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33)
533화. 강자존(强者存) (1)
“후우.”
뚝뚝 떨어지는 땀이 어느새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무릎을 잡고 숨을 헐떡이던 부선이 이내 심호흡을 했다.
우우우웅.
숨을 깊게 들이쉬니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기의 양이 많아졌다.
그 많은 양의 자연기를 구결에 따라 운용하니, 차차 거칠고 흉포한 검붉은 기운이 되어 그녀의 단전에 차곡차곡 쌓였다.
크르르릉.
내공이 마치 야수의 울음소리를 내는 듯하다.
‘대단해.’
부선은 자신의 양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쳤었는데, 호흡 몇 번으로 축기와 운공을 반복하니 벌써 몸에 활력이 돋았다.
‘연성하면 할수록……!’
그녀는 혈사자기(血獅子氣)를 떠올렸다.
혈사자기 역시 강호일절이라 할 만한 신공(神功)이었다. 저 백도 정파의 무공과 달리 심신 수양을 배제한, 오로지 전투만을 위한 무공으로서 가히 흑도를 대표하는 무공이라 할 만했다.
흑사자기(黑獅子氣)는 또 달랐다.
한없이 거칠고 전투적인 성질만을 가진 혈사자기에 무학 자체의 깊이를 더했다.
진기의 밀도와 회전, 운공의 회복력과 축기의 양도 훨씬 더 대단했다.
물론 아무나 이 정도의 효율을 뽑아낼 수는 없다. 부선은 혈사자기를 목숨 걸고 연성했고, 흑사자기의 근본이 되는 혈사자기에 정통했기에 흑사자기의 이점을 거의 대부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가 되었든, 부선은 이 흑사자기야말로 흑도 역사를 통틀어 첫손에 꼽히는 절대무공이라 의심치 않았다.
“대단하구나.”
부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을까? 그곳에는 엽성이 있었다.
엽성의 눈에 흥미가 일었다.
“너의 경지가 셋째를 훌쩍 뛰어넘었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보니, 정말 대단한 성장세를 보여 주었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네가 기존과는 다른 무공을 연성하였다는 걸.”
부선의 눈이 차가워졌다.
“사형제지간이라도 개인 수련을 엿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쯤은 알고 계실 텐데요?”
“걱정하지 마라. 나도 방금 왔으니까.”
“…….”
“설령 엿봤다 한들, 내가 너의 무공 어느 부분에서 얻어 갈 것이 있겠느냐.”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부선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엽성이 피식 웃었다.
“우리 사형제지간이 차 한잔할 만한 사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연히 목적이 있어서 왔고, 그 목적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우웅.
부선의 몸에서 은은한 검붉은 진기가 피어올랐다.
“후계자를 정하자는 건가요?”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사부님의 권한이다. 다만,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후계자들의 권한이겠지.”
위협적인 언사였다.
부선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어렸다.
만전의 상태라도 이기기 힘든 사람이 엽성이었다. 흑사자기가 제아무리 신묘하다 한들, 반이 넘는 내공을 소모한 지금으로선 엽성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
‘내가 너무 긴장을 풀었구나.’
엽성 정도 되면 당당하게 날짜를 잡고 싸우자고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후계자 싸움을 벌이자고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 잘못이다. 나는 지금 야생 한복판에 서 있어. 언제 어디에든 내 목줄을 뜯을 야수가 있음을 인지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흑도다. 흑도 연맹인 묵룡부의 후계자들이라도, 그들 역시 흑도인인 이상 상대가 약할 때를 노리는 것은 당연했다.
부선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통로가 있었다. 위기 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녀가 직접 만든 통로였다.
‘틈을 보고 도주할 수밖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도주에 당당했다.
그때, 엽성이 말했다.
“너무 긴장할 것 없다.”
“……?”
“실제로, 나는 너를 떠보려고 왔다. 보다가 쉽겠다, 싶으면 곧장 기습이라도 가할 생각이었지. 약해 빠졌더라도 셋째가 있는데, 나도 다치는 걸 조심해야 하는 처지거든.”
부선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건가요?”
“오는 길에 묘한 소문을 들었다. 당분간 내가 너희를 노리는 일은 없을 거다.”
“소문이라니요?”
엽성이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너는 연호정이란 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연호정을 들먹이지?
“놀라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끝이냐?”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오라버니보다도 강한 무공을 연성하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괴물이죠.”
순간 엽성의 눈이 번뜩였다.
입가에는 조소 비슷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섬뜩했다.
“확신하느냐?”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요. 솔직히, 그만큼 강한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도 그따위 말을 한다?”
“저는 제 눈보다 사부님의 눈을 믿거든요.”
“호오.”
엽성이 고개를 좌우로 뒤틀었다.
우두둑! 하는 섬뜩한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사부님께서 놈이 나보다 강하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지?”.
“직접적인 비교를 하신 적은 없죠. 하지만 연호정을 두고 이런 말은 하셨지요. 늦어도 십 년, 빠르면 오 년 안에 또 다른 성천의 강자가 세상에 나타날 거라고.”
“…….”
“이미 성천십삼좌를 제외하고는 맞상대할 이를 찾기 힘들 정도의 강자라 했어요. 그렇다면 아무리 낮게 봐도 오라버니의 아래는 아니겠지요.”
“그렇군.”
엽성이 인상을 찡그렸다. 분노를 표하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사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지? 참으로 대단한 평가로군.”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한가롭게까지 들렸다.
