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54)
554화. 붕괴의 조짐 (4)
송하신니는 당황했다.
“소, 소협은?”
“소협이고 자시고, 아미파 맞소?”
퉁명스럽고 의아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뭐랄까, 왠지 분위기에 압도된다고 할까?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만…….”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적당히 순진해야 의심이라도 하지, 이건 뭐 하얗다 못해 잡티 하나 없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초에 그녀의 뒤를 밟을 때부터 아마파의 비구니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그였다.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정체 모를 비구니에게서는 아미파 최고급 신공의 진기가 순간순간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정도 순도의 진기는 어설프게 배워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영약이나 격체전공으로 얻은 내공이 아닌, 순수한 깨달음의 진기였다.
진기가 그 정도 순수함을 담고 있으면 분석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성격 역시 순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느껴지는 진기는 분명 초절정고수의 그것인데 너무 깨끗해서 문제였다.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독의 침투나 제대로 막으쇼.”
“아니, 대체 누구길래……?”
순간 연호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청년의 눈빛이 너무나도 무서웠던 것이다.
번쩍! 번쩍!
좌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흑색 손도끼의 참격.
촤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달빛 아래 혈우(血雨)가 내렸다.
송하신니는 경악했다. 눈으로도, 기감으로도 잡히지 않았던 복면인들이 그제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끔찍했다. 도끼의 참격에 베인 그들의 몸뚱이가 사선으로 잘려 나가 대량의 피와 내장을 쏟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하시오?! 어서 움직이시오!”
“아!”
파아아악!
송하신니는 재빨리 지붕을 박찼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저 무서운 청년의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젠장.”
보이지 않는 암살자들을 공격하려던 연호정은, 불안정한 송하신니의 움직임에 혀를 찼다.
훅!
“헉!”
송하신니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청년이 자신의 옆으로 날아와 팔을 걸었기 때문이다.
“힘 빼시오.”
연호정의 두 눈이 번쩍였다.
파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파공성과 함께 두 사람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미친 듯한 속도였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신속의 이동에 송하신니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이, 이런!’
엄청나다. 주변 풍경이 무서운 속도로 후방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이토록 빠른 신법은 일찍이 본 적도, 겪은 적도 없었다. 날개 달린 새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무게가 없는 불꽃의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화려한 거리의 건물 십여 개를 밟고 나아간 두 사람이 작은 숲 앞에 내려섰다.
“헉헉!”
땅에 내려서자마자 송하신니는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독 때문인지 엄청난 속도의 신법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때, 송하신니의 명문혈에 연호정의 손이 닿았다.
“진기를 가라앉히시오. 긴장하지 말고.”
순간 송하신니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참으로 기이한 청년이구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리 행동하게 된다.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지닌 목소리였다.
화르륵!
송하신니의 명문혈로 주작화기(朱雀火氣)가 침투했다.
송하신니는 내심 깜짝 놀랐다. 성질이 다른 내공을 침투시키다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 내상으로 몸이 성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이내 더더욱 큰 놀라움으로 덮여 버렸다.
‘이럴 수가!’
우우우우웅!
어느새 전신 기맥을 휘도는 뜨거운 진기가 먹물처럼 퍼진 독기의 대부분을 불태워 버렸다.
엄청난 힘이었다. 손톱만큼의 진기가 그 독한 독기를 한순간에 제압하고 있었다.
화기의 특성을 고려해도 이건 굉장한 일이었다. 아미파의 절정신공으로도 막기 급급했던 독기를 한순간에 불태워 버리다니!
‘이 청년의 진기는 극도로 농축되어 있구나! 게다가 이 성스러울 정도의 화기는……?!’
잠시 후.
치이이이익!
송하신니의 상처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이내 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잔여 독기가 체외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그녀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었다.
“다 되었소.”
“……!”
“독기로 인한 내상은 어쩔 수 없소. 그거야 알아서 다스리시길 바라오.”
송하신니가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도끼를 거두었는지, 손에는 철창만이 보였다. 언뜻 보아도 질 좋은 철을 명인이 제련한 물건인 듯했다.
송하신니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연호정은 피식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답답하기 그지없었지만, 이런 인사를 받으니 그 답답함도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지간히 착하군.’
살벌한 강호 무림에서 목숨을 살려 줬다고 감사 인사부터 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왜 살려 줬는지,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연호정이 보는 강호와 송하신니가 보는 강호는 그렇게 달랐다.
“아미파, 그것도 장로급 인사이신 것 같소만.”
“말만 장로일 뿐입니다.”
“역시 장로가 맞았군.”
“송하신니라 합니다. 은인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어린 청년임에도 태도가 깍듯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런 모습조차 연호정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인사는 됐소. 나 역시 신니의 뒤를 쫓았으니까.”
