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6)
56화.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6)
명온지는 이곳에 오기 전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역시 그럴까요?’
‘연가가 정녕 세작을 다 잡아들였다고 치자. 그 세작 중 본가와 연관이 있는 놈은 없다.’
‘모용가주가 말했을 가능성은요?’
‘무(無)다. 모용가주는 그 나름의 신의가 있는 사람이다. 야망은 크지만, 강한 상대 앞에서 허리를 굽힐 줄도 아는 사람이지. 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아랫사람에게 절대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연가 쪽에서 세작을 잡아내 고문했다고 해도 본가의 이름이 나오진 않겠군요.’
‘그렇다.’
‘하면 굳이 암사대를 파견할 이유가…….’
‘모용세가는 우리에게 송곳니를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힘으로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라고 모용세가를 만만히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아니지요.’
‘모용가주는 손을 잡기 나쁘지 않은 위인이다. 지금까지 그쪽에서 무리를 해 줬으니, 이번엔 우리가 나서 줘야지.’
‘이유는 무엇으로 할까요?’
‘사업. 어차피 모용세가가 연가주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하니, 이번 접선 이유는 사업으로 대도록 해라.’
‘만일, 연가의 대공자가 우릴 의심하면 어떻게 하죠?’
‘그럴 일은 없다. 애초에 강서와 절강은 힘 좀 있다 하는 무림 세력들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다.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
‘의심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연가는 무너질 테니까.’
그렇다.
이미 명가에서는 세력 확장을 위해 많은 준비를 끝마쳤다. 저 멀리 대별산(大別山)의 작업 역시 마무리가 됐다.
연가는 망한다.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호정의 공격적인 말을 들은 명온지는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다고?!’
그래, 의심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연가는 망할 테니까.
그러나 의심하는 것과 아는 것은 천지 차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 확신이 아니니 일 처리에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확신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슨 말?”
명온지는 생각과 다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아리송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설마 본가가 모용세가와 손이라도 잡았다는 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다 들통난 거 빤히 알면서 같잖은 연기를 하고 앉았어?”
“들통이라…… 정말 모르겠어. 어쨌든 너희 가문에 모용세가가 세작을 보냈고, 그 세작을 잡았다는 거지?”
“가지가지 하는군.”
그럴 수밖에 없다.
명온지는 연호정이 자신의 속내를 읽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놀라서 순간 표정 관리를 못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문제는 명온지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암사대주로서의 자신에게 있었다.
‘어떻게 처리하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연가가 세작을 잡은 것에 대해 확인만 하고 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누구한테 들었는지, 이놈은 아예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놔둘 수 없다는 말이다. 이놈이 알고 있다는 건 정보가 샜다는 뜻이고, 정보가 샜다면 어디에서 샜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연호정을 생포해서 끌고 가야 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처리하면 돼. 혹시 후개가 들쑤신다 해도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다.’
하남에는 구주명가와 소림사가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향력은 소림보다 명가가 훨씬 강하다. 소림은 불문이지만, 명가는 속세의 명리를 쫓는 세도가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개방이라도 하남성에선 명가의 정보 조작을 파헤치기 힘들 것이다.
‘문제는…….’
명온지는 연호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서늘함을 안겨 주는 인상 깊은 눈동자, 동시에 속을 들여다보기 힘든 안광을 품고 있었다.
‘이놈은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어. 최소한 짐작은 하고 있었다. 우리와 모용세가가 손을 잡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미끼로 던졌다는 건가?’
대체 얼마나 든든한 배후가 있길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먼.”
“…….”
“뭘 믿고 이렇게 뻗대는지 궁금한가?”
명온지는 말이 없었다.
이제 이 건에 관해 얘기하는 건 손해다. 이미 상대도 알고 자신도 안다. 진실이 드러난 이상, 최대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연호정은 그런 명온지의 모습에서 명가의 저력을 느꼈다.
이십 대든 삼십 대든, 첩보 조직의 수장으로 활동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다.
명온지가 첩보 조직의 수장이 된 것은 재능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이렇게 정석적으로 키운 것은 명가일 것이다.
백도를 표방하는 명가에서 가문의 자식을 전문 첩보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만 봐도 명가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가문이었다.
그렇다. 그들에 대해 모른다면 까다로울 수 있다.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뭐 별거 있겠나? 무림인이 최후에 믿을 것은 결국 자신의 실력뿐이지.”
“……실력이라?”
“너희는 날 잡아가고 싶을 것 아냐? 그런데 나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거든.”
“……!”
“어디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명가 첩보 조직의 힘 좀 볼까?”
명온지의 눈이 싸늘해졌다.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다 알고 있는데 더는 속일 필요 없겠지?”
츠츠츠츠.
그녀의 뒤에 선 무사들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철저하게 살기를 다스렸던 그들이, 이제야 그 기세를 개방하는 것이다.
파라라락!
숲 곳곳에 숨어 있던 새들이 놀라서 날아갔다. 그만큼 살기가 매서웠던 것이다.
명온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뇌협 추성을 이겼다고 하던데.”
“그 머저리?”
“맞아, 머저리지. 어린애가 휘두르는 비수에도 죽을 수 있는 게 강호잖아? 하물며 벽산연가의 대공자를 얕보다가 당했으니 머저리 소릴 들어도 할 말 없지. 그런데 말이야.”
