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71)
571화. 그림자는 짙었다 (3)
“어라?”
기충은 눈을 끔뻑였다.
‘저 사람은……?’
새벽 일찍 이 비렁뱅이만 사는 폐가촌에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다.
은근히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외양이 독특하다기보다는, 이 폐가촌의 특수성 때문에 돋보인다고 할까.
걸인들만 사는, 와중에 어지간한 거지들조차 기겁하며 도망칠 정도로 더럽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허연 무복과 시커먼 장포를 입은 청년의 모습은 상당히 눈에 띄었다.
치링.
기충의 눈이 반짝거렸다.
펑퍼짐한 장포로 가려졌지만, 귀가 밝은 기충은 청년의 몸 어딘가에서 부딪치는 쇳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림인이다.’
그것도 보통 무림인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걸음 속에 일정한 박자가 있다. 일류로 평가받는 고수만 되어도 걸음에 흔들림이 없으며, 절정고수라 불릴 정도가 되면 걷는데도 어깨가 흔들리지 않을 만큼 보행이 기계적으로 변한다. 대개는 그렇다.
하지만 저 청년은, 일정한 박자로 걷고 있음에도 기계적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자연스럽고 부드럽다. 안목 있는 고수가 봐도, 걸음걸이만으론 청년의 경지를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기충은 달랐다.
‘대단하구나. 얼핏 보면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얼굴인데…….’
설마 반로환동?
기충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당대 무림에 반로환동의 경지에 올랐다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하물며 성천십삼좌 중에도 반로환동을 겪은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강호는 넓으니 어쩌면 반로환동을 겪은 기인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기인이 이곳에 찾아올 확률은 한없이 무(無)에 가까울 것이다.
‘음?’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청년을 바라보던 기충은 일순 깜짝 놀랐다.
‘언제 여기까지?’
이십여 장은 넘게 떨어져 있던 청년이 벌써 칠 장 안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기충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빤히 보고 있었음에도 청년의 보행이 빠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금 알아챈 것도 이곳 폐가촌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분해 놓은 부서진 담벼락을 항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스륵.
기충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고수였다. 그것도 기충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일대 고수.
이윽고 청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기충이 엉거주춤 서서 물었다.
“누, 누구쇼?”
“여기가 개방의 삼합 분타요?”
“에? 개, 개방?”
청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적이 아니니 그리 속일 필요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순간 기충의 눈빛이 돌변했다.
어지간하면 끝까지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충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청년에게 정말 적의가 없음을. 아니, 적의는커녕 오히려 호의에 가까운 감정이 있음을.
‘사천성에 이토록 젊은 고수가 누가 있었지?’
기충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신지……?”
청년이 장포를 젖히곤 두 자루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순간 싸움을 걸어 오는가 싶어 긴장했던 기충은, 문득 청년이 뽑아 든 두 도끼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건?!’
흑색의 손도끼, 그리고 백색의 손도끼.
두 도끼는 색만 달랐지,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같았다. 나아가 도끼날에 그려진 용문(龍紋)은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생생하기만 했다.
천하 명품이었다. 언뜻 보아도 신병(神兵)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병기임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신병이기의 경지에 달한 두 자루의 손도끼. 거기에 흑색과 백색.
기충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설마 호장?!”
“그렇소.”
연호정이 다시 도끼를 집어넣었다.
“무림맹 의정군 대수 연호정이오.”
기충이 포권을 취했다.
“개방의 기충이 연 대수를 뵙습니다.”
당금 무림의 청년층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희대의 기린아.
그 무공이 너무나 강해서, 지금은 후기지수라 이르지도 않는다. 후기지수라는 말로 강함을 평가하기에는 이룩한 경지가 너무나도 높기 때문이었다.
세인들은 연호정의 경지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림맹은, 특히 개방의 거지들은 연호정의 실력에 한 치의 과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간 연호정이 외인 모르게 달성한 임무의 난이도와 치러 온 전투를 생각하면, 그의 무력은 못해도 대문파 장문인급 이상이었다.
기충의 얼굴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얼마 전 사천에 진입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나 저희 분타에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개방의 거지가 연호정을 모를 수는 없지만, 실제로 연호정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연호정은 개방의 주요 인물 명단에서도 특급으로 분류되는 인사였다. 당연히 용모파기도 각 분타와 지단에 전해졌다.
하지만 역시나 실제로 보는 것과 그림은 달랐다. 기충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상대의 외양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역시 다르구려.”
“예?”
“성도와 가까운 분타라 그런지, 고수들이 무척 많소.”
기충의 눈이 흔들렸다.
“느껴지십니까?”
“절정고수만 다섯에, 나머지 스물둘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오. 이 정도면 가히 하나의 문파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소.”
기충은 또 한 번 놀랐다.
연호정의 감각은 정확했다. 이곳 삼현 분타에는 절정고수가 다섯 있었고, 일류로 평가받는 고수가 총 서른 명 있었다.
서른 명의 고수 중 현재 여덟이 대외에 나가 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그 외에 다른 개방도들은 새벽 일찍부터 근처에서 동냥질을 하며 정보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절정고수 다섯, 그 외에 일류 스물둘.
연호정의 감각은 소름이 끼치도록 정확했다.
‘엄청나구나.’
원래 대단한 걸 알았지만, 기충이 유독 놀란 것은 이곳 삼현 분타의 고수들이 기척을 숨기는 데에 다른 개방도들보다 능했기 때문이었다.
