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21)
521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5)
‘흐음.’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을까? 얼추 십 리 정도는 되려나?
‘금색 불꽃이라.’
쿠우웅!
십 리 밖에서 터진 충격파로 산 일대가 뒤흔들렸다.
‘연호정,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
한데 그 실력이 굉장한 모양이었다. 거리가 멀어 적의 기세는 읽히지 않았지만, 새어 나오는 충격파가 대단했다. 연호정과 치열한 공방을 나눌 만한 고수라는 뜻이었다.
‘세상에는 참 고수가 많군.’
패율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 역시 사람이다. 그것도 무(武)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자존심도 강했고, 지기 싫어하는 마음도 누구 못지않았다. 당연히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있으면 질투도 하고 못마땅하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기심보다 훨씬 강렬한 투지가 그의 삶을 지지하고 있었다.
‘쓰러트리는 맛이 있지.’
자신보다 강한 자는 많다. 당장 연호정만 해도 자신보다 십수 년이 어린데도 강하다.
그래서 좋다. 세상엔 천재도, 괴물도 많으니까.
장애물이 많을수록 그것을 격파하고 뛰어넘는 과정이 재미있어진다. 인내의 시간은 힘들지만, 싸워 이겨 쟁취하는 순간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파아아악!
십 리의 거리를 절반이나 줄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음험한 기세가 느껴졌다. 살수, 무인 등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호승심 하나 때문에 물주를 피곤하게 할 순 없지.’
당연히 그 물주는 연호정이었다.
파아아악!
좌측 수풀에서 튀어나온 살수가 갈고리 손톱으로 그의 목을 노렸다.
치이잉!
기다렸다는 듯 단창을 세워 살법을 막은 그가 살수의 울대를 잡아 비틀었다.
콰드득!
비틀거리던 살수가 수풀 너머로 벌러덩 넘어졌다. 울대와 함께 경동맥까지 뜯겨 나간 판이다. 바로 지혈한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때를 기점으로, 중구난방이던 살기가 패율 한 사람에게로 확 좁혀졌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패율의 몸에서 일순 막강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파바바바박!
그 흔한 기합성 하나 없이 덤벼드는 살수들.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만 삼십이 넘었다. 하물며 이곳은 탁 트인 지형이 아니었다. 기세를 숨긴 살수들의 접근을 허용하면, 제 실력도 못 보여 주고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패율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좋구나.”
파아아앙! 퍽!
탄력적으로 휘두른 단창의 창날에 살수 하나의 가슴이 뻥 뚫렸다.
휘둘러 베거나 후려치지 않는다. 오로지 자격, 쏘아 내 찔러서 죽이는 살법이었다.
파바바박!
순간적으로 속도를 높여 살수들에게 접근한 그가 단창을 매섭게 휘돌렸다.
퍼버버버버벅!
빛살처럼 빠른 창술이었다.
장창이 아닌데도, 거리가 한참 떨어진 살수 다섯의 가슴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시작부터 비기 개방이었다. 오랜 시간 연마하고 만들어 온, 점창사일(點蒼射日)의 전설을 지우고 새로운 신화를 이룩해 나갈 점창관일(點蒼貫日)의 무공이 폭발했다.
“으아아압!”
쩌저저저저저정!
검은 뽑지도 않았다. 한 자루 단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살수들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 내는 패율의 무공은 가히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퍼버벅! 퍼버버버벅!
방어 이후에는 공격이다. 질풍처럼 빠른 방어 이후에는 빛살처럼 빠른 극속 공격이 이어졌다.
풀썩!
그 많던 살수들이 모조리 줄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쓰러진 살수들의 가슴에는 모두 동일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후웁.’
패율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관일창의 관통력은 강철도 뚫는다. 다만, 그만한 관통력을 얻기 위해선 전사력(轉絲力)은 물론 관절과 근육을 최대한 탄력 있게 다뤄야 했다.
폭발적인 일격을 쏟아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체력과 내공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실전에서 쓰니 느낌이 확 오는군.’
체력 분배, 내공 분배에 신경을 써야 했다. 힘든 상대와의 난전이라고 남발하다가는 상대를 죽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지쳐 죽겠다.
파바박!
또 다른 적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살수가 아니라 관인(官人)들이었다. 한데 보통 관인들이 아니었다.
제각기 상당한 무공을 익힌 듯,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조심스레 접근해 온다.
‘진형?’
무림의 진형이 아니다.
바로 관부, 포쾌들의 진형이었다. 황궁과 관부는 무림인과 달리 정정당당한 승부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범법자를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전략과 전술은, 오히려 무림 문파의 비기를 능가했다.
거기에 저 정도 무공이라.
“좋아, 아주 좋아.”
차아아앙!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검과 창, 성격이 다른 병기를 동시에 쥐었는데 이전보다 기세가 더 강렬해졌다.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지를 떠나, 기세만큼은 어떤 고수의 간담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날카로웠다.
패율이 외쳤다.
“오라!”
관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난전의 시작이었다.
* * *
“정말이지 대단한 놈이로군.”
번작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의 그 어설펐던 놈이,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성장했단 말이지.”
번작이 놀랄 만도 했다.
당시 연호정은 번작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아니, 아버지인 연위와 함께 덤볐어도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때의 연호정은 실전 감각이 극단으로 치달은 상태였고, 연위 역시 실전에서 처음 비기를 개방했을 만큼 기세가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도 번작을 놓쳤다. 정확히는, 번작이 싸움을 포기하고 도주한 것이다.
