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69)
569화. 그림자는 짙었다 (1)
얼마 만일까. 이곳에 온 지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얼추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아들의 코밑이 거뭇거뭇해질 때쯤이었던 걸 생각하면 십 년이 조금 넘은 것 같기도 했다.
스륵.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수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굵고 억세어 보이는 나무도 무척 많았다. 나무나 비석들의 표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처들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그때와는 또 다르구나.’
당호는 생각했다. 참 어둡고 칙칙한 곳이라고.
아버지, 당대 무림에서 제일을 다투는 열세 명의 강자 중 하나인 그분께서는 본디 어두운 성정이 아니셨더랬다.
당호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성격은 엄격하지만 따스하고 강철처럼 강하지만 와중에 부드러운, 전형적인 옛 아버지들의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분들보다 훨씬 더 유하신 분이었다.
주변 문파 주인들과의 회동에 다녀오실 때면 꼭 맛있는 음식을 싸 오시던 분이었다.
밤늦게까지 형과 수련하다가 아버지께서 오시면, 형과 자신은 웃으며 달려가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달빛이 드리운 후원에서, 세 부자는 맛난 음식을 먹으며 가문의 밝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물론 한 가문의 미래를 논하기엔 형이나 그나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당호는 그때의 기억이 좋았다. 뭣도 모르는 시절이었지만, 부모와 형제 간의 사랑이 끈끈했던 그 시절은 깊고 화사했으며 가슴이 아릴 정도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다.
‘그랬었지.’
당호가 눈을 감았다.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
막내는 너무 어려서 그런 기억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밤늦게까지 수련할 나이도 아니었으니까.
‘녀석도 이제 가정을 이룬 어엿한 가장이거늘.’
동생을 떠올리던 당호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녀석이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면…… 아니, 나이 차가 한두 살 정도만 됐어도.’
막내의 성품, 재능, 그리고 출중한 실력.
‘그랬어도 아버지께서는 형님에게 가주위를 물려주셨을까.’
모른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후계 문제에 관해서 잡음이 꽤 나왔을 거라는 것이었다.
막내의 재능은 그렇게나 대단했다. 단순 재능만 생각하면, 형님의 자식인 당상아와 비슷하거나 더 위일지도 모른다.
그 말인즉슨, 당가 역사상 최고수가 감탄한 천재가 한 시대에 둘이나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이미 역사는 흘러갔고,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시간의 절대적 순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은, 그저 현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당호가 눈을 떴다.
저 멀리 온갖 주사(朱砂)로 칠해진 부적들과 각종 금줄이 둘러쳐진 영역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잠시 후.
마치 귀신을 봉해 놓았을 것만 같은 거대한 동굴 앞에서, 당호의 입이 열렸다.
“아버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언뜻 동굴처럼 보이는 이곳은 진짜 동굴이 아니었다.
저 동굴 안으로 쭉 들어가면 또 다른 석벽이 나온다. 그 석벽을 통과하면 꽤 커다란 마당과 조촐한 집 한 채가 나온다.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지내고 계셨다.
동굴 내부는 길었다. 거기에 석벽으로 막혀 있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이렇게 속삭이듯 부른다고 목소리가 전달될 리 없다.
하지만 당호는 믿었다. 아버지께서 이미 자신의 존재를 포착하셨음을.
‘어쩌면 저 비석이 보이는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아셨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바로 성천의 강자다.
성천의 강자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리고 성천의 강자 중 가장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암왕의 기감은, 성천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가만히 서서 동굴 안쪽을 바라보던 당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버…….”
“호아냐.”
순간 당호는 입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동굴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공간을 뛰어넘어 귓가로 생생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고 자연스럽게 들렸다.
오싹!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전음이다.
이 정도 거리의 전음 자체가 어렵지만, 당호 역시 어떻게든 가능은 했다.
문제는 음성의 선명도였고, 음색의 자연스러움이었다.
대체 얼마나 깊고 방대한 내공을 가져야.
대체 얼마나 섬세하고 뛰어난 내공 운용 능력을 갖추어야, 이처럼 선명한 전음이 가능한가.
‘무섭구나!’
전음 한 번만으로도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당호가 고개를 숙였다. 보이지 않지만, 눈앞에 아버지가 계신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습니다. 저 호아입니다.”
“……그래.”
아버지의 음성은 깊었다.
힘이 있고 없고를 따질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고 나쁨을 따질 수가 없었다.
그저 한없이 깊었다. 너무나 깊어서, 감정 상태를 손톱만큼도 알 수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당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침묵이 어렸다.
잠시 후.
“관이 가주위에 오른 후, 나는 이곳에 나 자신을 유폐하였다. 유폐란 곧 세상과의 단절을 뜻하니, 너희는 나의 뜻을 이해해 주었을 뿐이다.”
“…….”
“괘념치 말아라.”
거짓말.
당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곳에서 형님의 자식들을 오랫동안 가르쳤다는 것을.
