정도 구분은 되는 나이라오.”
이번의 권유가 진심이었다면, 탐경의 말에도 진심이 가득했다.
탐경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내가 형님보다 젊긴 젊은 모양이외다. 가끔 손이 근질거리는 걸 보면 말이오.”
“푸헐! 분노의 명왕이라고 천하가 두려워했던 사람이 주책이 따로 없구먼.”
“주책 좀 부리면 어떻소? 어차피 여기엔 우리밖에 없는데.”
“허허허.”
열정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깨달음 역시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탐경은 세상에 나가 독특한 후배를 만났고, 속세가 주는 욕망 가득한 바람에 젖어 작은 번뇌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 그 번뇌를 불사르며 또 한 번 높은 경지에 올라설 수 있었다. 탐경에게 있어서는 무공의 상승보다도 더 가치 있는 깨달음, 바로 성인(聖人)의 깨달음이었다.
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해서, 아직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는가?”
“무엇을 말이오?”
“황룡 말일세.”
탐경의 눈이 빛났다.
“그 아이가 황룡결의 법문을 알려 줬다면서?”
“그렇소.”
“그 녀석도 참 웃기는 녀석이지. 제아무리 거래라지만 그런 걸 턱 하니 알려 주다니.”
“연호정 그 아이는 바보가 아니외다. 무공에는 구결과 법문이 따로 존재하는 법. 녀석은 내게 구결을 알려 주진 않았소.”
“그래도.”
“게다가 진정한 황룡을 깨우려면 사신무의 모든 진기를 대성함과 동시에 사신기(四神氣)의 구결도 전부 알아야 한다고 하더이다. 진정 사신을 모르는 이에게, 황룡의 법문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라 하였소.”
“흠, 그렇구먼.”
이번이 은근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자네 생각도 같나?”
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결이라도 안다면 모를까, 법문은 말 그대로 법문일 뿐이오. 은유와 직유, 뜻 모를 시적 표현으로 가득한 황룡의 법문은 석학이라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준이었소.”
“그렇다면 자네에게는 어떤가? 불사와 윤회의 경전, 그 깨달음으로 가득한 이것을 해석했던 자네에게는 말일세.”
이번이 손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황룡의 법문에서, 여기 이 내용을 해석할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을 찾았는가?”
놀랍게도, 야명주의 밝은 빛 아래에는 수많은 글자가 빽빽이 음각되어 적혀 있었다.
벽면도 거칠지 않았고, 글자 역시 선명했다. 그리고 그런 벽은 이곳 하나가 아니었다.
이곳 불산 동굴 곳곳에 수십 권의 경전을 풀어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소. 다만, 이 불산성문석벽(佛山聖文石壁)을 만든 사람이 사방무제라는 건 거의 확실한 듯싶소.”
“음.”
이번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순수한 학구열과 꿈을 향한 한 인간의 의지. 탐경의 가슴에 속세를 향한 열정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에게도 그 나름의 열정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이곳 성문석벽에 적힌 특유의 비유는 황룡법문과 상통하는 바가 있소. 사방무제가 황룡을 창안한 건지, 아니면 선대에게 배운 황룡을 완성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 사방무제가 혈교지란(血敎之亂)을 종식시키고 이곳에 왔다는 건 분명한 사실 같소.”
“그렇군.”
이번이 떨리는 눈으로 석벽을 바라보았다.
“확실하단 말이지? 이 석벽을 만든 사람이 사방무제라는 것이.”
“그렇소.”
“그렇다면…… 영생(永生)이란 곧 윤회이며 그렇기에 윤회의 틀에서 벗어나 하늘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을, 하늘에 이를 방법을 이 석벽에 남긴 자가 진정 사방무제란 말이지?”
탐경이 웃으며 말했다.
“더 알아보고, 더 해석해 봐야 하지 않겠소? 다만, 그에 앞서 손님 좀 받아야겠소.”
“손님? 아!”
석벽에 집중한 탓인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이번이 얼굴을 구겼다.
“이놈의 자식들, 아주 광고를 하라지. 이곳에 중원 불문의 최고 어른들이 모여 있다고.”
“하하하.”
두 사람이 동혈을 나섰다.
동혈 밖에는 연호정과 범오가 있었다.
범오는 곧장 반장례를 했고, 연호정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번이 버럭 소리쳤다.
“요놈들아! 여긴 너희가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이 아니야! 그러다가 남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범오는 무안한 듯 헛기침을 했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암살자 놈들도 이곳 정체를 알던데 뭘 새삼스럽게.”
“뭣이라?”
“숨기려면 좀 확실하게 숨기란 말이오.”
“저놈 저거, 황룡법문 알려 줬다고 아주 기세가 등등하구먼. 이놈아! 찾아올 거면 맛난 음식이라도 싸 올 것이지 빈손으로 왔냐!”
이번은 연신 툴툴거렸다. 감격의 순간에 벅차오르는 기쁨을 깨부순 어린 손님들이 아주 얄미웠다.
연호정은 대답 없이 탐경을 바라보았다.
탐경이 미소를 지었다.
“찾아가려 했더니만, 직접 찾아왔구먼.”
“일이 바빠져서 말이오.”
“그렇구먼.”
“해서, 원하던 것은 얻었소?”
“아직 모르겠더군. 사실 마음 같아서는 사신무를 통째로 알려 달라고 하고 싶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아시리라 믿소.”
“푸헐헐! 물론 아네. 그냥 하는 말이라네.”
탐경의 웃음소리는 몹시 청량했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왠지 탐경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느낀 것이다.
웃음을 멈춘 탐경이 깊은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기실, 황룡법문을 알려 준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네. 각자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서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장이 한 번 더 만나자고 했잖소.”
“그랬지. 그리고 다시 만나자고 한 것은, 황룡법문에 대해 풀리지 않은 게 있으면 물어보려고 했던 것일세.”
“한데?”
“한데, 필요가 없어졌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설마 황룡법문을 완전히 해석한 것이오?”
탐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구결도 모르고 사신기에 대해서도 문외한인데. 아마 오랜 시간 해석해야 할 것 같네.”
“그런데 왜?”
“자네가 해석한 황룡법문은 철저하게 무(武)에 닿아 있고, 내가 해석하는 황룡법문은 돈오(頓悟)가 중심인데 조언을 얻는다고 해결이 될 리가 있나.”
“그렇군.”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면, 이제 볼일이 없다고 할 수 있겠군.”
“그건 또 그렇지 않네.”
“왜 그렇소?”
“자네에게 줄 것이 생겼기 때문이야.”
“줄 것?”
“그래, 줄 게 있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탐경이 별안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협(俠)의 가치를 버려선 안 되네.”
“……?”
“선인(善人)에게 해를 입혀서도 안 되고, 타인을 긍휼히 여겨야만 해. 성격을 바꿀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네의 도끼가 향하는 곳에 정의로운 피가 흘러서는 안 될 것이네.”
“갑자기 무슨 말이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든, 내 주먹은 언제나 정의를 등에 업고 악을 향해 겨누어졌다네.”
“……?”
“자네의 도끼에 얹힌 나의 힘이, 선한 자들의 피로 젖지 않기를 바라네.”
“……?!”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