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596)
596화. 명명백백 (2)
“……!!”
당호의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가주님.”
당여선의 얼굴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로 인해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요? 당관이 벌써 내원 안으로 들어와…….”
“시끄럽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무시무시한 내공이 깃들었다. 당여선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당호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것들이 감히!”
믿을 만한 놈들이라고 생각해 명령을 내렸건만, 어째 제대로 처리된 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당관이 가문에 도착했음을 안 것도, 이미 놈이 외원을 가로질러 내원 가까이 다다랐을 때였다.
정보력의 부재로 인한 결과였다. 어지간한 정보원들을 사천 전역에 흩뿌린 상황이라, 실질적으로 가문 내에 남은 정보력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보고가 너무 늦었다.
파견한 병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하고, 녹수주루에 있던 당관은 내원까지 도달했다.
장로들을 잃은 건 아깝지 않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한 즉시 전력을 상실했다는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기실, 그 모든 것은 당호의 오판 때문이었다.
물론 연호정 일행의 실력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그러나 당호가 제때 밖으로 나가 돌아가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알아내고 판단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아마 당관은 내원으로 들어올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패율에게는 이미 장로원의 고수들이 따라붙었을 것이고, 흑풍대와 녹의대는 우왕좌왕하지 않은 채 내원을 단단히 수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작 몇 번의 오판만으로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 버린 것, 지금 당호는 수장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스스로 반면교사가 되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당호라도, 순식간에 이만큼이나 밀려 버리면 능동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선.”
“예, 가주님.”
“이걸 받아라.”
당호에게 받은 단검을 본 당여선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가, 가주님?!”
당호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가서 귀문(鬼門)을 열어라.”
귀문.
그것은 당씨 문중의 주인만 아는 최고의 무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귀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은근히 많았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소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여선이 놀라는 것이다. 귀문을 연다는 것은 곧, 당가가 전쟁에 참여했다는 뜻이 되니까.
“가주님.”
“당장 가서 열지 못해!”
당여선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가는 당여선의 얼굴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한나절은커녕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서 평화롭던 당가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차기 가주가 되는 꿈을 꿨다. 재능 없는 당양선을 대신해 자신이 당가의 실권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장밋빛 미래를 건설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본가가 이 정도로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단 말인가?’
당가의 힘은 대단하다.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 당가의 전력은 사천 제일을 논한다.
하지만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당관은 내원까지 들어왔고, 파견한 병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여선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왜?!’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당호가 못 보는 것을 당여선이라고 제대로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오판도 오판이지만, 그들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습격자의 무력이나 행동, 개방의 정보 교란으로 인한 비상사태 등을 떠나서 단 한 명이 이룩한 역사를 지나치게 무시했다.
당관.
당씨 문중 역사상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 가주가 된 사천의 패자.
강력한 믿음을 주지는 못했을지언정, 당관이 통치했던 지난날의 당가는 분명 전성기라 할 만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전성기를 이끈 당관을 두려워하면서도 공경하였다.
나아가, 그는 전대 가주와 노고수들의 개입마저도 단호하게 봉쇄한 최초의 가주이기도 했다.
즉, 지금의 당가는 당관의 명령에 철두철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제련된 새로운 세대의 당가다.
고수 관리, 부대 위치, 정보 흐름, 내부 진법의 가동 시기 등등 모든 것을 당관이 관리하였다. 전대 가주 당형이 살던 시기와는 판이하다.
그러한 판을 하나도 주무르지 않은 채, 공석이 된 주인 자리를 냉큼 차지한 당호가 가문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문 내의 정보원들에게 확실한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도, 고수들이 우왕좌왕하는 것도, 불필요한 곳에 정예 부대를 보낸 것도 전부 당호의 잘못이다.
오로지 욕망에만 눈이 멀어 주변을 돌보지 않은 자.
공석에 앉아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스로 가주라 떠들어도, 이 위대한 가문을 제대로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여선의 얼굴에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되었다.
‘귀문을 열면 달라질 것이다.’
당관이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귀문의 병력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당관만 잡으면 돼. 당관만!’
당여선의 믿음은 맹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당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쾅!
벽이 남아나질 않겠다.
단단한 돌벽에 주먹 자국을 낸 당호가 싸늘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감히 내원까지 기어들어 와? 건방진! 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구나.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귀문의 악마들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태는 복잡했지만, 결국 당관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당관이 죽으면 된다.
당관만 죽으면 당씨 문중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를 따르던 이들 역시 잘 다독이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호는 정녕 그리 믿고 있었다.
그때였다.
“일이 커졌군.”
깜짝 놀란 당호가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하얀 가면을 쓴 누군가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발목까지 덮을 정도로 펑퍼짐한 피풍의를 걸쳤는데, 마치 어둠 속에 하얀 얼굴만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섬뜩했다.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된 당가의 주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묘한 목소리였다.
