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5)
45화. 규율의 허점 (5)
“고작 열흘 만에 이렇게 수척해졌어? 밥 안 먹나?”
“…….”
“얼씨구, 이제 볼 장 다 봤다 이건가? 대답도 없어?”
“…….”
“하긴 할 말이 없겠지.”
철창 안에 갇힌 강윤의 몰골은 상당히 초라했다.
죄수복을 입고, 양팔에는 쇠사슬로 연결된 수갑을 찼다. 산발한 머리카락은 생기가 없어 보였다.
물끄러미 강윤을 보던 연호정이 법인각주에게 말했다.
“여기 문 좀 열어 주십시오.”
법인각주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놈 잡아넣으라고 한 게 전데, 설마 풀어 주겠습니까? 아!”
연호정이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냈다.
“가주님께는 미리 허락을 받았습니다. 받으십시오.”
서신을 받은 법인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에 적힌 글씨와 인장(印章)은 분명 가주님의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죄수가 난동을 부릴지 모르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저런 놈 열 명이 더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덜컹.
철창이 열리자 연호정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버젓이 철창이 열렸는데도 강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연호정은 거침없이 강윤 옆에 앉았다.
강윤의 몸이 움찔했다. 연호정이 너무 가까이 앉았기 때문이다.
“내공이 봉쇄됐군. 안 춥냐?”
“…….”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지? 밥은 잘 나오냐?”
“……왜 오셨습니까?”
“내가 네 허락 받고 와야 하냐?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할 말 없게 만드는 언변이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연호정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유지하, 그 녀석도 징계를 받았다.”
“…….”
“네놈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을 했든, 대주는 대주였어. 참작의 여지는 있지만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 해서 육 개월 감봉에 석 달 동안 부대 정리 사항 전반을 홀로 담당하기로 했다.”
부대 정리를 홀로 한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온종일 시간을 투자해도 마무리가 될까 싶을 정도로 험한 일이었다.
“근데 그놈, 아득바득 정리를 끝내곤 개인 수련까지 끝내 놓고 자더구먼? 하루 두 시진도 채 못 자는 것 같은데 말이다.”
“…….”
“그 노력이 얼마나 지속될진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행복해하는 것 같더군. 강골은 강골이야. 그만큼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컸던 거지.”
강윤이 물었다.
“제게 그 말을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알라고.”
“…….”
“나는 본가의 법을 다 알지 못해. 하지만 같은 죄라도 동기와 목적에 따라 형량이 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안다. 네가 유지하보다 심한 형을 받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지.”
강윤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에 가려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법에 엄정함은 필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많으면 문제가 생기지.”
“그래서 제 형량을 낮춰 주신 겁니까?”
“그럴 리가? 그건 그냥 내 기분이었어. 넌 하극상을 저질렀지만, 지나고 보니 화도 별로 안 나더군. 내공을 전폐하는 것까지는 심한 처사라고 생각했지.”
“…….”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넌 운이 좋았다는 거야.”
강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게다가 넌 병신에 머저리기는 해도, 최소한 벽산연가의 비응대라는 조직에 자부심을 가진 것 같았거든.”
“……!”
“네놈이 날 혐오했던 것도 연가의 대공자가 놈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강윤의 눈이 흔들렸다.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삐뚤어지긴 했다만, 그래도 본가에 대한 애정은 있더군.”
“그걸 대공자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똥인지 진흙인지 굳이 만져 봐야 아나?”
비유가 좀 더러운 거 아닌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정 본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강윤이 고개를 들었다.
“저 외에, 이번 사태에 얽힌 다른 이들도 형을 줄여 주셨습니까?”
조직별로 죄를 지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대해 주었냐는 뜻이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두 놈 빼고 다 죽였다.”
“……!!”
“놈들의 죄는 명확해. 술에 취했든 뭐든, 부당하게 사람을 죽인 것 자체가 죽을죄지. 심지어 그걸 아무도 모르게 묻어 버리기까지 했어. 참작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강윤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 역시 더 엇나갔다면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다. 새삼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부르르 떠는 강윤을 내려다보며,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어쩌면, 조만간 본가에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강윤이 깜짝 놀라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강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호정에게서 무자비한 살기가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땐 너도 힘을 보태라. 본가를 향한 너의 애정이 진실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봐.”
“…….”
“내공이 봉인되어도 수련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시간을 낭비하지 마. 적어도 한때나마 네 부하였던 녀석보다는 나아야지.”
* * *
“형님.”
“어? 기다리고 있었냐?”
연지평이 멋쩍은 듯 웃었다.
“오늘 아버지께 간다고 하셨잖아요?”
“억?! 그랬나?”
“세상에, 그걸 까먹고 계셨단 말이에요?”
“요새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
“정말 무신경하다니까요.”
“이놈이.”
연호정이 연지평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연지평이 악악 소리를 질렀다.
“자, 혼꾸멍나러 가 보자.”
나흘이 지났다.
연호정의 일과는 더 지독해졌다. 넉 달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의 한계를 몇 차례나 뛰어넘었던 그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수면 시간을 한 시진 더 줄였고, 식사량을 배로 늘렸다. 당연히 수련의 강도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전생의 무공과 깨달음이 있다 한들, 독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 연호정은 지난 반년 동안 누구보다도 독하게 수련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났다.
아쉽게도 백호(白虎)를 불러내진 못했지만, 벽라진결의 성취가 육 성(六成)까지 치달았다. 벽라진결에 입문한 시간을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연성 속도였다.
