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09)
609화. 문제의 중심 (4)
“헉헉!”
사자소혼진에서 빠져나온 당호는 무릎에 손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지나도 호흡이 정돈되질 않았다. 내부로 파고든 독기가 지속적으로 내상을 유발하는 것이다. 도반삼양귀원공의 힘으로도 독기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당호가 일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빌어먹을! 이런 개 같은 새끼!”
쾅! 쾅!
신경질적인 발길질에 대지가 신음했다.
“헉! 헉!”
몇 번이나 대지를 찍어 밟은 당호가 이내 허리를 폈다.
“이럴 때가 아니야.”
그와의 거래는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부득불 계약을 맺었지만, 당호는 그것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계약자만 죽으면 파기될 구두 계약이 아니던가.
‘모조리 쓸어 버려 주마.’
이제는 때가 되었다.
내 삶의 터전,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당가가 폐허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어차피 당가의 모든 무공과 기관술, 진법 등의 사본을 빼돌린 상태였다.
거기에 낙원소에서 벌어들인 금액까지.
어디서든 새 출발을 하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품에서 내상약을 꺼내 먹은 당호는 재빨리 가주전 후원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
당호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뭐지?’
스멀스멀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
어딘지 모르게 친근하면서도 섬뜩하다.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이 기운은 공기 중에 녹아 당가 전체의 분위기를 심해처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당호가 고개를 돌렸다.
쿠르르릉!
대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던 은밀한 사기(死氣)가 씻은 듯 사라졌다.
“……!!”
당호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사자소혼진?!”
시간이 없어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가주전 앞의 반쪽짜리 진이 아니었다.
진짜 사자소혼진이다. 저 방향에 미리 깔아 둔 사자소혼진은 귀문 역사상 최대의 범위로, 그 안에 들어온 것은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트리는 파괴의 진법이었다.
그 진법이, 출입자를 난도질해야 할 진법이 거대한 힘의 발산으로 인해 그대로 소멸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조금 전, 당관의 손에 목숨을 잃기 직전에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진 않았다.
사아아아아아.
안개가 퍼지는 데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와 같은 소리가 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먹구름이 사자소혼진이 무너진 곳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어느 하나의 특징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가가 자랑하는 독기(毒氣), 사천의 대지에서 올라오는 양기(陽氣), 일조량 적은 사천의 기후가 자아내는 습기(濕氣), 치명적인 살기(殺氣)는 물론 감당키 어려운 위기(威氣)까지.
이곳 사천 땅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기운이 집약된 힘이었다. 그 힘이 당가를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잠식해 가고 있었다.
“아, 암왕!”
진(眞) 사자소혼진은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실제로 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던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보험은 단 한 명의 전진을 막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암왕 당형.
성천십삼좌 중 신선제왕(神仙帝王)에 이름을 올린 사천 최강의 무신(武神)을 제어하기 위한 진법.
그런 진법이 깨지고, 비로소 오랫동안 스스로를 유폐해 왔던 전설적인 무인이 기지개를 켠 것이다.
파아아악!
당호는 가주전 후원을 향해 달렸다.
안 그래도 심화되던 내상이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더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내상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암왕이 나타났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것을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단 한 명의 절대자가 깨어난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당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통성? 진실? 거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허억! 허억!”
호흡에서 쇳소리가 묻어 나왔다. 그래도 당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후원에 도착한 당호, 그 앞에서 당여선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버지?”
“비켜라!”
퍼엉!
당여선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당호의 거친 주먹에 맞아 튕겨 나간 것이다.
제 자식을 내공까지 담아 후려쳤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다.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비를 보는 자식.
당호는 당여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후원의 작은 창고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당호의 양팔에는 연혈비갑과 똑같이 생긴, 그러나 시커멓게 물든 비갑이 채워져 있었다.
흐트러진 의복 사이로는 은빛 비늘이 번뜩였으며, 어두운 연녹색 장포는 움직임에 따라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당여선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아, 아버지?!”
당호의 양팔에 장착된 비갑, 그리고 은빛 비늘이 번뜩이는 내의와 신비로운 연녹색 장포.
당여선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껏 몰랐지만, 아버지가 가주위에 오르고 나서 그 용도를 들었다.
그래서 경악했다. 저 물건들은 가문이 멸망의 위기에 접어들기 전에는 결코 꺼내선 안 될 것들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있었다.
“따라와라!”
“예, 예?!”
“지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난다! 도망쳐야 해!”
도망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당여선은 당황하여 물었다.
“아버지! 대체 뭣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당호가 버럭 소리쳤다.
“묻지 말고 움직여라! 따라오지 않으면 버리고 갈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당호가 후원을 벗어났다.
“…….”
당여선의 얼굴에 허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따라오지 않으면 버리고 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자식을 버리고 가겠다니?
멀어져 가는 당호의 등을 보던 당여선이 일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아버지! 같이 가요!”
파앙!
당여선이 재빨리 당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내상이 심하다 한들 당호는 초절정고수다. 당여선의 신법으로는 그를 제대로 쫓을 수가 없었다.
