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458)
458화. 진실을 찾는 여정 (8)
“…….”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대전에 있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근래 주군은 상당히 유해지셨다. 예전에는 잘 봐주지도 않던 부하들의 무공을 일일이 교정해 줄 정도로 여유가 넘치기도 했다.
십이지신에게 있어 양천의 그러한 변화는 더 깊은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백서를 비롯한 몇몇은 더 수준 높은 무공을 전수받으며 주군을 스승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런 그들도, 지금은 감히 양천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흐음.”
침묵은 길었으나, 양천의 표정은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그놈, 그래도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군.”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대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전홍의 상태는 상당히 참혹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전홍의 상태가 보이는 것처럼 심각하진 않다는 걸. 무시할 수 없는 내외상을 입었지만,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문제는 팔이었다.
권법가든 검법가든, 팔 하나가 날아갔다는 건 전투력이 절반 이상 떨어졌다는 걸 뜻한다. 하물며 전홍은 아직 서른도 안 된 창창한 청년이었다.
끼익.
태사의에서 일어난 양천이 전홍의 옆으로 걸어와 바닥에 앉았다.
털썩.
양천이 앉자 좌우로 정렬해 있던 십이지신과 전투 부대 대장들이 일제히 오체투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천은 전홍의 몸에 칭칭 감긴 붕대를 풀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상반신을 휘감고 있던 붕대가 모조리 풀렸다.
그러자 끔찍한 상처들이 드러났다. 딱지가 앉은 검상이 수십 개나 그려져 있는데, 어떤 것은 깊었고 어떤 것은 거의 다 나아서 붉은 흔적만 남아 있기도 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요놈 봐라?”
손가락으로 전홍의 근육을 꾹꾹 눌러 보던 양천이 피식 웃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한 모양이야. 이 정도 근육을 만드는 건 정말 어렵지. 탄력, 강도, 유연함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천하의 투왕이 하는 말이다. 하물며 마뜩잖아하던 제자에게 하는 말이라면 가히 극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수련 기간이 충분하진 않았어.”
양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참으로 못난 놈이 아닌가.”
대전의 분위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
“부족한 무공은 노력과 경험으로 쌓을 수 있다. 그 또한 천운이 따라야 하지만, 이 양천의 제자라면 부족한 힘을 메워 주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정신머리는 다르지.”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 의식을 잃은 전홍을 내려다보는 양천의 얼굴은 무척이나 싸늘했다.
“경지에 이르면 무공의 수준보다도 정신력이 우선일 때가 많은 법. 저 허여멀건 백도 떨거지들이 어찌하여 정신론과 수행을 중요시하는지 수십 번을 말해 줬는데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
구대문파는 천하일절의 무공을 다수 보유했다. 만약 그 무공들을 휘하 제자들 모두에게 가르쳤다면, 그들의 전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구대문파는, 나아가 대다수의 백도 문파들은 제자라 한들 처음부터 좋은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유는 명백하다. 정신과 마음이 무공을 받쳐 주지 못하면 제아무리 수준 높은 무학이라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힘이 세고 싸움을 잘하는 무인은 많다. 그러나 자신이 익힌 무공에 휩쓸리지 않을 정심(貞心)까지 지닌 자는 결코 많지 않다.
물론 양천이 생각하는 정심과 백도 무림이 생각하는 정심은 달랐다.
중요한 것은, 무공과 정신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걸 그가 뼈저리게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큰 힘을 얻으면 얼마간 방탕해질 수야 있겠지. 그 방탕함을 이겨 내고 하늘을 보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비로소 빛을 담을 수 있는 법.”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 농사가 자식 농사 못지않다더니, 참으로 내 마음 같지가 않군.”
그나마 양천에게 있어서 다행인 것은, 그가 주는 정(情)은 제자라고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자로 받는다고 해서 양천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제자로 살아가며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양천의 관심과 정은 달라진다.
바로 지금의 부선처럼.
“치우게. 정신이 들면 다시 내 앞으로 끌고 와.”
“명을 받듭니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전홍을 밖으로 끌어내자 양천이 말했다.
“저 녀석을 데리고 온 놈들이 있다고?”
백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원 확인은 해 보았나?”
“달리 알아볼 것도 없었습니다. 삼공자가 수련지 인근에서 수하로 삼은 무사들이었습니다.”
“수하?”
양천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제 무공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놈이 거기서 대장 노릇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지?”
전홍의 수준도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나이와 무공 입문 시기를 생각하면, 그저 대단하다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양천이기에, 강호 무림 최강자로 손꼽히는 그가 하는 말이기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놈들은 어떻게 했나?”
“삼공자의 사람이라…… 일단 객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쫓아내라 하게.”
“알겠습니다.”
양천의 분노를 생각하면 모조리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음황독을 해독하기 전이었다면, 아마 그들 모두가 처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백서만 남고, 자네들도 이만 나가게.”
“명을 받듭니다.”
잠시 후, 대전에는 양천과 백서만 남았다.
양천이 물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파악했나?”
“그렇습니다.”
“누구인가?”