이제는 어엿한 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몸이었다. 근육을 억지로 혹사할 필요 없이, 충분히 탄탄한 무공을 구사할 만큼 성장한 것이다.
연호정이 벽라진결의 육 성을 깨달은 그 날 정오.
드디어 가득상이 찾아왔다.
“도둑 양반! 밥은 잘 차려 놨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쌀 한 톨이라도 남기면 국물도 없을 줄 아시오.”
* * *
“일은 어찌 되고 있나?”
“거의 다 끝나 가고 있습니다. 인부들도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지요.”
“기간은?”
“통로에 열풍(熱風)이 부는 것을 보니, 넉넉하게 닷새면 될 듯합니다.”
“좋군.”
화사한 의복을 입은 초로인이 전도(剪刀)로 꽃가지를 쳤다.
“일을 다 마치면 인부들도 묻어 버리시게.”
“알겠습니다.”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라 말하는 초로인이나, 그의 명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의 사내나 섬뜩하긴 매한가지였다.
초로인의 얼굴에 옅은 흥분이 배어 나왔다.
“드디어 얻을 수 있겠군. 선조들께서 안배해 주신 기연을. 참으로 오래 걸렸지 않은가?”
“햇수로 십이 년입니다.”
“그 확정된 기연을 얻는다면, 내 다음 대에선 소림도 누를 수 있을 걸세.”
“다음 대라니요? 선조들께서 남기신 말이 사실이라면, 몇 년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허허, 그리되면 얼마나 좋겠나.”
초로인이 허리를 폈다.
“그나저나, 모용에서는 따로 연락이 왔는가?”
“예. 아직이랍니다. 모용 측에서도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니랍니다.”
초로인이 혀를 찼다.
“몹시 답답한 놈들이로다. 대체 무엇이 그리 걸린다고 여태 답을 미뤄 놓는지.”
“불안하기도 하겠지요. 벽산연가는 역사가 짧은 만큼 기반도 약합니다. 혹 모용세가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염려가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지. 천금을 쥐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들. 백정 손에 천하의 보검이 들려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초로인, 명천(明泉)이 고개를 저었다.
“모용에게 연락하시게. 이번에도 연가가 거부하면, 그냥 포기하라고.”
“정녕 그러시겠습니까?”
“어쩌겠나? 말 안 듣는 어린애에게는 매를 들 수밖에. 명맥이나마 유지하도록 두고 싶었거늘, 자꾸 이리 삐딱하게 나오면 우리로서도 별수 없잖나.”
중년 사내의 얼굴에 옅은 불안감이 묻어 나왔다.
“정말로 연가를 묻어 버릴 생각이시라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지. 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 주제에 제법 인망은 있지 않은가.”
“당대 연가주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다고 합니다. 판관검의 검법은 파도마저 가른다고 하지요. 차후 십 년 뒤에는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명천의 눈빛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성천십삼좌.
당대 무림을 대표하는 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유구한 무림사의 최고 전성기는 삼백 년 전 혈교지란(血敎之亂) 때였다고.
삼백 년 전 무림은 천하제일을 넘볼 수 있는 무적의 고수들이 무더기로 뛰쳐나온 시기였다. 어떤 시대에 태어나도 의심의 여지 없이 천하제일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무려 열 명이나 존재했던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당대 무림에도 한없이 절대(絶代)에 가까운 고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인들은 그 고수들을 일컬어 성천십삼좌라 하였다.
십 인의 신선제왕(神仙帝王), 삼 인의 삼군(三君)을 칭하는 빛나는 그 이름.
아쉽게도 정작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구주명가에는 아직 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고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명가의 핏줄은 다들 수명이 짧았다.
딱히 병에 걸린 것도 아니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든 게 아닌데도 그러했다. 사람들은 명가의 수명이 짧은 것을 가문의 저주라 하였다.
‘그건 저주 따위가 아니다. 무공 때문이야.’
명가의 무공은 완전하지 않다.
천하일절을 논할 만하지만, 그만한 위력을 내기 위해선 생명력을 깎아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명가는 새외의 무공까지도 들여와 문제점을 고치려 들었다.
당연히 문제는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무공은 강해졌지만, 수명은 여전히 짧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본가 무공의 원류를 되찾기만 한다면……!’
삼백 년 전, 각자가 무적을 자랑했던 초인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단 한 명의 절대무적자가 등장했다.
사방무제(四方武帝).
달리 황룡제(黃龍帝)라고도 불린 그 고수는 천하제일을 넘어, 능히 고금제일이라 불릴 만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이미 지나 버린 시대이니만큼, 사방무제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키 어렵다. 그러나 호사가들은 사방무제의 이름을 달마나 천마(天魔)보다도 윗줄에 놓길 주저하지 않았다.
명천은 알고 있었다. 호사가들의 말이 단순한 허언이 아님을.
이유인즉, 사방무제와 함께 혈교를 몰아냈던 것이 바로 명가의 조사(祖師)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사들에게 약간의 무공을 전수한 사람이 사방무제였다.
그 얼마 안 되는 무공만으로도 구주명가는 이렇게 커졌다. 명천은 사방무제야말로 무림사 최강의 무인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십삼 년 전, 초대 조사께서 남기신 유언을 발견했다.
“시험해 봐도 괜찮지 않겠는가?”
“예?”
명천의 얼굴에 음험한 살기가 일었다.
“우리의 무공을 되찾은 후, 그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연가를 상대로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지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