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75)
575화. 그림자는 짙었다 (7)
“……?”
삼선(三仙)이 고개를 들었다.
“으음?”
장부를 살피며 양피지에 붓을 놀리던 오선(五仙)이 물었다.
“왜 그러시는가?”
“…….”
“이보게, 삼선.”
“이상하군.”
“무엇이 말인가?”
“인기척이 없어진 것 같아.”
“인기척이? 누구?”
“……모르겠네. 확실하지는 않거든.”
오선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네. 자네, 아직 한 번도 앵속을 피워 보지 않았잖은가?”
“그렇지.”
“자네 경지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지속적인 앵속 노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걸세. 잠시 환기를 할 터이니 운공으로 몸을 청결케 하시게.”
삼선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게 좋겠네.”
오선이 한쪽 벽면에 내려온 쇠줄을 강하게 당겼다.
후우우우웅.
방 끝 천장 구멍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이곳을 채우고 있던 공기와 먼지들이 환기구를 통해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청정한 공기도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며칠씩이나 머무를 순 없을 것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말일세.”
오선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이곳의 구조 말이야.”
이 거대한 지하실의 구조는 모든 낙원소의 공통 사항이었다. 공기의 유입이 확실하여 어지럽거나 의식이 몽롱해지는 일도 없었고, 튼튼하여 화탄이 몇 발씩 터져도 당장에 무너지지 않는다.
스무 명 이상을 넉넉히 받아 내는 커다란 방까지 합쳐 총 오십 개의 방이 존재하며, 그들 신선들이 거하는 집무실과 ‘먹잇감’을 보관하는 창고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삼선이 고개를 저었다.
“사천당가의 제철 기술이 놀랍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기관까지도 일류일 줄은 몰랐네.”
“일류 수준이 아니야. 천하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기관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야. 그리고 자네도 봤잖은가. 이 튼튼하고 거대한 공간을 만드는 데에 불과 석 달이 채 안 걸렸네.”
“그랬지.”
“그 많은 인력을 동원했다 해도 정말 대단한 걸세. 이런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세력을 더 넓히려 들지 않다니, 당가주가 생각보다 소탈한 사람이었구먼.”
삼선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앵속 연기가 스며들긴 했던 모양일세. 공기가 청정해지니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이.”
“거보게. 내가 말한 대로이지 않나.”
“그래도 이 감각은 여전하군.”
“그렇게 걱정이 되면 내가 올라갔다 올 테니 운공이나 하시게. 사람 참, 걱정도 많구먼.”
오선이 그리 말할 만도 하다.
이곳은, 아니 이곳을 위시한 사천 전역에 퍼진 낙원소는 외인의 침투를 절대 용인하지 않는 곳이었다.
일차적으로 은형비산폭이라는 기관이 숲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기관은, 설령 존재를 알아도 어지간한 절정고수는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벌집을 만들어 버릴 만큼 강력한 살인 기관이었다.
설령 그 기관을 무사히 통과해 건물 내부에 침투한다 한들, 일 층부터 삼 층까지 곳곳에 극독 함정이 설치되어 있다.
시간마다 함정의 조절 장치를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그 즉시 독무가 터져 버린다. 당연히 건드려도 터진다.
일차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이차 관문인 극독 함정 앞에서는 성천의 강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는 삼차 관문까지 있다. 다른 낙원소에는 없지만, 사천성 성도와 가까운 몇몇 지부에는 삼차 관문으로 폭약을 깔아 둔 것이다.
운이 좋아 어찌어찌 이차 관문까지 통과하여 이곳 지하실에 도달한다 한들, 삼차 관문인 폭약이 터지면 모든 증거가 말살된다.
이것이 바로 낙원소의 절진이었다. 누구도 몰래 침투하지 못하고, 설령 침투에 성공해도 증거를 잡지 못한다.
“운공을 하면서 좀 쉬고 있게. 내 금방 다녀오지.”
삼선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지.”
“개의치 말게. 안 그래도 은형비산폭 때문에 조만간 나가 보려고 했네.”
“음? 은형비산폭이 왜?”
“근래 주변에 짐승들이 꽤 많이 오가더군. 예전에 범 한 마리가 잘못 발을 들여서 아까운 암기만 소모하지 않았나.”
“음, 그랬었지.”
“당가 쪽에서 연락이 왔네. 조절 기관을 조금만 손보면 체고가 곰만큼 높지 않은 이상 거의 발동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먼.”
“그런가?”
“그래. 안 그래도 요새 기관식을 배우고 있는데, 한번 점검이나 해 볼 요량이네.”
삼선이 피식 웃었다.
“알겠네. 그럼 부탁 좀 함세.”
“그럼세.”
“아, 그리고.”
“왜 그러시는가?”
“일선(一仙)에게 따로 연락이 왔네.”
오선의 눈이 빛났다.
일선은 그들 신선 중에서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고수였다. 권한은 동등하여 굳이 존대하지 않지만, 다들 비슷한 사선(四仙) 이하와는 달리 삼선 이상부터는 무공의 격차가 컸다.
말하자면 일선은, 낙원신선조(樂園神仙組)의 조장인 선왕(仙王)을 제외하고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신선조의 실질적인 대장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무슨 일인가?”
“조만간 사천성 도지휘사사의 훈련(訓練) 부서장이 올 거라는군.”
오선의 눈이 빛났다.
“첨사?”
“그렇다네.”
“흐음, 훈련 부서 쪽 지휘첨사는 완강하게 저항했다고 들었네만.”
