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0)
50화. 바람이 불어오다 (5)
총관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태경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엿보였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두둑!
연호정이 찻잔을 으스러트렸다. 맨손으로 찻잔을 부쉈는데도 그의 손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 위협적인 행동에 태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처음에는 다소 의아했지 뭔가.”
연호정이 손을 폈다.
후두두둑.
부서진 찻잔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통상의 경우, 타 조직에 세작(細作)을 심을 때는 세 가지 법칙을 따른다. 첫째, 눈에 띄지 않는 장소. 둘째, 눈에 띄지 않는 직책. 셋째, 눈에 띄지 않는 성격.”
태경의 눈이 흔들렸다.
눈앞에 벼락이 떨어져도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단련한 사람이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대놓고 자신을 세작이라 말하는 대공자. 그 대공자의 안광은 벼락처럼 강렬했고 용암처럼 뜨거웠다.
살기인지 위엄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찻잔이 깨진 순간, 태경의 평정심도 깨졌다. 그리고 연호정의 살기는 깨진 마음의 틈을 시기적절하게 파고들었다.
“일류 세작은 철저하게 그 법칙을 따른다.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 이가 세작이라 의심하지 않아. 강호의 무수히 많은 조직이 그런 세작들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
“……!!”
“하지만 특급은 달라.”
연호정이 엄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특급으로 분류되는 세작은 다른 세작과 철저하게 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눈에 띄는 성격으로, 눈에 띄는 직책을 거머쥐며, 눈에 띄는 장소에 서성이지.”
“……!!”
“일이 터졌을 때 누구라도 의심할 만한 사람, 그러나 의심을 피할 방법도 많은 사람. 그들은 한 번 의심의 화살을 피하면 절대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태경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한데 너는 독특하군. 일류는 아니고, 그렇다고 특급이라 분류하기도 애매해. 눈에 띄는 성격은 아닌데, 눈에 띄는 직책으로 조직의 중지(重地)에서 일하고 있지.”
“대, 대공자님! 설마 저를 세작으로 오해하고 계신 거라면…….”
“오해? 확신이야.”
“……!”
“처음에는 나도 당황했지 뭔가. 아무리 봐도 이놈이 명가(明家) 쪽은 아닌데, 그럼 어딜까? 명가를 제외하고 본가를 잡아먹으려는 놈들이 또 있었나?”
태경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명가? 명가는 또 뭐지? 명가도 이곳을 노리고 있었나?!’
위기일발의 순간에도 새로운 정보를 쌓아 둔다. 도주가 성공할 때, 아군 측에 전달할 내용을 본능적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모용가주가 안 알려 주던가? 명가와 손을 잡았다고?”
“……?!”
“솜씨가 제법 고명하군. 보아하니 나름대로 애지중지 키운 세작 같은데. 걸려도 꼬리 자르기 쉽고 모른 척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거지?”
“……!!”
“모용세가…… 참 재미있어. 뒤통수에 뒤통수를 노린다? 결국 본가는 아귀들의 각축장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민심만 살피고 있었던 것이로군.”
이제야 연호정은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모용세가와 명가, 둘 다 연가를 노렸다.
따로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연가는 하나의 조직이 집어삼킬 만한 가문이 아니었다. 적이 많은 칠대세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명가와 모용가가 손을 잡은 것이다. 연가를 무너트리고 강소성을 반으로 찢을 생각을 한 것이다.
과거의 연위는 끝까지 사업 제안을 반대했다.
그래서 명가가 나선 것이다. 회유되지 않을 가문이라면 힘으로 쓸어 버린 후 차지하겠다는, 가장 야만적이면서도 효과 좋은 선택을 내린 것이다.
놀라운 건 모용세가의 선택이었다.
명가가 쥐도 새도 모르게 멸망해 버린 것은 모용세가의 솜씨일 확률이 높았다.
얼마 되지 않은 역사로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는 영광을 차지한 가문.
물론 모용가의 힘만으로는 묻어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모용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건 확실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용세가가 천하제일가로 불리진 않았을 테니까.
결국은 모두가 모용세가에게 당한 것이다.
“세상이 다 그렇지. 흑도니, 백도니 색깔을 나누어 평가해도 결국 똑같아. 착한 놈은 당하고, 나쁜 놈은 배를 불리지.”
“…….”
“그런 걸 보면 모용가주가 정말 대단하지 않나? 너도 착한 놈 같지는 않은데, 그런 놈에게 무슨 믿음을 줬길래 이리 목숨을 걸꼬?”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왜? 훗날 천하를 차지하면 곁에서 세상을 굽어보게 해 준다더냐?”
태경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 저는 대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그럴 줄 알았다.”
연호정이 태경을 노려보며 외쳤다.
“후개!”
스륵.
순간 태경은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득상은 총관실 구석, 그림자가 진 책장 바로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쩝,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요.”
태경을 노려보는 가득상의 눈빛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하는 짓거리가 하도 비열해서 말이지. 의뢰비 받을 생각이 싹 사라지더라니까.”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가득상이 그의 손에 곱게 접힌 서신을 건네주었다.
태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저게 어떻게?!’
저 서신은 통천단을 통해 모용세가로 보낸 서신이었다.
문제는 저것이 연가 이름으로 보낸 게 아니란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 연가의 총관으로 지내며, 그 역시 통천단원 몇몇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두었다.
“암어(暗語)로 썼더군. 상당히 복잡했다만, 해석하기는 어렵지 않았어.”