진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려 감각을 극대화하지 않는 이상, 초절정고수라도 인원수를 정확하게 세기는 힘들 거라 자부했다.
한데 연호정은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인원수는 물론 무력의 수치까지 알아냈다.
무시무시한 감각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안목이었다.
기충이 고개를 숙였다.
“연 대수의 무공이 벌써부터 천하를 논한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시오.”
“한데.”
기충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분타에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미안하오.”
“……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말 그대로 미안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소.”
“그 무슨……?”
순간 기충은 온몸의 털이 삐쭉 서는 것을 느꼈다.
훅!
연호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충은 본능적으로 발을 떼었다. 아니, 떼려고 했다.
툭.
그러나 신법을 펼치기도 전에 기충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연호정에게 점혈을 당한 것이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상대가 말한 다섯의 절정고수 중 하나가 바로 기충이었다. 나아가 그는 이곳 삼현 분타의 분타주이기까지 했다.
그런 고수가, 제아무리 기습이라도 발 한 번 떼지도 못한 채 단박에 제압당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연호정은 기충을 보지 않았다.
폐가촌 안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새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시작하시지요.”
후우우웅!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모르겠다. 요술처럼 폐가촌 입구 앞에 나타난 한 중년 사내가 펄럭이는 양 소매를 크게 휘둘렀다.
기충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저 사람은?!’
의복도 의복이지만 살짝 틀어진 고개를 보는데, 그 날카로운 눈매와 각진 턱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가주!’
사천당가의 주인 당관이었다.
화아아아악!
일순 당관의 양쪽 소매에서 풍성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몇 번인가 양팔을 휘두르던 당관이 다시 뒷짐을 졌다.
잠시 후.
“끝났다.”
“예, 그런 것 같군요.”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확인해 주십시오.”
스르륵.
기충은 돌아보지 못하는 곳.
그곳에서 몇 개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같이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는 그들 모두가 뛰어난 고수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곧이어 기충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고수는 모두 셋이었다.
한 자루 단창을 등에 걸고, 두툼한 소검을 요대에 맨 중년 사내.
붉은색 보병을 어깨에 걸친, 체격이 무척이나 탄탄한 정체불명의 무사.
그리고 흔해 보이는 철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매단 청년.
기충은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연호정이 사천으로 접어들었을 때 함께 넘어온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점창 장로 패율, 귀철검문의 소문주 강량, 그리고 묵룡부의 철기단장!’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려운 대단한 고수들이 무더기로 출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충은 자신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등 뒤에 또 한 명의 고수가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갈무리하지 않은 진기. 솔직 담백하게 풍겨 나오는 은은한 불기(佛氣)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아미파!’
기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무림 정상급 고수들이 줄줄이 나타난 것도 기가 차는데, 그들이 이곳을 공격하고 있었다.
기충이 외쳤다.
“연 대수!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이 사실이 맹에 알려지면……!”
그때,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
당관이 기충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정리가 끝날 때까지 입 닫고 있으라.”
“…….”
“괜한 소란을 피우면 그 즉시 한 줌 핏물로 화할 것이다.”
기충의 입이 저절로 닫혔다.
독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그였지만, 상대는 당가주였다. 천하 어떤 독종도 당가의 주인 앞에서는 설설 길 수밖에 없으리라.
잠시 후.
패율과 황석태, 강량이 당관의 독에 의식을 잃은 삼현 분타의 고수들을 폐가촌 마당 한가운데에 모아 두었다.
패율이 말했다.
“다 데리고 왔다.”
“시작하십시오.”
패율과 황석태가 쓰러진 이들을 포박하고 무릎까지 꿇렸다. 와중에 하나하나 마혈을 짚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끝났다.”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이 귀찮은 듯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헉!”
“쿨럭!”
줄줄이 무릎이 꿇린 개방의 거지들이 모두 깨어났다.
“으윽! 뭐, 뭐야? 머리가 왜 이리……?”
“으헉! 분타주님?!”
“너희는 누구냐!”
당관이 귀를 후볐다.
“개방도 이것들은 시끄러워서 문제야.”
기충이 다급히 외쳤다.
“이놈들아! 입 닫고 있어!”
근래 들어 유해졌다는 평가를 듣지만, 그래도 당관은 당관이었다. 사천의 제왕 소리를 괜히 듣는 게 아니란 뜻이다.
만에 하나라도 심기를 상하게 하면, 무림맹 소속이든 나발이든 다 죽게 될 것이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명하복이 칼 같구려. 과연 개방답소.”
“……연 대수.”
기충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연호정이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기충의 눈이 흔들렸다.
“그 패는……?”
“오정패라는 거요. 후개가 나한테 선물해 준 물건이지.”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든 즉시 개방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고 들었소. 맞소?”
“……맞습니다.”
“내가 이 패를 보여 준 것은 부탁을 하기 위함이 아니오. 그저 우리가 당신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지.”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물론, 당신들이 엄한 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요.”
“……?”
“개방이 연루되지 않았음을 알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제압부터 들어갔소. 이 일은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시오.”
“무슨 말씀인지 도통 알 수가…….”
“낙원소에 대해 알고 있소?”
순간 기충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역시 알고 있었군.”
연호정이 기충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설명해 주시오. 낙원소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어떻게 알았는지, 알고 있는데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
“미안한 말이지만…… 납득이 가지 않을 경우, 당신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