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90)
590화. 어둠에 가라앉은 자 (1)
“……?!”
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 기파는?’
엄청난 힘이다.
습격자가 나타났다는 외원 쪽에서 일순간 소름이 돋는 기파가 불처럼 일어났다.
찰나지간 번뜩이다가 사라졌지만, 그 찰나에 느낀 기세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당호는 살아생전 이처럼 강렬하고 파멸적인 기파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당여선이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당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석이다, 여선.”
당여선이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혹, 가주님께서도 느끼셨습니까?”
“그래, 느꼈다.”
당호만 느낀 것이 아닐 것이다. 절정고수, 아니 내공심법을 몇 년이라도 수련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느꼈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파였다.
“습격자가 침입한 방향입니다! 그곳에서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당호는 저도 모르게 그리 소리칠 뻔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하는 아들의 모습이, 한순간이지만 꼴 보기가 싫었다.
당호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흑풍대(黑風隊)와 녹의대(綠衣隊)를 파견해라.”
“아, 알겠습니다!”
흑풍대와 녹의대는 당가 내원 소속의 정예 부대였다.
내원의 정예면 당가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었다. 당관에게 보낸 적갈단(赤蠍團)과 호성조(護城組)와 동급이라 할 만한 부대인 것이다.
그들은 당가 최후의 비전인 오대극독 일부와 십대암기 일부를 허가받은 이들이었다. 개개인의 무력도 최고지만, 쥐고 휘두르는 독과 암기 역시 최고급이었다.
당여선이 다시 집무실을 나섰다.
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당관, 네놈은 대체 누굴 부른 것이냐?!”
수장은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수장의 엉덩이가 가벼우면 조직 역시 가벼워진다.
하지만 나서야 할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나서는 배포도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 시기와 때를 아는 것이야말로 수장의 기본 덕목이었다.
안타깝게도 당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설령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한들 전투 부대가 아닌 초절정고수를 보냈어야 했다. 정탐 및 해결을 위해서는 덩치 큰 조직보다 소수 정예가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당호의 한계였다. 십수 년 전부터 타인의 손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그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당연한 행동 원리였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당호가 휘하 무사를 불렀다.
“지금 당장 장로원주를 불러와라.”
“명을 받듭니다.”
잠시 후, 한 명의 노인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당묵을 위시한 장로들의 연배는 오십 대에서 육십 대 사이였지만 이 노인은 달랐다. 칠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외양에, 눈두덩이도 축 늘어져서 눈빛을 읽기 힘들었다.
나이만 보면 전대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전대의 고수가 맞았다. 당관이 임명한 장로원주는 현재 뇌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부르셨소, 가주.”
완벽한 공대는 없었다.
기존의 당가였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가주가 되는 순간, 전대 가주조차 공석에선 가주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당씨 문중의 문화였다.
당호가 빠르게 말했다.
“원주께서도 느끼셨습니까?”
“느꼈소. 어느 누가 느끼지 못했겠소. 한순간이었지만, 그 기파는 정녕 대단한 것이었소.”
“당관이 데리고 온 고수일 확률이 높습니다.”
장로원주, 당향문의 노안(老眼)에 살벌한 기운이 번뜩였다.
“당관…….”
“그렇습니다.”
“휘하 장로들을 보냈다고 들었소만.”
당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장로만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놈을 직접 봐야 할 것 같다고 사정을 하더군요.”
“꼬리를 말았구려.”
“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만, 삼장로와 오장로가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이니 지금쯤 당관도 정상은 아닐 겁니다.”
당향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소.”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당관은 비록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기에 부적합한 성정을 지닌 놈이나, 능력만큼은 당문의 현역 중 최고라 할 만하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한계도 명확합니다. 장로들이 셋이나 갔고 호성조까지 보냈는데, 어찌 멀쩡할 수가…….”
“사장로가 함께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 않았소?”
“…….”
“만약 당관이 다쳤다면, 그 음흉한 놈이 그리만 말하진 않았을 것이오.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자고 했겠지.”
품질 나쁜 생강이라도 확실히 늙으니 맵다. 당향문은 당호보다 더 깊고 넓게 보고 있었다.
“또한, 가주께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놈을 가르친 것이 암왕(暗王)이라는 사실을.”
“……!”
“지금은 사이가 나쁘다고 하나, 암왕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모자라 온갖 시험을 치르고 가주위에 오른 당관의 역량은 가문 역사상 손에 꼽힐 것이오.”
당호의 얼굴에 미약한 불쾌감이 어렸다.
그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당관에 대한 칭찬이 나오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당관은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그저 오만하기만 한 존재였다.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당호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당향문이 말했다.
“빠른 정리를 원한다면 ‘그 물건’을 쓰는 게 좋을 것이오.”