스르륵.
어느새 연호정 뒤에 명도가 나타났다.
어두운 숲속, 모닥불 빛이 번지는 곳에서 드러난 명도의 얼굴은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얼굴만 동동 떠다니는 귀신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런 머저리가 아니거든.”
“그래 보이는구먼.”
“명가의 암사대(暗死隊)는 첩보 조직이야. 전투 부대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경우에 따라 무력으로 진압해야 할 때가 많아.”
“강하다?”
“적어도 절정고수 하나 잡는 게 어렵진 않아. 게다가 방심도 안 해.”
명온지가 미소를 지었다.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 해맑은 웃음을 지으니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섬뜩해 보였다.
“그러니 힘 빼지 말고 순순히 우리랑 가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명온지가 고개를 저었다.
“네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어. 배짱이 실력 못지않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넌 다섯 합도 넘기기 힘들 거야.”
“그래?”
“그래. 괜히 암사대가…….”
그때였다.
‘어?’
명온지는 순간 의아했다.
‘근데 우리가 첩보 조직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암사대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조직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그 사람들도 밖으로 떠벌리진 못했다. 다 죽거나, 명가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데 그걸 어떻게?
“너, 우리가 첩보 조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지.”
츠츠츠.
명온지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한 기운이었다.
“너, 정말 안 되겠다. 잡아가야겠어.”
파바바박!
무사 중 다섯이 숲속으로 흩어졌다. 주변에 혹시 모를 ‘눈’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정석적이군. 너무나도.’
그제야 연호정이 도끼를 들었다. 암사대가 무사들을 시켜 주변을 정찰하게 하는 시기, 딱 그 시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온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꿇려라.”
파아아악!
연호정의 뒤에서 명도가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허를 찌르는 공격이다. 상대가 누구든 방심하지 않는다는 명온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상대가 연호정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당했을 수밖에 없는 기습.
투웅!
명도의 눈이 흔들렸다.
내뻗는 주먹이 허공을 쳤다. 정확하게 등판을 노렸던 공격이 실패한 것이다.
‘어디로?!’
퍼억!
“큭!”
창대로 등판을 맞은 명도가 비틀거리며 모닥불을 밟았다.
명온지가 외쳤다.
“조심해!”
콰앙!
명도가 재차 신음을 토하며 명온지 쪽으로 날아갔다.
후웅.
명온지의 손이 명도의 손목을 쥐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명도의 몸이 붕 뜨더니, 어느새 그녀 뒤로 넘어갔다.
이화접목(梨花接木)의 고차원적인 수법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펼칠 수 있을 만큼 몸에 밴 무공이었다.
그때, 거대한 도끼날이 모닥불을 내리쳤다.
콰아앙!
엄청난 위력의 참격(斬擊)이 모닥불을 단숨에 소멸시켰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불빛에 익숙해진 암사대원들의 눈이 순간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차!’
퍼어어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뜨뜻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
우우우웅!
모두가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온몸으로 퍼진 내공 덕에 안력이 향상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시야가 잡힌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로 사라졌어?!’
후우우웅!
차가운 바람이 북쪽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차갑고도 묵직한 바람.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박감은 덤이었다.
명온지가 외쳤다.
“북방이다! 잡아!”
차차창!
열넷의 무사가 기쾌하게 발검했다. 신속하고도 예리한 발검술 열네 개의 공격이 오로지 한 점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콰아앙!
“크윽!”
“아아악!”
놀랍게도 열넷의 무사 전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중 절반은 넘어져서 엉덩방아까지 찧을 정도였다.
명온지의 눈이 커졌다.
‘뭐야?!’
후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투명한 듯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쿠어어어!
저 멀리 어디선가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괴수의 울음소리였다. 그 기괴한 울음소리가 이곳에 있는 모두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수(神獸)의 괴성이었다.
북천의 주인, 현무(玄武)가 깨어난 것이다.
“한 놈이라도 도망치면 다 죽이겠다.”
“……!”
“꿇어라.”
* * *
숲 밖을 벗어나 주변 경계를 다 마친 암사대원들은 다시 왔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퍼어억! 빠각! 퍼어억!
순식간에 세 명의 암사대원들이 쓰러져 버렸다.
쓰러진 그들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몽둥이질에 머리통이 깨져 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죽진 않았다는 것.
“뭐냐, 네놈들!”
기습을 피한 대원 둘이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헉!’
어느새 그들 주변에 수십 거지들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다. 완벽한 포위였다.
“캬아아악! 퉤! 아잇, 시벌. 소매에 묻었네.”
가슴팍을 대충 닦아 낸 가득상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그 양반 말도 맞아.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이 뭐가 중요한감? 안 그러냐, 인마들아?”
“후개?!”
“얼씨구? 한 번에 알아봐? 역시 너희 다 알고 있었구나?”
유들유들한 표정과 달리 가득상의 눈빛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그 한기는 연호정의 그것을 넘어설 정도였다.
극도로 화가 난 것이다.
“천하제일이란 간판 떼고, 불알도 떼. 이 시벌 것들아.”
파아아악!
거지들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