들릴 듯 말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분명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의 미세한 발음 변화까지 전부 들렸다.
당호가 침을 삼켰다.
“당신…… 언제 여기에 온 거요?”
“조금 전에.”
“……!”
“가관이더군. 귀문까지 연다고?”
“그렇소.”
“귀문을 연다…… 그 정도면 제아무리 당관이라도 버틸 수 없겠지. 하지만 귀문의 악마 중 반절은 목숨을 잃을 텐데?”
“그렇지도 않을 것일뿐더러, 이것은 본가의 일이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오.”
훅!
순간 당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느새 괴인이 자신의 코앞에서 하얀 가면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관할 바가 아니다?”
“…….”
“이봐, 당호. 그건 너무 섭섭한 말이지 않나? 그리도 원하던 가주 자리에 앉았다고, 십오 년 전부터 자네를 지원했던 이가 누구인지 벌써 잊었어?”
“…….”
“자네의 그 지독한 욕망이 현실로 바뀔 수 있음을 인지시켜 준 사람이 누구지?”
“…….”
“당관의 치세 속에서도, 그 독한 정보원들의 눈을 피해 조직의 고수들을 키울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지?”
“…….”
“청성과 아미의 콧대 높은 놈들에게 욕망을 안겨 준 사람은? 낙원소의 기반을 만들어 준 사람은 또 누구지?”
당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당신은 아니지.”
“오호?”
“당신이 아니라 당신네들 아니오? 당신은 그저 상부에서 받은 돈을 건네준 것에 불과할 뿐이오.”
하얀 가면 속에선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르륵.
당호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런 무늬도 없이, 두 눈에 반달 형태의 구멍만 뻥 뚫린 가면은 다시 봐도 소름이 돋았다.
“……틀린 말은 아니야.”
가면을 쓴 남자, 백면인(白面人)이 몸을 뒤로 뺐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뭐, 달라질 게 있나?”
“달라지는 게 있지. 당신들이 나를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그것은 당신들 역시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오?”
“…….”
“상부상조. 그것이 우리의 관계요.”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군.”
백면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섬뜩한 복장이었지만, 언행은 묘하게 가벼운 자였다.
“그래, 자네가 말한 것처럼 상부상조를 원했지. 그래서 십오 년 동안 자네를 도운 거야. 한데 정작 우리가 받아먹을 상은 아직 차려지지도 않았는데 자네가 무너지게 생겼잖아?”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네. 나도 천 년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게 되겠나?”
“…….”
“그리고 자네는 중요한 걸 잊고 있어. 당관을 제외한 침입자가 하나만 존재할 거라는 보장이 없잖나?”
“……?!”
“느껴지지 않나? 저 멀리서, 한 줄기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거대한 화기(火氣)가?”
당호가 고개를 돌렸다.
기감을 확장하니, 정말로 엄청난 화기가 느껴졌다.
그 화기의 농도는 지금껏 그가 본 적이 없는 수준이었다. 당가의 화기가 폭발하는 순간의 화력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화기가 지속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 이럴 수가!’
이 정도로 압도적인 화기가 넘실거리고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급박해진 현실과 당관이라는 존재에 완전히 몰입해 버린 탓에, 이 정도로 거대한 화기를 내뿜는 존재의 출현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호가 백면인을 돌아보았다.
“설마 당신들……?!”
“신화? 아니지. 아니야. 그 불장난하기 좋아하는 놈들이 뿜는 화기와는 근본적으로 질이 달라. 하물며 본교가 행사하는 일인데, 신화가 우리 밥상을 엎으려 들겠나?”
“그럼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누구겠나? 당대 천하에 신화교 녀석들을 제외하고 저만큼의 화력을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이.”
“……?!”
“연호정이라는 놈이다.”
당호가 입을 쩍 벌렸다.
“여, 연호정은 분명……!”
“느닷없이 당관이 나타난 순간 깨달았어야지. 자네가 받은 모든 정보가 교란되어 있었다는 걸.”
“……!!”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애초에 국면을 잘못 보고 있었다. 당호는 자신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물며 자신이 이곳에 있는데도!
“그간 당관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없었나 보군. 자네는 이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휘하 사람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줄 줄 알았나?”
당호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업자조차도 당관이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정말이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도와줄까?”
조곤조곤한 백면인의 음성은 그야말로 뱀을 연상케 했다.
“도와주지. 내 거래에 응한다면.”
“……무슨?”
백면인은 거래 내용을 말했다.
당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썩 꺼지시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백면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내 지켜보겠어. 정 위험하다 싶은 순간 말해. 거래를 하겠다고. 너의 목소리가 크든 작든, 내 귀에는 분명히 들릴 테니까.”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선 백면인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기에서 전장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독한 피 냄새도.
“좋은 냄새다. 광기가 묻어 있어.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광혈(狂血)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