당호는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위요, 쌓아 놓은 모든 것이었다.
일생을 바쳐 쌓아 올린 탑이 한순간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판국에 고작 자식놈 하나 챙기려고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어딜 가느냐?”
“헉!!”
깜짝 놀란 당호가 신법을 멈추었다.
콰앙!
속도를 이기지 못한 당호가 내원 성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의 몸에 들이받힌 성벽이 움푹 파였다.
당호는 충격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뭐야? 어디 있어?!’
없다.
귓가에 대고 말한 것처럼 선명했던 목소리, 그 주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당호는 당혹스러웠다.
‘착각이었나?’
하지만 착각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허억! 허억! 아, 아버지!”
그제야 당여선이 당호의 이십 장 안쪽으로 들어왔다. 호흡이 격해질 정도로 달려왔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호가 이를 악물었다.
‘환청이겠지.’
보이지 않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당호는 다시 힘차게 신법을 펼쳐 내원의 벽을 넘으려 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성벽을 넘는 순간 너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스륵!
성벽 끝을 밟고 나아가려던 당호가 움찔했다.
주르륵.
당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시야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야.’
이 목소리, 이 위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에게 말을 건 누군가는 귀신이 아니었다.
‘설마?’
그때,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와라.”
오싹!
“도망이 헛수고라는 것쯤은, 너도 잘 알 것이다.”
당호는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욕설이나 죽이겠다는 등의 험한 소리는 일절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거친 언어보다도 백 배는 더한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였다.
‘보고 있다.’
성벽 위에 올린 양손이 의지에 상관없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내 움직임을 보고 있어.’
전설상의 천리안(千里眼)이라도 익힌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곳 당가 내에서, 이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라는 것이다.
스르륵. 툭.
당호가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물론 내원 안쪽이었다.
당여선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아버지?”
“너는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예?”
“역시, 그랬어.”
당호가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쾅! 쾅!
신경질적으로 땅을 밟는 당호의 모습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뜬금없이.
그간 자신이 쌓은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했다.
“으아아아!”
하늘을 보며 포효하는 당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리하면 정말 끝장이 날 것 같은 두려움에 나갈 수가 없었다. 당관의 경고나 엄포와는 차원이 달랐다.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던 당호는 이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귀문의 노괴들이 다 당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사자소혼진까지 박살 났다면, 암왕이 자신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여선.”
“……예.”
“천뢰(天雷)를 가동해라.”
당호가 양팔의 연묵비갑을 두들겼다.
“결국, 이 지긋지긋한 천륜에서 벗어나려면 다 죽여 버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구나.”
* * *
“쿨럭!”
동쪽을 바라보던 당형이 고개를 돌려 당충호를 내려다보았다.
당충호는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토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왜소했던 그의 몸이 더욱 작아 보였다.
“상당하군.”
당형이 피식 웃었다.
“마룡호포(魔龍呼砲)를 뒤집어쓰고도 죽지 않았다니. 귀문 안에서도 나름대로 수련에 힘을 썼다 이건가.”
스르륵.
입가의 피를 닦아 낸 당충호가 당형을 올려다보았다.
당형의 눈이 빛났다. 다 죽어 가는 당충호의 눈빛에서 허탈함과 분노보다는 조소에 가까운 감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전입미답의 경지에 올랐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충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여 구가 넘는 시체가 땅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 모두가 귀문의 고수들이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고도의 은신술을 배운 이들이지만, 당형의 압도적인 기공파 일초에 모두 드러누워 버렸다.
당충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귀문에는 사자소혼진 말고도 여러 진법과 기관술, 그리고 독과 암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당형은 발길질 몇 번으로 사자소혼진을 무너트렸고, 기공파 일격으로 이 많은 고수를 몽땅 중독시켜 죽여 버렸다.
통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이리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거늘.”
“주는 만큼 돌려받는 경우는 많지 않지.”
“그래, 알고는 있었느니라.”
당충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는 네놈도 정상은 아니구나.”
“…….”
“그 무공,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정상이 아니야. 내 눈에는 네놈의 남은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당형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유언은?”
가만히 당형을 보던 당충호가 껄껄껄 웃었다.
“지옥에서 보자꾸나, 이 망할 조카 놈아!!”
퍼어어어엉!
당충호의 몸이 폭발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
흩어진 시체 조각들을 내려다보던 당형은 잠시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흑풍, 녹의.”
“예!”
우우우웅.
색이 바랬던 금천신안이 다시금 신비로운 빛을 뿜어냈다.
“둘째가 문제가 아니야. 본가에 들어와서는 안 될 마인들이 발을 들였다.”
“……?!”
“나는 둘째에게 갈 것이다. 너희는…….”
순간 당형의 눈이 수십 명의 사람을 훑었다.
그의 신안(神眼), 아니 기안(氣眼)이 마지막으로 포착한 사람은 바로 쌍도끼를 든 젊은 청년이었다.
“너희는 무림맹 유군 부대 수장과 함께 마인들을 몰아내라.”
훅!
당형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