“……!”
당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괜히 당관을 생포한답시고 고수들을 파견했다가는 피해만 커질 것이오. 나아가, 사장로를 돌려보냈다는 것은 당관 역시 지금의 사태를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소?”
“……으음.”
“섣불리 대처하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도 있소. 그럴 바에야 ‘그 물건’을 써서 아예 죽여 버리는 게 낫겠지.”
당호는 알고 있었다. 당향문이 당관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증오와 거리가 있었다. 강력한 무공을 연성했지만, 그 역시 멋들어진 노후를 보내기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끽해야 이삼십 년일까.
상대를 증오해서가 아닌,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과감한 조치를 취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당호는 그런 당향문의 의지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당호가 고개를 저었다.
“당관 이전에 침입자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도 그렇지.”
“원주님께서 직접 나서 주실 것이 아니라면, 휘하 장로들에게 명을 내려 침입자를 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당향문의 눈두덩이가 꿈틀거렸다.
당호가 말을 이었다.
“이미 부대는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요.”
“흐음.”
가만히 당호를 바라보던 당향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번 침입자 건은 장로원에서 처리를 하리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주.”
“말씀하십시오.”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소. 늙은이의 조언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물건’을 사용하여 당관을 죽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오.”
“이해했습니다.”
이해는 했지만, 그 물건을 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당향문은 그런 당호가 답답했다.
하지만 그 성정은 나쁘지 않았다. 당호는 단숨에 가주위를 강탈했지만, 그것은 온전히 그의 능력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당호는 생각보다 우유부단했고, 떠받듦을 받는 걸 좋아했다. 이러한 성정이라면 멋진 노후를 보내는 동안까지는 잘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소. 하면 늙은이는 이만 물러가겠소.”
“그러십시오.”
그렇게 당향문이 집무실을 떠났다.
쾅!
당호가 후려친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감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당호의 얼굴은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뇌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늙은이를 대우해 줬더니, 감히 가주의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는군.”
당장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참으로 몹쓸 늙은이가 아닌가.
당호는 새삼 실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당장은 실권을 다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언제고 때가 되면 무덤으로 보내 버려야 할 사람이 또 한 명 늘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늙은이의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당호가 입술을 매만졌다.
‘그 물건을 쓴다면야 당관은 물론, 상대가 아버지라도 넉넉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문제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다는 것이야.’
‘그 물건’은 오직 가주위에 오른 사람만이 가동할 수 있는 파멸의 병기였다.
당호는 그 병기의 존재를 몇몇 사람에게 알려 주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당가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을 사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모두가 지혜를 모아도, 결정권자가 허가를 내리지 않으면 절대 사용할 수 없다.
‘어떻게 하지.’
당호가 재차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해를 보는 건 이쪽이다.’
당가의 정예 부대가 녹수주루 인근에 주둔 중이다. 제아무리 당가의 내전에 관심이 없다 해도, 이 정도가 되면 당가타 사람들 역시 불안함에 젖을 수밖에 없다.
아니, 불안함에 젖는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 당관이 이 사실을 공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일이 아주 복잡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지?’
그렇게 얼마나 서성였을까.
“가주님!”
집무실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당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녹수주루로 파견된 호성조와 적갈단이 궤멸되었습니다!”
“……!!”
결정의 때가 왔다.
* * *
스르륵.
바위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던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잡스럽구나.”
당가인이 아닌 자의 것으로 느껴지는 기파, 그리고 살기.
다급하게 뿜어져 나오는 독과 암기는 물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이들의 찢어지는 목소리까지.
노인의 눈이 깊어졌다.
“참으로 시끄럽구나. 지금껏 본가에 이토록 소란스러운 일이 터진 적이 있었던가.”
그는 승려도, 도사도 아니었다. 당연히 신통력도 없었고,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대륙에서도 가장 위험한 무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감각은 당가의 전 영역에 닿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으로 오고 있음을.
젊고 생동감 넘치는 활기 속 무극의 경지를 코앞에 둔 천재 무사와, 엄격한 규율 아래 성장한 경험 많은 고수가 오고 있음을.
노인은 잠시 고민했다. 두 사람의 침투를 막아야 하는지, 아니면 놔두어야 하는지.
‘……부질없지.’
어차피 가문에서 잊힌 사람이다. 누가 오고 가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면 그뿐이다.
노인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적합니다그려.”
치리링.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무척이나 청아하게 들렸다.
“동굴 밖 세상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데, 이곳은 조용하기만 하군요. 호젓하니 마음 놓고 지내기가 아주 좋아 보입니다.”
눈을 뜬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누구신가.”
청년,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 유군 부대 좌장 연호정이 당가의 전대 가주님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