그 도주가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었다. 번작은 연위와 연호정, 둘 모두를 죽일 수 있지만 남은 고수들의 협공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당시 목숨을 걸고 싸웠더라면.
그랬다면 연위와 연호정, 두 사람의 목숨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위에서도 네놈이 날뛰는 것을 방관하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우연이든 뭐든, 이참에 목숨을 끊어 놓는 게 좋겠지.”
담담한 목소리에 굉장한 자신감이 묻어 나온다.
실제로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상을 입고 팔도 부러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세는 연호정의 살기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 준비는 됐나?”
“웃기는 놈이로군. 실전에서 준비는 무슨.”
“아량을 베풀어 준 줄도 모르는 모양이구나.”
도발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번작은 연호정의 불꽃 같은 눈빛을 보며, 급성장한 무공과는 달리 정신력만큼은 이전과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화르르르륵!
번작의 몸에서 금빛 화염이 치솟았다.
신화교를 대표하는 절기, 금제순화공(金帝純化功)의 화력이 끝 간 데 모르고 퍼져 나갔다.
“오만한 놈.”
번쩍!
번작의 쫙 펴진 오른손에서 거대한 불꽃의 칼날이 일었다.
화룡마도(火龍魔刀)였다. 맨손으로 신병이기 수준의 강도와 예기를 뿜을 수 있는 신화교만의 독자적인 절기였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묻어 주마.”
파아아아앙!
번작이 연호정을 향해 쇄도했다.
‘역시.’
빠르다.
내상도 꽤 심해 보이고, 화룡마도를 두른 오른팔도 정상이 아닌 듯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빠르다. 극한의 화염을 뽑아내는 저 출력도 당시 그대로였다.
연호정이 장창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어엉!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그들 주변의 나무들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공명음에 실린 경력 때문이었다. 음공(音功)의 원리가 바로 이와 같았다. 두 사람은 병장기의 충돌만으로 어지간한 음공 고수의 위력을 뛰어넘는 충격파를 생성해 낸 것이다.
“제법이구나!”
훅!
어떠한 파공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미 연호정의 후측방으로 이동했다. 탄력 넘치는 발놀림이 아닌, 몸 전체가 무게 없는 불꽃처럼 이동하는 초신속(超迅速)의 경신술이었다.
번작의 화룡마도가 연호정의 허리를 노렸다. 그 위치, 그 자세에서 가장 가깝고 치명적인 부위를 노린 것이다.
그때였다.
쩌어어어엉!
언제 뽑아 들었는지, 흑룡부의 도끼날이 번작의 화룡마도를 막았다.
자세가 흐트러져 무게가 제대로 실리지 않은 일격이었다. 그래서 흑룡부로 방어가 가능했다.
번작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
후욱!
그가 화룡마도를 거두고 좌수(左手)를 뻗어 연호정의 오른손 손목을 움켜잡았다.
번작의 전신에는 금제순화공의 화기가 꽉 차 있었다. 진기가 가시 영역으로 구현되지 않아도, 그저 잡히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화상을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치이이이이익!
연호정의 손목에서 허연 수증기가 일었다.
차디찬 수기(水氣), 북방현무의 현무수기가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번작의 금제순화공을 일순간 밀어젖힐 정도의 수력(水力)이었다.
퍼어어억!
번작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창대 끝으로 어깨를 맞은 것이다.
“흐음.”
연호정이 오른손을 가볍게 털었다.
찰나의 순간을 읽고 대량의 현무기로 대응했지만, 그래도 의복이 타고 손목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금만 느렸다면 끔찍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상대의 자존심을 찢어발기는 말이었다. 특히나 자신보다 약자였던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발작하지 않을 사람이 몇 없을 것이다.
‘…….’
그 몇 없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번작이었다.
비틀거리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연호정을 보는 그의 눈빛이 어느새 투명해졌다.
‘이놈, 정말 대단한데.’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힘과 힘의 대결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반응 속도, 이 내공 운용, 이 발경 폭발은 자신에 비해 한 치의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 이상이었다.
번작이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콰앙!
대지를 찍는 진각.
동시에 사방에 번져 있던 불의 화기가 회전하며 그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퍼어어엉!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일창을 내질렀지만, 어느새 번작은 나무 위로 올라가 있었다.
화력의 집중이었다. 숲에 번진 불길, 그 불길의 화력을 빨아들이는 이상 그는 마르지 않는 내공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연호정은 차가운 눈으로 번작을 올려보았다.
번작이 피식 웃었다.
“왜? 치사한가?”
“별로.”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상대하기에는 네놈이 너무 강해졌어.”
순순한 인정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백병신군 막원을 죽여야 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순 없었다.
화르르르르륵!
번작의 양손에서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졌다. 불꽃이 사라진 그의 주먹엔 은은한 황금빛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신화교의 절기, 염왕권(炎王拳)이었다.
“반 각 안에 끝내 주마.”
파아아앙!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
그야말로 빛살처럼 접근하여 일권을 날렸다.
퍼어어어어억!!
순간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번작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뭐?!’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는 번작의 눈이 흔들렸다. 옆구리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멍을 뚫은 흑회색 철쇄가 그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주작공,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의 홍련일섬(紅蓮一閃)이라는 거다.”
치리리리리링!
주먹에 단단히 감은 교룡쇄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작화기였다.
오른손으로 교룡쇄를 쥔 연호정이 왼손에 들린 장창을 길게 뒤로 뺐다.
“일단 몇 군데 뚫리고 시작하자.”
파아아아앙!
장창이 섬전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