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3)
63화. 벽산의 장자 (3)
“헉!”
“뭐, 뭐야? 호랑이?!”
느닷없이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포효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분명 호랑이의 포효였다.
한데 그 포효가 커도 너무 컸다. 마치 천둥소리처럼 사방천지로 뻗어 나가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개봉의 중심가를 오가던 사람들 절반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호랑이, 호랑이다!”
“피, 피해!”
“으아악! 비켜!”
소동이 급속도로 커졌다. 어느 시대나 호환(虎患)은 마마(媽媽)만큼이나 무서운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일순간 거리가 난장판이 되었다. 장사치들은 서둘러 문을 닫았고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대숲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임에도 그런 소동이 났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포효였다.
‘아니야.’
그러나, 개봉의 한 고급스러운 주루 최상층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청년은 이 포효가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호랑이 따위가 아니다.’
청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런 기(氣)가?!’
터져 나오는 소리에 굉장한 기가 실려 있었다.
일찍이 이런 기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무한의 광기와 신비로운 위엄이 공존하고 있었다.
범의 포효를 닮은 소리. 그러나 호포(虎咆)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감.
‘숙부?!’
확실했다. 이 기(氣)의 근원지는 호명전을 이끈 숙부께서 향하신 대숲에서부터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숙부든 호명전의 무사들이든, 이런 기를 풍기진 않는다.
팍!
청년이 창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꽝!
흉맹한 일격을 받아 낸 명치산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이런!’
명치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쓰러진 호명전 무사들의 안색은 그보다 더했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심지어 그중엔 거품을 무는 무사도 있었다. 코앞에서 터진 무지막지한 포효에 정신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쏴아아아아!
바람이 점점 거세어졌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대숲에 강풍이 불어닥쳤다. 올곧게 선 대나무 수십 그루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연신 휘청거렸다.
주르륵.
명치산은 떨리는 눈으로 칼자루를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호구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명가의 동천공(東天功)으로 보호받던 손이 이번 일격의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무시무시하구나.’
갑작스럽게 증폭된 힘.
명치산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잉!!
고개를 숙이고 선 연호정 주변으로 광풍(狂風)이 불어닥쳤다.
광풍이며 돌풍이다. 바닥에 깔린 댓잎이 연호정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육안으로 보일 리 없는 그 바람은, 어쩐지 새하얀 빛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훕!”
숨을 크게 들이쉰 연호정의 몸 전체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연호정의 얼굴에 희열이 깃들었다.
‘됐다.’
들이켠 숨에 이전보다 훨씬 더 풍성한 기(氣)가 깃들었다.
폐장(肺臟) 능력이 급속도로 활발해졌다. 지독한 수련으로 향상되었던 심폐력이 이상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폐만 따로 환골탈태한 것 같았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해진 폐는 한 줌의 숨으로도 십 리를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느끼게 했다.
위이이이잉!
폐가 하얀 진기로 가득 찼다.
‘백호기(白虎氣)!’
백호.
사신(四神)의 백호는 경인(庚寅)의 금신(金神)으로 가을을 상징한다. 오장육부 중 폐를 담당하며, 신체의 강건함을 유지한다.
현무와는 달랐다. 현무가 탁기를 배설해 낸다면, 백호는 폐로 받아들이는 기를 극대화하여 전신으로 퍼트린다.
우둑! 우두둑!
근골이 바뀌는 듯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않으면 골육(骨肉)이 상한다. 반대로 호흡이 활발해지면 골육의 질이 상승한다.
그것이 바로 백호였다. 극한의 체력과 왕성한 호흡으로 공격과 전진을 추구했다.
연호정이 육체 단련을 그리 지독하게 한 이유였다. 백호기는 신체 기반이 탄탄하지 않으면 불러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서천(西天)의 수호신. 바람의 지배자.
서방대제(西方大帝) 백호의 발현이었다.
“놈!”
명치산이 호통을 쳤다.
“그 무슨 사공(邪功)이냐!”
터어엉!
땅을 박찬 명치산이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에게서 빈틈을 본 것이다.
쾅!
명치산의 눈이 커졌다.
땅을 박차고, 다음 발을 내딛는 그때 이미 연호정이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대지를 통해 전달되는 진각의 힘이 태산이라도 뒤흔들 듯 엄청났다.
연호정의 도끼가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쩌엉!
“큭!”
괴력이다.
종전과는 전혀 다른 힘이었다. 힘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강한 압력에 뒤로 밀린 명치산은 서둘러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늦었다.
쾅! 쾅!
무서운 전진이었다.
발로 대지를 찍어 가며 전진한다. 폭발적인 체력에 위압감 넘치는 기세였다. 마치 한 마리 대호가 뛰어드는 듯 위험천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연호정의 무(武)였다. 흑암제 시절, 파멸적인 공격력과 후퇴 없는 전투력으로 악명을 떨쳤던 흑암제의 무공이었다.
푸른 기운으로 물들었던 그의 도끼에 어느새 새하얀 백호기(白虎氣)가 스며들었다.
쩌엉! 쩌어엉!
일타, 일타가 무지막지한 충격파를 생성해 냈다. 명치산의 박도가 부러질 듯 휘어지길 반복했다.
‘너무 강해!’
철부에서 뿜어지는 기가 파도처럼 격렬했다.
이건 뭐 감당이 되질 않는다. 도끼가 일으키는 폭풍 같은 경력이 천지를 휩쓸어 버릴 듯했다.
쾅! 터어엉!
게다가 저 보법.
회피나 반격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전진, 또 전진이다. 게다가 진각의 힘을 극대화하여 도끼의 힘을 두 배, 세 배로 증폭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빛에 생기가 되살아났다.