부선은 상관하지 않았다. 엽성이 연호정의 무력을 믿든 믿지 않든,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인 것 맞는 듯하다. 그 딱딱한 무림맹이 자신들의 대표로 삼을 만한 능력이 되는 자, 많지 않겠지.”
“그렇겠지요.”
“천하제일 후기지수라는 놀라운 명성에, 백도 칠대세가의 수좌였던 구주명가를 무너트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청년 고수라…….”
엽성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음에 들어.”
부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오라버니, 그 사람을 회유할 생각인 건가요?”
“왜? 그럼 안 될 것 같으냐?”
“최소한 재미있는 발상임은 분명하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도의 대표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겠다……. 후계 싸움이라 해도 선을 넘는 행위가 아닐까요?”
“선을 넘는다? 선이라는 게 뭔지 알려 주겠느냐?”
“…….”
“하면, 제아무리 후계 싸움이라 한들 사형제지간임은 분명한데, 상대가 약해진 틈을 타 목을 따 버리려고 찾아온 내 행위는 선을 넘지 않은 거냐?”
부선은 말없이 엽성을 노려보았다.
엽성이 피식 웃었다.
“굳이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만, 너와 셋째는 절대 나를 이길 수 없다.”
“…….”
“말이 없구나?”
“그렇다고 한들, 아니라고 한들 아무 의미가 없지요.”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해석하든 제 알 바는 아니에요.”
“하하하!”
엽성이 크게 웃었다.
“정말 많이 컸구나. 내 앞에서 말장난도 칠 줄 알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상대의 그릇 탓이지 제 탓은 아니랍니다.”
“무공만큼이나 혓바닥 놀리는 실력도 늘었구나.”
“뭐라도 잘하면 좋은 거죠.”
가만히 부선을 보던 엽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꽤 즐겁구나. 여기 오기 전까지,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장난을 치는 사람은 없었거든. 신선하니 좋아.”
그가 몸을 돌렸다.
“열심히 수련해라. 혹시 아느냐? 내가 차기 부주가 되면, 널 본부의 돌격 대장으로 삼아 줄지.”
부선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소문은 뭐죠?”
“음?”
“오면서 소문을 들었다면서요. 그 소문에 관해 말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착각하지 마라. 널 기습하지 않는 이유를 말해 주었을 뿐,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엽성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볼 때는 긴장해야 할 게다.”
그렇게 엽성이 사라졌다.
긴장이 풀렸는지, 부선이 한숨을 쉬었다.
“제길, 역시 강하긴 강하구나.”
그때였다.
우두둑!
“크윽!”
부선이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엽성이 그녀의 양 팔목을 쥐고는 코앞에서 형형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
엄청난 힘이었다.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왔다. 흑사자기를 운용하는데도 도무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둘째야.”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엽성의 목소리는 자상하면서도 극도로 살벌했다.
“너무 용쓰지 마라. 네가 자꾸만 날 이기겠다고 날뛰면, 너를 용서하려는 내 마음도 흔들리지 않겠느냐?”
“……!!”
“다시 만나는 날, 너의 태도를 보겠다. 진정 날 이기려고 한 수련인지, 나를 위한 무(武)의 연성이었는지를 보겠단 말이다.”
부선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엽성이 피식 웃으며 자신의 이마로 그녀의 이마를 툭 쳤다.
“정신 차려라.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없는 자리가 있다. 제 명대로 살고 싶거든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야.”
엽성이 부선의 팔목을 잡은 손을 풀었다.
부선은 여전히 엽성을 노려보았다.
엽성이 몸을 돌렸다.
“고생했다.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 정말 큰 노력을 했어.”
스르륵.
엽성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사라진 것이다.
“윽.”
부선은 왼쪽 팔목을 어루만졌다. 오른쪽 팔목은 괜찮았지만, 왼쪽 팔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금이 간 것이다.
고작 악력만으로 팔목에 금이 갔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엽성은 혈사자기를 익히고 있어. 나는 그보다 뛰어난 흑사자기를 익히고 있다. 그런데도 이 힘의 차이는……?!’
힘도 힘이지만, 내공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질도, 양도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아.”
이 정도 협박에 굴할 정도였다면 진즉 꼬리를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양천의 제자였다. 그리고 사형제 중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인정을 받았다.
부선은 자신의 노력을, 독기를 믿었다.
‘가만.’
부선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을 물었다…… 그렇다면 그 소문이라는 게 연호정에 관한 소문일 텐데.’
보아하니 엽성은 연호정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 것 같았다.
부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상대가 약할 때 기습을 하는 것은 야생에서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 약자가, 언제나 자신인 것은 아니다. 강자도 언제든 상처를 입을 수 있고, 그때를 노리면 천하의 강자라도 목숨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스르륵.
부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싸움은 진즉에 시작된 것이다.
* * *
“음?”
연호정이 옆을 바라보았다.
미로처럼 얽힌 동혈을 지나 묵룡부의 외동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옆에, 사나운 존재감을 발산하는 한 장년이 있었다.
“우리 구면이지?”
툭 던지듯 말하는 엽성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한테 뭐 볼일이라도 있나?”
“있으니까 예서 기다렸겠지.”
“할 말 있으면 해라.”
엽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너무 탁 트인 곳이군. 어둡기도 하고.”
“…….”
“밖에 좋은 찻집을 아는데, 차나 한잔할 텐가?”
“차는 잘 모르는데. 술이면 좋겠군.”
“하하!”
엽성이 크게 웃었다.
“취향이 마음에 드는군. 나도 차보다는 술이 좋아. 가지, 내가 살 테니.”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버지께서도 공짜 술은 마다하지 말라 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