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55)
455화. 진실을 찾는 여정 (5)
제법 시끌벅적했던 인화루가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계단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흑철검문.
멸문하기 전까지, 흑도 무림 최고의 검문이라고 칭송받아 왔던 몇 안 되는 진짜 문파가 바로 흑철검문이었다.
그들의 명성은 백도 무림의 구대문파에 비견되었다. 게다가 흑철검문의 검사들 역시 성정이 호탕하고 단호한 면이 있어, 흑도인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았더랬다.
그런 흑철검문의 소문주가 인화루에 나타난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런 강량에게 반란 문파의 후예라고 말하는 전홍이었다.
당대 흑도 연맹의 주인이자 성천십삼좌의 일인인 양천의 제자 전홍.
멸문해 버린 흑도 최고의 명문 출신의 후기지수 강량.
후욱!
살벌한 공기가 위압감으로 변해 주루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연호정은 혀를 찼다.
‘그냥은 안 넘어가겠군.’
이곳으로 오기 전, 강량은 말했다. 인화루에 들른 적은 서너 번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굳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애초에 수행을 위해 십 대 대부분을 폐관과 검술 수련으로 보낸 강량이었다. 정보력이 발달한 흑도 무림에서도 강량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양천과 만날 생각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얽히든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양천이 제자를 어떻게 보는가는 신경을 써야 할 텐데.’
연호정의 눈이 다시 한번 전홍의 눈빛과 기질을 훑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의 양천이라면 썩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인재는 아니겠어.’
양천은 동료가 아니다. 분명 적이지만, 그렇다고 숙적이나 악적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도 아니다.
하지만 연호정은 양천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양천 역시 연호정을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가르침은 줬지만 정을 주진 않았던 건가.’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멸사군이 첫 실전을 겪을 때 그곳에 ‘한때나마’ 양천의 제자였던 광인(狂人)이 있었다.
모두가 그를 두고 양천의 제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광인은 부선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만에 하나 그가 대제자였다면 양천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터.
‘제자를 수도 없이 받았지만, 망가져 버린 놈들은 제자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건가?’
적자생존의 흑도 무림 최고 수장다운 처사라고 해야 할까.
‘뭐가 되었든, 좋게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때, 전홍이 말했다.
“이봐, 루주.”
“예, 예?!”
“저놈 눈깔이 제법 살벌한데? 그냥 넘어가긴 힘들겠어. 부서진 자잿값은 묵룡부 측에서 배상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인화루주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전홍은 더는 인화루주를 보지도, 그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전홍이 강량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사부님께 선물이라도 하나 사 들고 가야 하나 싶었는데 잘 걸렸다. 어떠냐? 얌전히 따라오면 당장 모가지 날아갈 일은 없을 거다.”
강량이 차갑게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양천의 제자씩이나 되는 분인데 고이 보내 드릴 순 없지. 혹시 왼손으로 젓가락질할 수 있냐? 오른팔을 예쁘게 잘라 줄까 하는데.”
조소로 가득하던 전홍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량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일대에 묘한 침묵이 어렸다.
전홍이 말했다.
“루주.”
“……예?”
“다 내보내고 문 잠가라.”
인화루주는 주춤했다.
전홍의 뜻은 명확했다. 이곳에서 강량을 초주검으로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량아.”
강량은 전홍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계단 몇 개랑 벽 하나 정도는 지금 내 수중의 돈으로 충분하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강량도 연호정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형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좀 든든하지.”
“떨거지들 좀 부탁드립니다.”
연호정이 강량의 등을 툭 쳤다.
“가라.”
그 순간.
쾅!
빛살처럼 날아간 강량이 전홍의 멱살을 쥐었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전홍 역시 강량이 이리 빠를 줄은 몰랐던 듯, 눈이 살짝 커졌다.
강량의 발이 불을 뿜었다.
콰드드득!
한순간에 계단 대여섯 개가 망가졌다. 강량의 폭발적인 질주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홍의 멱살을 쥐고 사 층으로 올라간 강량은 달려 나간 기세 그대로 창가 벽을 향해 전홍을 밀어붙였다.
콰아앙!
사 층 창가 벽이 박살 나며 두 사람이 인화루 밖으로 날아갔다.
창졸지간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가 놀라서 사 층을 올려다보았다.
“삼공자님!”
“이런!”
서른 명의 무사들이 재빨리 계단 밑으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스르릉.
어느새 삼 층으로 내려간 연호정이 흑룡부를 꺼내 든 채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그들은 연호정이 언제, 어떻게 저기까지 이동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장사하는 곳이다. 피바다 만들기 싫으니 밖으로 나가지.”
선두에 선 무사, 양일이 욕설을 뱉었다.
“이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연호정이 담담한 눈으로 양일을 보았다.
재차 욕을 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려던 양일은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털썩!
양일은 저도 모르게 계단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조, 조장님?!”
“괜찮으십니까?”
양일은 걱정해 주는 부하들에게 대답 한마디 하지 못했다.
부르르르.
그는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의 눈빛은 여전히 맑고 깊었다. 하지만 양일은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상상 초월의 살기를 보았다.
자신들로는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든 무지막지한 괴물이 거기에 있었다.
“그냥 여기서 다 죽을까?”
“……!!”