“예에?!”
“아미파의 비구니가 길을 걷는데 지나치게 긴장하면서 걷더군. 뭔가 이상하다 싶어 뒤를 쫓았소.”
뒤를 쫓았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엄청나게 당당했다. 송하신니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데 좀 묘했소이다. 실력은 뛰어난 듯한데 너무 어설펐소. 주변 시선을 조심하는 것 같은데 한 걸음에 빈틈이 우수수 보이고, 몰래 접근하는가 싶었는데 대놓고 옷깃 소리를 내거나 파공성을 잠재울 생각도 안 하고.”
“…….”
“산에서 불법만 닦으셨소?”
송하신니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딱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각자가 선택한 길이 다른 법이니까. 연호정이 송하신니보다 불교 경전을 덜 읽었다고 부끄러워하겠는가.
다만, 그래도 아미파의 장로로서 무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민망할 따름입니다. 세파에 몸을 실어 본 적 없이 오롯이 산의 가르침대로만 살았기에…….”
“그것참, 그건 또 어떤 의미로 대단하군.”
“그나저나…… 은인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미파의 장로란 사람이 이리 존대를 하니 묘하게 불편했다.
창을 내려놓은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라 하오. 현재 무림맹 의정군의 대수 겸 묵룡부의 특임 부관을 맡고 있소.”
“아!”
송하신니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유명한 그?”
천하제일 후기지수. 정말 들어도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칭호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비록 세상에 나서지 않았지만, 은공의 협행과 무공은 고즈넉한 산사에까지 들려올 정도였습니다.”
“그랬구려.”
“한데…… 묵룡부의 특임 부관이라는 직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무림맹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그렇지, 이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무림맹이 반 봉문 상태에 들어간 것도 모르셨소?”
“예에?!”
“무림맹은 공공의 적에 대응키 위해 묵룡부와 일시적인 동맹을 체결했소. 설마 묵룡부는 아시겠지?”
“아, 알고 있습니다.”
송하신니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왠지 점점 더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후우, 정말 빠르군.”
저 멀리서 붉은색 장창을 든 장년 사내가 걸어왔다. 황석태였다.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언뜻 보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고수였던 것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내 일행이오. 긴장할 것 없소.”
“……아, 예.”
“그나저나.”
천천히 쪼그려 앉은 연호정이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
“대체 거긴 왜 가신 거요? 아니, 거기가 어디길래 그리 은밀히 들어가려 한 것이고, 그 망할 암살자 놈들은 또 뭐요?”
순간 송하신니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은혜를 입었으니 자신의 소속과 법명도 다 알려 주었다.
한데 막상 ‘그 일’에 관해서 물으니 불쑥 의심이 들었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문 사람들도 믿지 않고 홀로 이곳까지 왔다. 정확히는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믿어선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은인이라도 쉽게 말해 줄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긴장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송하신니를 보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으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소. 하긴, 대뜸 뒤를 쫓은 데다가 뜬금없이 벽산연가의 장남이라 하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겠지.”
“아…….”
송하신니는 순간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연호정이 창을 쥐고 일어났다.
“주변을 경계하던 걸로 보아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일단 이곳에서 몸 상태를 바로잡으시오. 위험은 벗어났지만, 중독으로 얻은 내상이 꽤 깊을 거요.”
“저, 저는…….”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자네가 잠시 이 양반 호위 좀 맡아 주게.”
“자네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위험한 암살자가 가득한 곳이야. 하물며 아미파의 장로를 죽이려 했으니, 강호의 동도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지.”
황석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의 동도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이 인간이 소름 돋게 왜 이러지?’
강호의 도리니, 무림의 우정이니 따위의 말은 씨도 안 먹힐 인간이 연호정이다. 애초에 의리나 인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인간이 듣기에도 민망한 동도 소리를 해?
그때였다.
“헉! 설마 거기로 되돌아가실 생각이신지요?”
“당연히 가야 하지 않겠소? 아미파의 장로를 공격한 놈들이오.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탈탈 털어 봐야지.”
“위, 위험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어떻게든 목숨 부지할 능력은 되니까. 나보다는 신니 걱정이나 하시오. 중독으로 얻은 내상은 일반 내상보다 고치기 까다롭소.”
그걸로 끝이라는 듯 연호정이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때, 송하신니가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음?”
고개를 돌린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그게…….”
머뭇거리던 송하신니가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은인을 그리 위험한 곳에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니 아직은 그곳이 그곳인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 그래 주시겠소?”
연호정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들을 준비가 되었소.”
옆에 선 황석태는 생각했다.
‘차라리 사람 깔끔하게 죽이는 암살자가 덜 사악해 뵈는군.’
절대 척을 지어선 안 될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