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83)
583화. 반역의 향기 (5)
“흐음.”
양천이 무심한 얼굴로 잔을 놓았다.
“텁텁하군.”
평소 자주 마시던 술이었다. 그 술이, 오늘은 영 입에 맞지 않았다.
하긴, 술맛이 떨어진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래 들어 유독 술맛이 떨어졌다.
그리고 양천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스르륵.
탁자 중앙으로 잔을 민 양천이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조심히 술을 마시던 부선이 입을 열었다.
“술상을 치울까요?”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너는 더 마시거라.”
“아, 저는…….”
“영약으로 담근 술이다. 지나친 음주는 안 좋겠지만, 딱 한 병 정도는 괜찮아.”
“……네.”
부선이 어색한 얼굴로 잔을 채웠다.
양천이 눈이 흐릿해졌다.
“지금쯤이면 연 부관과 철기단주가 한창 고생 중이겠군.”
잔을 들려던 부선이 이내 양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사부님.”
“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평소의 부선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쉽게 묻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양천이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더냐?”
부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연 부관 일행은 음제에게 가기 전, 당가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였지요?”
“그랬지.”
“그에 따른 정치적인 문제는 제쳐 두고라도, 그 정도 병력으로 괜찮을까요?”
“음?”
“그게…….”
부선이 헛기침을 했다.
“연 부관의 무공은 진실로 대단해요. 함께 간 철기단주도 그렇고, 강량 역시 무종지벽을 눈앞에 둔 막강한 전력입니다. 무림맹에서도 고수 몇이 원조를 온다 했으니,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상대도 안 될 병력인 건 확실합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천하의 당가를 상대하는데 그 정도 병력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느냐, 그것이지?”
“예. 사천당가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중원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평가받는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일을 해결하는데 그 정도 병력만으로는…….”
부선이 말끝을 흐렸다.
양천이 팔짱을 꼈다.
후계자에게 전수해야 할 것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물론, 복잡한 정치 세계에서 생존하는 법 역시 가르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략과 전술에 관한 부분 역시 잘 가르쳐 놔야 할 것이다.
하긴, 연호정 그놈과 관련된 일에서야 전략 전술을 논할 필요도 없겠지만.
“일단, 네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네?”
“연 부관은 병력을 모을 능력이 없어서 소수로 가는 것이 아니다. 병력을 모아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소수로 가는 것이다.”
부선의 눈이 커졌다.
“그래, 현재 당가엔 삼교와 연관된 놈들이 암약하고 있다.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거에 제압할 생각이라면 병력이 많을수록 좋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명분 없는 전쟁이다.”
“네?”
양천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말했듯, 당가에는 삼교와 연관된 이들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당가주의 아들까지 새외에서 푼 사흡공을 익혔을 정도라면 꽤 많은 사람이 그쪽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당양선이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 인재가 아니었다. 재능은 있었지만, 여기저기 살펴보면 그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들려오는 당양선의 성격까지 생각하면, 삼교 측에서 굳이 당양선을 처음부터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다.
“즉, 현재 당가는 사천의 제왕이라 불리던 강력한 면모를 보여 주기 힘든 상태다. 황궁을 예로 들어 보면, 당가는 현재 황실의 종친들이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황궁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병력을 끌어모아 상대해 버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래, 그것을 의미 있는 죽음이라 포장하고 감수해 보도록 하자. 그래도 병력을 모아 치는 것은 안 돼. 그것은 명분의 문제다.”
“명분의 문제…….”
“흑도인 우리도 명분에서 아주 자유롭지만은 않다. 산채의 우두머리가 왜 잔혹한 행동을 선보이는 줄 아느냐? 자신의 체면과 위엄을 항상 상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양천이 잔을 비웠다.
여전히 술맛은 텁텁했다.
“백도는 더하다. 특히나 당가의 경우 청성과 아미라는 대문파들 사이에서도 사천의 주인 노릇을 하던 곳이야. 그런 곳이, 거대 병력에 포위당해 내란이 수습되었다고 하면 추후 사람들이 당가를 어찌 생각하겠느냐?”
부선이 한숨을 쉬었다.
“더는 당가를 무서워하지 않겠지요.”
“돈과 정보만이 통치의 전부가 아니다. 한 지역의 패자 노릇을 하는 조직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위엄이 필요하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나아가, 당가는 특별하다. 당씨들은 독과 암기를 쓰지. 세상이 멸시하는 두 개의 무기를 갖고 사천의 패권을 거머쥐었어. 그런 가문이 한 번이라도 무너지면, 사천의 사람들은 더 이상 당씨를 믿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당가가 사천의 성벽 노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사천 사람들이 당가를 무서워하면서도 존중하는 것은, 그들이 절대로 선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선이란 분명하다. 가끔 당씨 사람들이 난동을 부려도, 크게 보았을 때 당가는 언제나 사천 지역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에 앞장서 왔다.
게다가 그 난동 역시 당가 측으로 얘기가 흘러가면, 그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그들의 원칙은 분명하였고, 그것이 사람들이 당가를 두려워하면서도 믿고 따르는 이유였다.