‘좋아.’
백호의 보법, 백호군림보(白虎君臨步).
현무의 괴주부동(怪柱不動)과는 궤를 달리한다. 백호의 무공에 후퇴나 방어는 없었다.
그리고 병장기술까지.
쩌저저정! 쾅!
“커헉!”
기어이 명치산의 입에서 비명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무공이지?!’
창술도 아니고, 도법도 아니다.
한데도 강했다. 저 괴상한 바람을 불러오기 전에 구사했던 무공보다 훨씬 강하고, 훨씬 정교했으며, 훨씬 포악했다.
백호군림보로 힘을 받아 터트리는 호왕구벽세(虎王九霹勢)였다. 야수창법의 근간이 된, 그러나 야수창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초고차원적인 공격형 무공이었다.
콰직! 콰드득! 퍼어엉!
명치산이 연신 뒤로 물러났다.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사방천지에서 불어오는 광풍이 신체의 자유를 억압했다. 와중에 멈추지 않는 황소처럼 전진하니 계속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밀릴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반격 한 번 못 해 보고 도끼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명치산이 포효했다.
“으아아!”
콰앙!
연호정의 도끼가 주춤했다.
동천공으로 펼치는 천관신도(千觀神刀)의 비기였다. 짧은 순간, 용케도 비기를 구사해 위험에서 벗어나는 그였다.
“이놈!”
공격에서 벗어났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다. 명치산의 칼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파아아앙!
빠르고 격렬한 천관신도가 연호정의 전신을 향해 짓쳐 들었다.
워낙에 빠르고 난폭한 도법이었다. 끌어오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백호기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쉽게 막아 내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 순간, 현무기가 튀어나왔다.
우웅! 쩌저저정!
“큭!”
명치산은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 뭐야?!’
청백색 바람을 불러오던 연호정의 몸에서 어두운 흑청(黑靑)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무적의 방어, 북천십이벽(北天十二壁)이었다. 폭발적인 공격에 이은 절대의 방어였다.
백호는 임전(臨戰) 시 전진과 공격을 담당한다.
현무는 철옹성과 같은 방어로 위협을 물리친다.
공(攻)과 수(守), 공방일체다. 강철의 방패는 얻었지만 그럴듯한 무기 하나 쥐지 않았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방패 못지않은 신병(神兵)까지 쥐었다.
투우웅!
방어 다음은 공격이었다. 튕겨 나간 명치산을 향해 재차 일 보(一步)를 내디딘 그가 철부를 휘둘렀다.
꽝!
명치산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내상이었다. 공격은 막았지만, 그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연호정은 멈추지 않았다.
백호군림의 일 보, 일 보를 밟아 가며 호왕구벽세의 신들린 공격을 구사했다.
꽝! 콰릉! 쾅!
대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명치산이 토해 내는 피가 점점 많아졌다.
‘진다…….’
한순간 역전된 승부.
‘이런 놈이 있다니.’
본능적인 대처로 공격을 막아 갔지만, 점차 힘이 빠졌다.
반대로 상대의 무공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서서히 맞춰 가는 듯, 공격이 무서운 속도로 정교해지고 있었다.
‘……?!’
어느 순간, 명치산은 환상을 보았다.
상대의 등 뒤에서 새하얀 호신(虎神)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괴물?!’
대궐 기둥보다도 큰 네 개의 다리와 서까래보다도 굵은 꼬리, 기다란 목에 야수의 얼굴을 한 희대의 괴수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색의 털을 가로지르는 시커먼 줄무늬는 화공이 그려 낸 산맥과 같았다. 푸른 두 눈은 인광(燐光)이었고, 완만하게 굽어져 내려온 송곳니는 강철의 도검이었다.
호랑이와 닮았지만 묘하게 닮지 않은, 그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위엄 넘치는 서천의 군주가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사신, 백호였다.
“으아아아!”
명치산이 피를 토하며 연호정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연호정의 도끼가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갔다.
푸화악! 카아앙!
우측 허벅지에서부터 좌측 어깨까지가 쫙 갈라졌다. 손에 쥐었던 박도는 중간부터 뚝 부러졌다.
도끼를 상단으로 올려 친 연호정이, 그대로 도끼를 찍어 내렸다.
명치산의 눈이 허망해졌다.
내리꽂히는 저 거대한 도끼는 호신이 휘두르는 발톱이었다.
퍼어억!
두개골을 부서트린 도끼가 명치산의 명치까지 파고들었다.
결착이었다.
푸스스스스.
“후웁.”
숨을 들이쉬며 명치산의 몸에서 도끼를 빼낸 연호정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강자였다.’
명치산은 아버지와 비슷한 부류였다. 무공의 경지를 떠나 공격과 방어를 완벽하게 익힌 무도가(武道家)였다.
그런 자였기에 생각보다 더 쉽게 백호를 불러낼 수 있었다. 고맙다면 고마운 적이었다.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백여 그루의 대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명치산을 일직선으로 몰아붙인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쓰러지지 않은 호명전 무사 하나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청백무병을 대표하는 고수 명치산.
그런 고수가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후기지수에게 밀려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천천히 걸어온 연호정이 무사의 삼 장 거리 앞에 섰다.
그가 도끼로 무사를 겨누었다.
“명씨인가?”
무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다, 일순 도끼를 휘둘렀다.
꽝!
유독 대나무가 빽빽한 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나와.”
“……뼈가 저리는군.”
우수수 부서진 대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청년, 명강림(明康林)이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
연호정이 환하게 웃었다.
“명씨 맞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