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20)
620화. 끝이 없음이라 (2)
“…….”
바둑돌을 쥔 양천의 손이 멈추었다.
백서가 의아한 얼굴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부주님?”
바둑을 둘 때 양천은 단 한 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장고는 하되, 돌을 잡으면 거침이 없다. 그러한 습관은 양천의 성격과 닿아 있었다.
지금처럼 바둑판 위에 돌을 놓으려다가 멈칫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스륵.
양천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르르릉.
어제부터 호남의 하늘이 영 어두웠다. 먹구름도 많았고, 날도 습했더랬다.
쿠릉. 쿠르릉.
“……천둥인가.”
마치 하늘이 성을 내는 듯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왜일까?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한 것이 묘한 기분이로다.”
백서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혹, 옥체에 무리가 가신 것은 아닌지요.”
과거 사음교주와의 일전으로 오랫동안 내상을 입고 있었던 양천이었다.
연호정 덕분에 내상을 고쳤지만, 충성심 깊은 백서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모르고 있었다면 주군을 잃었을 것 아닌가.
양천이 피식 웃었다.
“무리가 가기는. 오히려 나날이 힘이 넘치는데.”
“다행입니다.”
“내 몸은 걱정하지 마시게나. 앞으로 백 년은 더 살 몸뚱이야. 세상 한번 손에 넣어 보겠다고 이 난리를 쳤는데, 억울해서라도 아프면 안 되지.”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음, 한데…….”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기분이 정말 묘하군. 좋은 것 같으면서도 영 찝찝해.”
“날이 습한 것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긴 합니다. 이만 마치고 부로 돌아가심이 어떠신지요?”
“어허, 이 사람. 이 경치 좋은 봉우리에 올라서 신선놀음 좀 해 보겠다는데 벌써 가자고?”
“하지만…….”
“비가 오면 맞으면서 두면 되지. 빗물에 고뿔이 들 정도로 연약한 사람들은 아니잖나, 우리?”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딱.
양천이 돌을 놓았다.
“자, 다음 수 두시게나. 만만치 않을 것이야.”
“과연 묘수입니다.”
백서가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한옆에 차려진 술상에서 잔을 들어 올린 양천은,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따라 이동하는 먹구름. 그 움직임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다. 자리를 잘 잡아 이쪽으로는 바람이 불지 않지만, 필시 저 하늘에서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센 강풍이 불고 있을 것이다.
먹구름이 향하는 방향은 서쪽이었다.
“……귀주인가? 아니면 사천인가.”
* * *
티이이이잉!
현 하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
끊어질 금줄을 보는 눈매는 무척 아름다웠다. 봉목(鳳目)이라는 수식어가 그리도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쿠르르르릉.
하늘 저편에서 은은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였다. 음(音)을 다루는 사람이기에 소리의 미세한 차이도 잡아낼 수 있다. 그녀에게는 누구보다도 예민한 귀가 있었다.
“하늘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눈매만큼이나 곱고 아름다웠다.
“아파하는 것 같구나.”
“네?”
“천둥소리 말이다.”
“아, 네.”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금줄이 끊어졌네요. 오래되어서 그런가 봐요. 제가 금방…….”
“아니다. 내 잘못이다.”
“……네?”
“힘 조절을 못 했구나. 역시 나도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어.”
여인은 스승의 말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스승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예인(藝人)이었다. 동시에 이 드넓은 천하에서 열셋, 아니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무림인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이 미숙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겸손이 과한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스승의 겸손을 배우려 하였다. 이토록 높은 위치에 도달한 무인이자 예인도 스스로를 낮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차 한 잔 새로 드릴까요?”
“그래, 부탁하마.”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상을 들고 나갔다.
여인이 나가자, 금의 주인이 다시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르르르릉.
기다렸다는 듯 울려 퍼지는 천둥.
금의 주인이 탄식했다.
“마치 산고를 겪는 어미와 같구나. 무엇을 낳기 위해 저리도 신음하는고.”
번쩍!
그때, 한 줄기 벼락이 서남쪽 인근에 내리꽂혔다.
금의 주인이 미소를 지었다.
도통 웃을 날 일이 없는 요즘, 희한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벼락을 낳으려고 그리도 애를 썼구나.”
* * *
퍼퍼퍼퍼펑!
건물 몇 채도 통째로 밀어 버릴 것 같은 거대한 참격이 일순간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
뭘까, 이 맑고 쾌적한 공기는.
후우우웅.
뜨겁게 과열되었던 공기가 한순간 차가워졌다가 이내 선선하게 바뀌었다.
후웅. 후우웅. 후우웅.
기묘한 바람이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딱딱했고 묵직했다. 기분 좋은 서늘함을 품고 있다가도, 가만히 맞고 있으면 어느새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서방금신(西方金神), 백(白)이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부드럽고 가벼웠다. 휘날리는 꽃잎을 다리 삼아 전해져 오는 바람, 따뜻함에 미소를 짓고 있자면 결코 잡을 수 없는 매정함으로 육신을 지나쳐 흘러 나간다.
동방목신(東方木神), 청(靑)이다.
반면 남쪽에서 솟구치는 바람은 몹시 뜨거웠으되 질풍처럼 빨랐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열풍. 살갗을 다 태워 버릴 것처럼 사나웠지만, 어쩐지 그 바람에 몸을 싣고 싶은 마력이 있었다.
남천화신(南天火神), 홍(紅)이다.