삼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름대로 선비의 줏대를 지키고 싶었던 모양일세. 한데 조사해 보니, 그 양반도 어지간히 살벌한 인생을 살았더구먼.”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이십 년 전, 조카를 간살하고 형님 부부를 죽여 사고사 처리를 했다더구먼.”
오선이 헛웃음을 지었다.
“한 그루 대나무처럼 완고한 선비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인간이, 정작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네. 그 인간, 남들 모르게 종종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서 성욕을 풀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던 모양일세. 조사해서 드러난 사상자만 스물둘이야.”
“허어!”
낙원소에 손님을 받으면서 어지간한 악질들은 다 만나 봤지만, 이 정도 악질은 또 오랜만이었다.
오선이 입맛을 다셨다.
“사람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더니.”
꽤 놀랐지만, 낙원소의 별종 회원들을 생각하면 또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낙원소의 회원 중에는 별의별 미친 인간들이 많았다. 십 세 이하의 소년만 좋아하는 변태들도 있었고, 고문을 즐기는 미친놈도 있었으며, 인육에 환장한 마귀 같은 놈들도 있었다.
그리고 낙원소는, 그들의 욕구를 언제나 충족시켜 주는 꿈과 같은 곳이었다.
“여하간 도지휘사와 함께 온다고 하네. 이번에 지급할 명패가 모자라서 가지지 못했다고 하니, 패가 없어도 함께 들여보내라는 지령일세.”
“알겠네. 그리하지.”
낙원소의 회원 가입 절차는 까다롭기 그지없다.
열 번이 넘는 검열 절차를 걸쳐 회원 인증을 받지 못하면, 황제라도 낙원소에 들어올 수 없다. 애초에 존재도 알 수 없다. 회원 관리와 정보 통제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낙원소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토록 철저한 회원 관리와 정보 통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 잠시 갔다 오겠네.”
“그러시게.”
* * *
“여, 여기입니다!”
무사의 안내를 따라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개울가 근처의 거대한 바위 앞이었다.
“저, 저 바위 밑에 네모난 구멍이 있습니다. 이끼처럼 보이는 직물로 덮여 있는 곳인데, 그걸 치우고 열쇠를 꽂아 넣으면 지하로 통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그 열쇠는 네가 가지고 있고?”
“제 품에 있습니다!”
강량이 무사의 품을 뒤졌다.
무사의 말이 맞았다. 그의 품에는 두 개의 금낭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길쭉하고 각이 진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강량이 금낭을 열었다.
회색빛 사각의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저기에 꽂고 돌리면 지하로 가는 통로가 열린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강량이 바위로 걸어가며 말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때였다.
“안 돼.”
“멈춰.”
연호정과 당관이 동시에 말했다.
강량이 주춤했다.
“왜, 왜요?”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
“예?”
“낙원소는 오랫동안 사천 전역에 뿌리를 내리고 비밀리 유지되어 왔다. 오랜 시간 들키지 않았으니 정신이 해이해질 수도 있겠지만…… 잘못하면 사천 무림이 통째로 뒤집힐 수 있는 사안인데, 이렇게 관리가 허술하다고?”
일행이 무사를 노려보았다.
무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강량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똑바로 말 안 해, 이 새끼야? 진짜 토막 나서 뒈져 볼래?”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때, 당관이 손을 들었다.
“그만.”
강량이 주춤하며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말은 사실이다.”
“예?”
“사실이라 하였다. 저놈은 분명 이곳이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라고 믿고 있다.”
“……?”
“저놈만이 아니지. 일 층부터 삼 층까지, 네 검에 목숨을 잃은 모두가 그리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이 끼어들었다.
“이놈들이 지하실로 내려가 본 적이 있는지가 문제지.”
무사가 외쳤다.
“내려가 본 적 있습니다! 진짭니다!”
“그 열쇠를 꽂고 돌려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를 열고 내려가 봤다고?”
“……?!”
“지하실이 먼저 열려서 안에 있는 사람이 부르거나, 다른 누군가와 함께 들어간 게 아니라?”
무사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낙원소라…… 그놈들, 사람 다룰 줄 아는군.”
일 층부터 삼 층 사이에 경비를 서는 무사들은 그저 일회용 눈속임일 뿐이다. 낙원소의 간부들은 그들 단독으로 지하실로 오게 하지 않았다.
강량이 물었다.
“하지만 정말 생각보다 허술할 수도 있습니다. 이 열쇠가 가짜라는 보장은 없어요.”
“맞는 말이야. 하지만…….”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약이다.”
“확실합니까?”
“너도 맡지 않았느냐?”
“솔직히 애매합니다. 저도 긴가민가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화약이 확실하다. 미세하지만…… 분명 이 일대에 화약이 깔려 있어.”
당관이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화약 냄새가 가장 강하게 나는 곳이 저 바위 쪽이다. 개울물의 물비린내로 숨길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허?”
“속 빤히 보이는 짓거리를 잘도 해 놨군.”
애초에 낙원소의 기관 장치는 당가의 기술에서 나왔다.
그리고 당관은 사천당가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기관에 그리 열정을 쏟진 않았지만, 가문에서 난 지식 전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당관이 무사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이놈은 필요가 없다.”
무사가 땅에 이마를 박았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땅을 부수고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차라리 그게 낫…… 음?”
당관의 눈이 번뜩임과 동시에 연호정이 일행에게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흩어져! 기척을 숨겨라!”
파아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 모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쿠르르르릉!
바위 맞은편, 건물 후원 부근의 땅이 천천히 꺼졌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기관술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하물며 맨땅에 저런 기관을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후.
그곳에서 오선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