“그것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그 무리에 연호정이 있었습니다.”
순간 양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호정 그놈이 호남으로 왔다고?”
“그렇습니다.”
“놈이 호남에 진입했다면 진즉 알았을 텐데, 왜 그간 보고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부의 정보단도 연호정의 종적을 놓쳤습니다. 정보력의 팔 할 이상을 북쪽으로 돌린 통에 섬세한 정보 운용이 불가했던 모양입니다.”
“하면 나머지 이 할은 놀고 있었다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연호정이야. 그놈을 몰라보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래도 은밀히 온 모양입니다.”
양천은 웃기지도 않는다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연호정 정도의 무공과 안목이면 주변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상황부터 듣지.”
“예.”
백서는 마치 그 상황을 직접 본 것처럼 거의 정확하게 얘기했다.
묵룡부의 정보력이 새외와 무림맹으로 쏠려 있었기에 예전만은 못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파악하는 데에는 여전히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상황을 들은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흑철검문의 소문주라.”
“…….”
“그러고 보니 일전, 연호정 그놈이 내 몸을 치료하러 왔을 때 수행원처럼 데리고 온 녀석이 있었더랬지. 젊은 놈치고는 기세가 제법이어서 잠깐 보기는 했는데 말이야.”
“부주님께서 신경을 쓰지 않으시기에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그 청년이 바로 흑철검문의 후계자 강량이었습니다.”
“그랬구먼.”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놀랍구먼. 셋째가 제아무리 어중간해도 괴암무를 연성했어. 근육의 질이나 잔존하는 기를 보면 무종을 코앞에 두었거늘, 흑철검문 후계자의 무공이 예상 이상이었던가.”
“싸움터의 흔적을 보면 박빙의 승부를 이룬 듯합니다. 그럼에도 강량은 별 피해가 없었다는 걸 보면, 승부가 일순간에 갈린 듯합니다.”
양천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바로 역량이란 것이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연성하고 있어도 방심하면 일수에 목이 달아날 수 있거늘. 하물며 주루에서 했던 대화가 사실이라면, 애초에 셋째는 그놈을 깔보고 있었던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못난 놈. 세 살배기 어린애에게도 당할 수 있는 곳이 강호이거늘, 제 놈과 차이도 없는 상대를 깔봤으니 목숨이 날아가지 않은 게 용하군.”
“아마 그쪽은 손속에 사정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양천이 턱을 괴며 물었다.
“강량이라고 했나? 그놈이야 그렇다 쳐도, 연호정이 이 사태를 그냥 넘어가려 했을 리가 없지. 따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던가?”
“그렇지 않아도 저희 정보단 측으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하던가?”
백서는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보단에서 직접 작성한 서신이었다.
백서에게 서신을 받아서 펼친 양천은,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이놈의 이 싸가지 없는 말투를 보니 확실히 실감이 나는구먼.”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면? 제 놈이 여기 오기 싫다는데, 내가 가야지 어쩌겠는가?”
“감히 종사를 오라 가라 하다니요. 이 부탁에는 응하지 않는 것이…….”
“달리 할 말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나도 녀석에게 따질 것이 있잖은가? 할 얘기는 있는데 놈은 오고 싶지 않다고 하니, 내가 가는 수밖에.”
백서는 더는 양천을 말리지 않았다.
“언제 출발하시겠습니까?”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라도 타는 놈이면 며칠 질펀하게 놀다가 가겠지만, 그놈 신경이 아주 굵지 않은가.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출발함세.”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러게나.”
뒷짐을 진 양천이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 연호정이라.”
일순 그의 눈이 차가워졌다.
“알고 있나?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네를 좋아한다네. 하지만 말이야, 이번 만남에서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간 아무리 자네라도 무사치 못해.”
* * *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연호정의 말에 인화루주 송답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장사치이자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불학무식한 장사치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깨우침을 내려 주셨으니, 저 역시 선생께 할 수 있는 만큼의 보답은 해 드려야지요.”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호의는 참으로 감사하오만, 그렇다고 여기 사 층을 통째로 내어 주면 루주 장사는 어떻게 하오?”
“선생께서 깨우쳐 주지 않으셨다면 조만간 패가망신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잃었을 자산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허허.”
“다만, 이런 약소한 것으로 보답할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이 민망할 따름이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똑같은 빚을 져도 무사는 칼로 갚고 장사치는 돈으로 갚는다 하였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과한 보답은 잘 받아 두겠소.”
“영광입니다, 선생.”
송답의 호의에 일행은 최상층을 통째로 빌려 술과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송답이 물었다.
“혹,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그런 건 없지만, 루주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선생.”
연호정이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며칠 안으로 묵룡부주가 날 만나러 올 거요.”
“……예?”
“그가 온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래도 흑도 무림의 거물이 오는데 루주는 미리 알아야겠다 싶어서 말이오.”
“…….”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양천이라고 특별 대우 해 줄 필요는 없소. 그냥 그렇게 알고만…… 루주?”
가만히 송답을 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봐! 점소이! 여기 주인장 좀 모셔 가게! 기절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