나아가 북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은 지극히 투명하면서도 산처럼 무거웠다. 지극한 무게감에 나 자신이 휩쓸릴 것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든든함이 느껴지는 철벽의 마력이 있었다.
북천수신(北天水神), 흑(黑)이다.
서방과 동방, 남천과 북천.
세상이 불합리하기에 신은 나아가야 할 길의 지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지표에, 천하인(天下人) 모두의 염원을 담아 대적 불가의 신수(神獸)를 두어 방위를 지키게 하였다.
방위란 곧 나아가야 할 길이고, 나아가야 할 길을 지키는 신수는 곧 천하를 지키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생명이 나아가야 할 길, 나아가 천하의 이치가 향하는 길.
그리고 그 신들이 바라보는 곳 중앙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이이이이잉! 화아아악!!
고속으로 회전하는 하나의 단(丹)은, 한 생명체의 몸으로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양의 내공을 발산해 내고 있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형언 불가다.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이미 수십 바퀴를 돈다. 말 그대로 찰나의 시간 속에서도 어떤 물질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위이이이잉!!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소음에 가까운 소리도 커져만 간다.
치이이익!!
회전하며 일어나는 열은 그 힘을 품은 사람의 몸에 엄청난 수증기를 일으켰다.
‘위험해.’
주인은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남천화신의 힘으로 열기를 제어하고, 북천화신의 힘으로 체내 수분량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방금신의 힘으로 근골을 튼튼히 하고, 동방금신의 힘으로 근골에 강한 탄력을 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하다. 유례없는 속도로 회전하는 신단은 시시각각 거대한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금강체(金剛體)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방법이 있나.’
있다.
육신이 무너지지 않는 길, 이 회전을 멈추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회전이 멈춘다면 힘의 발산도 멈출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늘로 비상할 사신기(四神氣)도 다시 이 육신에 묶일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만물의 주인은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 싸움 도중임을. 시간과 시간을 쪼갠 그 미지의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 이 영역이 깨진다면 그 즉시 감당키 어려운 적과 다시 싸워야 할 것임을.
이 힘을 포기하고 싸우면 어차피 죽는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겠지만, 근본적인 힘의 격차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대로 가야 한다. 이 힘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 힘을 토대로, 지난날 천하에 흑암의 전운(戰雲)을 드리웠던 패왕(霸王)의 거성으로 스스로를 이끌어야 했다.
힘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까? 죽지 않으면서, 지난날 나 자신이 이룩했던 위대한 영역으로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을까?
‘있다.’
그렇다. 그럴 수 있다.
위험하기 그지없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도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 자신을 빛으로 이끌 수 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
‘오대신공.’
신단을 이루는 신공은 총 네 가지였다.
벽라진결, 용포신공, 검극사기, 신장기.
신공이 하나씩 더해질수록 신단의 밀도는 높아졌고, 기운의 가닥은 지극히 얇아졌다. 얇아진 대신 그 다발이 몇 배나 더 많아졌다.
더 강해짐과 동시에 섬세한 운용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은 깨닫는다.
지금 신단의 진기 다발로는 이 회전하는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이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훨씬 더 많은 다발을 가진, 그 모든 힘을 지금과 같은 크기로 응축시킨 빛(光)과 같은 신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깨달은 순간.
주인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나머지 하나의 무공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환정심공(環淨心功).’
환정심공은 오대신공 중 가장 부드럽고 차분한 무공이었다.
위력적인 힘을 내진 못하지만, 진기가 끊이질 않고 언제나 심신을 보호하며 기운 자체가 지혜롭고 풍요롭다.
척박한 강호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환정심공만 연성한 연가인은 없었다. 하지만 환정심공 역시 극에 이르면, 검극사기의 극치를 본 연위처럼 다른 모든 신공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다르지만 같다. 같지만 다르다.
벽라, 용포, 검극, 신장 그리고 환정.
연가 무공의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져 연가 무공 최고의 비기라는 연가신단(燕家神丹)을 완성, 비로소 신단의 극치라는 광명신단(光明神丹)을 형성한다.
광명신단으로 화한 진기의 덩어리는, 그렇지 않아도 빠른 회전 속도를 열 배나 가속시켰다.
번쩍!
광속(光速)이었다. 회전하는 속도가 마침내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며, 발산하는 초거대 질량의 힘을 수렴하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번뜩이는 빛은 그 자체로 무기나 다를 바 없었다.
“큭!”
육사제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환한 빛이었다. 마치 하늘 높이 뜬 태양을 지상 아래로 끌어당긴 듯, 엄청난 열과 빛이 이 영역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익!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미친 듯이 일렁거리며 미세하게 산화되었다.
마기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산화되고 있다. 그 말인즉 육사제장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 더 빠르게 스러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육사제장은 자신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조차 잊었다.
‘이건…….’
절로 입술을 깨물게 된다. 반쯤 뜯겨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씹으면서도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콰르르릉! 콰르르르릉!!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뿜는 연호정의 몸에서 사색의 신수(神獸)가 날아올랐다.
비유나 환시가 아니라 실재였다. 진기로 이루어진 사신(四神)의 신수들이 깨어진 봉인 앞에 환희 가득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저 하늘의 빛을 빼앗아 스스로를 완성한 또 하나의 절대자 위.
빛을 잃은 하늘은 어둡고도 어두웠다.
흑암의 하늘, 그 아래 빛나는 제왕이 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번쩍!
그리고 흑암제(黑暗帝)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