태경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개방이라면 암어 해독도 금방이다. 정보를 다루는 조직의 규모가 클수록 암어 해독자의 수준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개방은 백도 정보계의 정점. 초일류 암어 해독가를 무수히 보유한 거대 집단이었다.
연호정이 서신을 흔들었다.
“이제 잡스러운 연기는 그만하지. 그동안 본심을 숨기느라 안면 근육이 마비될 지경 아닌가?”
맞는 말이다.
저 암어 서신까지 들킨 이상 잡아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니, 서신이 아니더라도 이미 연호정 앞에서 표정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했다.
‘제길.’
태경이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알았소?”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세작이란 걸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이리 순순히 시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뭘 어떻게 알아?”
“날 의심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렇소.”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걸 굳이 생각해 봐야 아나? 바보도 아니고, 딱 보면 아는 거지.”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발언이었다.
태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군.”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설령 말한다 한들 믿을 만한 과거를 가진 것도 아니니까.
“생각보다 싱거운데? 끝까지 잡아뗄 줄 알았거든.”
“내가 끝까지 잡아뗀다 한들, 날 믿어 주기나 할 거요?”
“당연히 아니지.”
“나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시인한 것이오.”
묘한 말이었다. 적어도 연호정이 듣기에는 그랬다.
“내가 당신을 잘못 봤소. 가주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치기 무사 나부랭이라고 생각했지.”
“연기가 잘 먹혔군.”
“대단한 연기였소. 군사(軍師)를 목표로 하는 내가 젊은 청년의 속내 하나 꿰뚫어 보지 못했으니, 나도 아직 멀었나 보오.”
연호정은 그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자부심을 느꼈다.
‘역시 예상대로야.’
태경의 눈이 깊어졌다.
“당신이 혼자 행동했을 리는 없으니, 연가주도 알고 있겠군.”
모신 지 수 년이 지났음에도 서슴없이 연가주라 칭한다.
적어도 그 뻔뻔함만큼은 일류라 할 만하다. 제아무리 세작이라도 이러긴 쉽지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은 모르시지.”
“이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있소?”
“그러니까 말이다.”
태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주가 모른다고?’
그는 연호정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사실인가?”
“물고기를 잡았으면 비늘부터 벗겨야지,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죽일까?”
“왜 말하지 않았소?”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태경은 불현듯 깨달았다.
“당신…… 가주가 되고 싶다는 야망이 진짜였군!”
“십 년 가까이 세작질해 먹은 놈 앞에서 진심 아닌 연기가 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태경은 나직이 탄식했다.
“내 자만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었어. 본질을 보았음에도 포장된 표정에 홀랑 속아 넘어가 버리다니.”
어떤 도움을 받았든 이 일의 주역은 연호정이다.
말하자면 세작을 잡아내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탄식을 토하던 태경은, 동시에 기뻐했다.
‘병신 같은 놈!’
가주가 모른다?
알아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지만, 모르고 있다면 더 쉬워질 것이다. 태경은 연호정의 욕심에 내심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어 주어 고맙네.”
태경이 독기 어린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욕심 많은 사람은 항상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니까.”
“욕심이 부족한 놈들은 그러더군.”
“호부 밑에 견자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소이다.”
“너 같은 세작 나부랭이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연호정이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네 발로 나갈래, 아니면 질질 끌려갈래?”
잠시 후, 태경은 무사들에 둘러싸여 뇌옥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말했다.
“후개 양반.”
“말씀하시구랴.”
“아버지께 전해 주시오. 뒤는 우리가 맡을 테니 회포 잘 푸시라고.”
* * *
끼이이익!
독방 문이 열렸다.
퍽!
태경이 쓰러지듯 독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하나가 누우면 꽉 차는 좁은 방이었다.
법인각주의 눈빛이 몹시 사나웠다.
“당신이 그럴 줄은 몰랐소.”
태경은 들어간 그대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벽면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일견 초탈해 보였다.
“감히 그 뻔뻔한 낯짝으로 우릴 농락했단 말이지?”
“…….”
“할 말이 그리도 없는가!”
“…….”
태경은 묵묵부답이었다.
씩씩거리던 법인각주가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외다.”
법인각주가 독방 문을 닫았다.
콰앙!
강철로 만든 문이 흔들릴 정도로 격한 소리였다.
그렇게 태경은 미약한 달빛만 들어오는 독방에 홀로 갇혀 버렸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감고 앉아 있던 태경이 입을 열었다.
“청인(聽人).”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창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화인(話人).”
“…….”
“현천(玄天), 호천(昊天).”
“호천.”
치리링.
작은 창으로 작고 시커먼 열쇠가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서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태경은 바닥을 더듬어 겨우 열쇠를 찾았다.
‘됐다.’
이제부터는 쉬웠다. 그는 열쇠로 문 맞은편 벽을 더듬었다.
‘좌하점(左下點), 상(上) 삼(三), 우(右) 이(二).’
아무리 잘 만들어진 뇌옥이라도 돌과 돌 사이에 틈은 반드시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태경이 찾는 건 단순한 틈이 아니었다. 이 작은 열쇠가 딱 들어가는 철제 구멍을 찾아야 했다.
가각. 가가각.
어두워서 잘 넣어지지 않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몇 번이고 연습했지만, 막상 실제 상황이 되니 예전만큼 쉽게 되질 않았다.
‘후우.’
최대한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다시 쑤셨다.
잠시 후.
후우웅.
놀랍게도 바닥 한가운데가 쑥 꺼졌다.
땅이 꺼졌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태경은 쾌재를 지르며 그곳으로 들어갔다.
스르륵.
태경이 들어간 후, 바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독방은 텅 비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