“밖에서 싸우면 몇 달 골병 앓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여기서 싸우면 전부 토막 나서 죽는다.”
기파를 드러내지도, 하다못해 살기를 뿜지도 않고 평온한 어조로 말한다.
그래서 더더욱 무서운 말이었다. 그 정도 일쯤은 손쉽게 벌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양일의 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들었다.
‘고수다! 그것도 엄청난!’
그 순간, 다른 부하들이 외쳤다.
“저 미친놈이 어디서 개소리를!”
“죽여!”
그때였다.
퍼버버버벅!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계단 천장을 거꾸로 타 넘으며 내려온 한 여인이 있었다.
정안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다만, 뽑히지 않고 고풍스러운 문양의 검집째였다.
스르륵.
정안이 연호정 옆에 서자마자 연호정에게 달려들려던 무사 다섯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모조리 기절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정안을 힐끔 보았다.
“솜씨 좋은데?”
“칭찬 고마워요.”
“힘 조절이 제법이야. 광동에서 붙었을 때는 엄청 혼란스러워하더니.”
“이번엔 어중간하게 제압하지 않으려 해서요.”
연호정이 피식 웃고는 다시 양일을 보았다.
어느새 양일은 한 손을 올리고 있었다. 부하들의 행동을 막은 것이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따라들 나와. 아, 그리고 주인장.”
품에서 금낭을 꺼낸 연호정이 그것을 인화루주에게 건넸다.
인화루주가 얼떨떨한 얼굴로 금낭을 받았다.
“남으면 남았지, 모자라지는 않을 거요. 그걸로 부서진 계단과 벽을 수리하시오.”
“아…… 가, 감사합니다.”
인화루주는 저도 모르게 그리 답하고야 말았다.
잠시 루주를 보던 연호정이 한마디를 보탰다.
“그리고 주인장.”
“예?”
“위해를 당할까 무서웠던 건 알겠지만, 경영 방침을 조금 바꾸는 게 어떨까 싶소이다. 계속 그런 식으로 했다간 손님들 발길이 뚝 끊길 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인화루지 묵룡루가 아니잖소?”
인화루주의 눈이 흔들렸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즉에 물려준다고 하셨음에도 마음을 바꿔 오 년을 더 버티다가 고향에 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고개를 숙이는 것도 습관이다. 목숨? 중요하지. 하지만 장사치도 사람이다. 위해를 당할까 무서워 자꾸만 무릎을 유연히 하면 언젠가 패가망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패가망신하기 전에, 한 인간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될 테지.’
‘버틸 수 없다면 장사를 접어라. 버틸 수 있다면, 상식을 벗어나는 부탁까지는 들어주지 말아라. 네 오판으로 목숨을 잃게 될 상황이 온다면, 바로 그때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건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명심해라. 장사치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안목과 결단력이다.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되, 너 자신의 인격과 양심을 무너트리진 말아라.’
인화루주는 멍하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정안에게 말했다.
“가자.”
“네.”
두 사람이 이 층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이놈!”
파아악!
무사 중 하나가 허공을 날며 연호정의 정수리를 향해 비수를 휘둘렀다.
꽤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연호정과 정안의 실력을 보았음에도 기습을 감행했으니, 적어도 그 대범한 성질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물론,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퍽!
살벌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회전한 무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무사의 얼굴은 끔찍하게 함몰되어 있었다. 흑룡부의 손잡이에 찍혀 광대부터 두개골까지 부서진 것이다.
주르르륵.
붉은 핏물이 객잔 바닥을 적셨다.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양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일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내, 내가 시킨 게 아니오!”
“닦아.”
“……예?”
“피 닦고, 시체 들고 밖으로 나와. 주인장에게 시킬 순 없잖냐?”
“……?!”
“빨리 안 움직여? 전원 똑같이 만들어 줄까? 하긴, 너희가 봐도 제법 잘생겨지긴 했지?”
벌떡 일어난 양일이 부하들을 시켜 시체를 들게 하고 황급히 피를 닦아 냈다.
그들은 이번 한 수로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들을 ‘따위’로 취급해도 이상할 게 없는 무시무시한 고수들이라는 것을.
약자 앞에서는 강하고, 강자 앞에서는 약하다.
세상이 약육강식의 원리로 돌아간다지만, 이들이 보여 주는 행태는 참으로 헛웃음이 나올 만한 것이었다. 양천의 제자 휘하에서 활동한다면, 남들 앞에서 이런 꼴을 보여 줘선 안 되었다.
‘묵룡부 출신이 아니군.’
묵룡부 소속 무사라면 저런 꼴을 보일 리가 없다. 아마도 전홍이 타지에서 받은 수하들인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이거, 잘하면 양 부주한테 선물을 주는 그림이 될지도 모르겠어.”
강량은 전홍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으니까.
결국 양천 좋을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로 제자의 모자람을 확실히 알고 쳐 내도 좋을 것이요, 전홍 스스로가 바뀐다면 확실하게 계도(啓導)하는 셈이 될 테니까.
연호정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빨리 닦아, 이것들아!”
“옙!”
* * *
“으음?”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편찮으신지요?”
“아닐세. 갑자기 귀가 좀 간지러워서 말이야.”
“아, 예.”
거칠게 귀를 후비던 양천이 찝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라도 오려나? 기분이 영 착잡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