“물론 그 부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아마 사천 사람들은 당가의 혈족들이 내분에 휩싸여도 그로 인해 큰 피해가 없다면 상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보았다. 분명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문제는 그들만으로 당가의 분쟁을 바로잡을 수 있냐는 것이지요. 당가주는 아무 병력도 없이 단독으로 무림맹에 들어갔습니다. 만약 혈족 누군가가 실권을 잡았다면…… 당가주는 가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처단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연 부관이 가지 않았느냐?”
“네?”
양천이 툴툴거렸다.
“알아서들 하게 놔두라 했거늘, 기어이 갔지.”
“……?”
“위험하겠지만, 그 정도 병력으로도 충분히 잘 처리할 것이다. 목숨을 거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 나름의 자신감도 있을 것이다.”
부선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결국, 연 부관의 능력이라면 가능하다는 것이로군요.”
“가능과 불가능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껏 잘해 왔던 연 부관도 실수할 수 있는 법. 무림에서 실수는 종종 목숨의 위협으로 이어지지.”
“하면…….”
“하나 물어보자. 너는 연 부관이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예?”
이런 물음이 어디 있는가?
부선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연 부관만 한 강자는 온 천하를 뒤져도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강하다고 생각하느냐? 무공이 강해서? 단순히 그게 전부일까?”
“……?!”
“네 말마따나 연 부관만 한 강자는 온 천하를 뒤져도 많지 않다. 많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지. 심지어 녀석보다 강한 자들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사부님 말씀은…….”
“그간 녀석이 벌인 일들을 생각해 보거라.”
양천이 잔을 빙빙 돌렸다. 그다지 의미 있는 행동처럼 보이진 않았다.
“무림 출도 후, 시작부터 구주명가를 박살 냈다. 한데 그놈이 어떻게 명가를 박살 냈을꼬? 당당하게 쳐들어가서 가주의 목을 땄을까?”
“……아닙니다.”
“아니지. 연가의 부대 하나가 있었지만, 기실 그 힘도 명가의 전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
“녀석은 아무도 모르는 새에 개방과 모용세가의 원조를 얻어 냈다. 단순히 두 집단의 힘만 빌린 것이 아니라, 두 집단과 작당을 하여 무림맹 소집까지 개최했다.”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뿐이랴? 무림맹에 와서는 멸사군이라는 부대의 대장이 되었어. 정치 단수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모용가주를 제대로 물 먹인 게지. 거기서 끝났느냐? 아니다. 녀석은 실전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애송이들을,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아 정예병으로 탈바꿈시켰다.”
“…….”
“이후 회랑단을 박살 냈고,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서역신녀를 무림맹 의선각주로 데리고 왔다. 중간중간 삼교 놈들을 격파해 낸 것은 물론, 적의 손에 떨어졌던 광동 무림을 되찾은 후 무림맹 대표로 본부에 파견까지 왔어.”
“…….”
“심지어 얼마 전에는 백병신군까지 데리고 왔다. 성천의 강자라는 그 백병신군을.”
이렇게 하나하나 열거해서 들으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부선은 고작 한 사람이, 그 많은 일을 모조리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저 이런 일도 했고 저런 일도 했다는 얘기를 한 번씩 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렇게 쭉 이어서 들으니 확실히 연호정의 진짜 힘은 무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은 패자(霸者)다.”
“……패자.”
“그래, 패자다. 그것도 완성된 패자지.”
“……!”
“무력? 큰 장점이지.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천재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정작 그놈이 성공시켰던 임무들을 보면, 실상 무공은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부선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은 힘으로 이긴다. 힘으로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은 명분으로 이겼다. 명분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은 귀계(鬼計)로 이겼다.”
“…….”
“그리고 귀계로도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는, 인간 본연의 매력으로 이겨 냈다.”
양천이 잔을 채웠다.
“놈은 세상을 뒤흔드는 자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대의 운명을 뒤흔들어 버리는 거인이란 말이다.”
“…….”
“그리고 그만한 힘을 보여 주는 거인은, 성천의 강자 중에서도 몇 없지.”
무시무시한 고평가였다.
무공의 천재니, 전략의 귀재니 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시대를 움직이는 거인이라는 말만큼 엄청난 평가가 스승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놈이 이번 당가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설령 실패하더라도 삼교와 손을 잡은 당가 놈들 대부분이 조만간 지상에서 사라질 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놈도 알게 되겠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올라와 있는지를.”
* * *
“……그렇게 가잔 말이냐?”
“예.”
“제정신이냐?”
“지금 이 병력으로 당가를 치는 것 자체가 미친 짓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만.”
“더 웃기는 것은, 현재 우리는 당가 내에 삼교와 관련된 놈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전부가 그렇다고 가정하고 움직이고는 있습니다만.”
“…….”
“그렇다면 절대 샛길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을 암암리에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어설프게 뒤통수 치려다간 이쪽이 전멸당합니다.”
“…….”
“적의 전장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을 우리의 전장으로 만드는 수밖에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힘으로는 안 되니, 일단 명분부터 잡고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