자식과는 서먹해도 손자까지 싫어할 조부는 없다. 아버지도 그러했고, 당신께서는 자식에게 줄 사랑까지 모두 담아 손자들에게 쏟았더랬다.
하지만 그 애정의 대상에, 자신의 자식들은 없었다. 아들인 여선은 어린 시절 이후 한 번도 조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당호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도 형님은 가주였다. 가주란 가문을 대표하는 좌장이고, 가주의 자식은 다음 세대에 가문을 대표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당호는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려 했다.
“해서.”
동굴 저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전히 흔들림은 없었다.
“오랜만에 네 목소리를 들으니 좋기는 하다만, 어인 일로 예까지 찾아왔느냐.”
과연 정말 좋으신 걸까?
당호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당호가 무릎을 꿇고 앉아 보따리 하나를 앞에 내려놓았다.
“그간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제가 못마땅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다만…… 이걸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눈앞에 없다. 거리가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곳에 계신다.
하지만 당호는 확신했다. 아버지가 지금 자신을, 이 보따리를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오늘이 아버지 생신날입니다.”
“…….”
“아버지께서는 검남춘(劍南春)에 돼지고기를 좋아하셨지요.”
“…….”
“제가 직접 만들어 봤습니다. 여선에게 종종 만들어 주곤 했으니, 맛이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선이라.”
기분 탓일까?
어쩐지 아버지의 음성이 조금은 가라앉은 듯하다.
“여선은 잘 지내고 있느냐?”
당호가 고개를 숙였다.
“근래 마음에 드는 처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배움도 좋지만, 나이가 벌써 스물여섯이니 배필 될 사람이 생겼다면 어서 날을 잡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물여섯…… 벌써 그리되었구나.”
“…….”
“네가 고생이 많겠다.”
순간 당호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바쁜지도 모르실 것이다.
하지만 저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건지.
철들고 나서는 점점 엄하고 냉정해지시는 아버지가 두려워 쉬이 말조차 붙이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이리 온화한 말투로 고생했다 말해 주고 계신다.
기분이 묘했다. 온갖 감정이 불쑥불쑥 솟구치고 있었다.
당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아버지.”
“그래.”
“언제…… 나오실 생각이십니까.”
다시 또 침묵이 어렸다.
당호는 기다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기까지를.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유물이다.”
“……?”
“나의 존재로 인해 가문이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스스로를 유폐한 것이다.”
거짓말!
당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곳에 스스로를 가두었는지.
“내가 나서 봤자, 가문에 득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
“이곳에서 여생을 마무리하고 싶구나.”
당호는 주먹을 쥐었다.
바라 마지않던 발언이었다. 동시에, 너무나 서글픈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한번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실 것이다.
그것이 기꺼웠고, 그것이 슬펐다.
마음이 복잡했다.
당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뵙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부모 자식이기 이전에 당가의 사람들이다. 가문을 위한다면, 더는 날 찾지 말아라.”
“아버지.”
“네가 가져온 술과 음식은 잘 먹으마.”
당호가 눈을 감았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눈가를 훔친 당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렸다.
“만수무강하십시오.”
“고맙다.”
당호가 몸을 돌렸다.
눈물로 젖은 그의 눈에, 슬픔과 동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그 눈에 자리한 것은 강렬한 분노와 야망이었다.
‘됐군.’
이걸로 확실해졌다.
아버지는 평생 가문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실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그렇다면 되었다. 더는 선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의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당가 최강의 무인이자 최고의 변수는 제외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나아가는 일만 남았구나.’
그렇게 당호는 전대 가주의 유폐지, 만월지(滿月地)를 떠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르륵.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말 그대로 귀신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두툼한 보따리 앞에,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복이 허름했다. 남들이 보면 시골에서 밭이나 매는 노인이라 생각할 만한 차림이었다.
반면 잘 정돈된 머리카락은 질끈 묶였고, 가지런한 수염은 가슴께까지 내려왔다.
다소 날카롭게 찢어진 눈이었지만, 눈가의 주름과 맑은 눈빛, 적당히 뚜렷한 오관 때문에 인상이 강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평범한 키, 평범한 체격, 머리와 수염만 빼면 크게 튀지 않는 외모.
그것이 바로 사천당가의 전대 가주이자 성천의 강자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고수로 평가받는 암왕(暗王) 당형의 외양이었다.
당형은 가만히 보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보따리 옆의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조금 젖어 있었다. 눈물을 쏟아 낸 흔적이었다.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던 당형은 이내 나직이 탄식했다.
“……환희냐, 슬픔이냐?”
하늘은 오늘도 맑지 않았다. 적당히 구름 낀 사천의 하늘은, 오늘따라 왠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공기는 습했다.
당형이 보따리를 들었다.
묵직했다. 검남춘은 한 병밖에 없었지만, 술에 비해 고기의 양이 많았다.
당형은 보따리를 들고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한 손으로 등허리를 두들기며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무림의 일대 거인이라 불리는 성천의 강자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