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36)
636화. 정리(整理) (6)
그날 밤.
휘영청 뜬 달빛이 몹시 고왔다. 사천의 하늘답지 않게 구름도 거의 없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습도가 적당해 그리 춥지 않았다. 좋은 밤이었다.
가주전 후원 정자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던 당관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늦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생각은 나도 많다.”
“술은 많습니까?”
“말 돌리기는.”
연호정이 정자에 올라 당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관이 그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오량액이다. 본가에서 직접 담근 거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사족을 다시는 걸 보니, 정말 귀한 술이긴 한가 봅니다.”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일곱 배는 더 비싸다. 그러고도 남는 게 별로 없어.”
“뭔 술이 그렇게 비싸대요?”
“만날 싸구려 백주만 부어 대니 명주의 가치를 모르는 거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 아닙니까?”
“시끄럽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연호정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정말 좋군요.”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맛이 좋은 건지, 향이 좋은 건지, 뭐가 어떻게 좋은 건지 제대로 설명해라.”
“……좋으면 좋은 거지, 그런 설명까지 덧붙여야 합니까?”
“마실 줄 모르는 놈.”
까칠하시긴.
늦은 사람이 잘못이긴 하지만, 반응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연호정이 히죽 웃으며 당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주루에서 마시던 것보다 훨씬 묵직한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진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당관의 얼굴이 풀어졌다.
“묵직하고 더 독하다. 본가 비전이지. 검남춘도 가져왔으니 다 마시고 가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술입니다, 말술.”
그렇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잔을 교환했다.
“어떠냐? 기분은.”
“뭐가 말입니까?”
“무극을 열지 않았느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또 물어보십니까?”
당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올라 본 적이 없으니까. 무극을 열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하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도 아직 잘 실감이 가질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고.”
“수련하다가 늦은 게 아니었느냐?”
“예. 모용가주와의 대화를 좀 곱씹어 봤습니다.”
당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모용가주?”
“예.”
“그 뱀 같은 혓바닥으로 또 뭐라고 지껄이더냐?”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이런저런.”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관이 김샜다는 듯 잔을 채웠다.
“아마 자존심깨나 상했을 거다. 위기감도 느꼈을 거고. 나보다 훨씬 더 충격을 받았겠지.”
“그렇더군요.”
“앞길이 막막했겠지. 무림맹주는 되고 싶고 계획도 착착 세워 뒀는데, 거기에 정적인 네놈이 하늘 높이 비상해 버렸으니 얼마나 속이 쓰렸겠느냐.”
“…….”
“어쩌면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르지.”
날카롭군.
순간순간의 대응 능력은 모용군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당관 역시 가주 자리를 마작으로 딴 것이 아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비슷한 상태이긴 하더군요.”
“패배 선언이라도 하더냐? 그 성격에 그러진 않겠지만.”
차라리 패배 선언을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당가는 거의 수습된 것 같습니다.”
말을 돌리려는 게 빤히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당관도 모른 척해 주었다.
“방계도 다 불러들였고, 인선 처리도 끝냈다.”
“엄청나게 빠르군요.”
“막내가 도와주더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당윤 대협의 능력이 상당할 거라 예상했습니다.”
“상당한 수준이 아니더군. 꽤 많은 일을 맡겼는데, 각 잡고 움직이니 그 많은 일을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
“인재는 침묵하는 법입니다.”
“그래.”
“둘러보니 보수도 많이 되었습니다. 낮보다도 더요.”
“본가의 인부들이 솜씨가 좋다.”
연호정이 웃으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언제냐?”
“예?”
“언제 떠날 참이냐?”
“…….”
“묵룡부에서 나온 것이 본가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지 않느냐.”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사흘 안에는 떠야지요.”
“사흘이라.”
“대신 뒤처리까진 도울 생각입니다. 낙원소의 존재는 당가만의 일이 아니니까요.”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네놈이 도와준다면야 더 쉬워지긴 하겠다만, 바쁘다면 굳이 손을 보태지 않아도 된다.”
괜히 하는 말처럼 들리진 않았다.
연호정이 물었다.
“따로 지원군이 오는 겁니까?”
“그렇다.”
“어디에서……?”
“어디겠느냐?”
잠시 당관을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용두방주가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습니까?”
당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눈치는 정말 독사처럼 빠르구먼.”
“언질은 줬습니다. 개방 덕을 좀 보긴 했지만, 그 양반이 선을 좀 넘기도 했어요.”
“본가의 사태가 진정된 이후, 즉시 낙원소와 연관된 장로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렵다고 툴툴대더니.”
“개방의 주인이라는 자리는 진실만을 입에 담지 않는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런 것 같더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두방주가 도와준다고 했다면, 정말 제대로 도와줄 겁니다. 가지고 있는 가면은 많아도 그 속에 든 협의(俠義)만큼은 진짜니까요.”
“차라리 잘되었다. 한 지역의 개방도 숫자는 어지간한 대문파 몇 개를 합친 것만큼 많지. 일 처리도 빠를 테고, 낙원소를 정리하는 것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청성과 아미도 처리해야 할 겁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더군. 사실상 그쪽 일은 개방이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래.”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잔을 비웠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당관이었다.
“음제(音帝)를 회유하러 간다고?”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우선 그 양반의 환경이나 상태를 봐야겠지요. 만약 음제가 삼교와 손을 잡았다면, 회유하든 싸우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겁니다.”
“골치 아프겠군.”
“하지만 뭐, 음제가 타락했을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묵룡부의 정보를 보면…….”
“네가 희망하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예?”
당관이 술상 옆에 둔 주머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오늘 술자리에서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받아라.”
“이게 뭡니까?”
꽤 묵직한 주머니를 여니, 그 안에 검고 작은 구슬이 보였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소형 화탄입니까?”
“나도 그런 줄 알았지.”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기관 장치는 화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엄청나게 정교하더군.”
구슬을 여기저기 살펴보던 연호정이 일순 눈을 빛냈다.
구슬 곳곳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중심부로 향할수록 직경이 좁아지는 형태의 구멍들이었다.
“말씀대로 정교하기 그지없군요.”
이 작은 구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원뿔형 구멍을 만들었다.
게다가 구멍 내벽 곳곳에도 극히 미세한 구멍들이 몇 개씩 뚫려 있었다.
초절정고수 정도가 아니면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만큼 작은 크기였다. 의미를 알기 힘든 구멍들이지만, 철을 이렇게나 세밀하게 세공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기술력이라 할 만했다.
“광혈교에서 나온 마인들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다.”
연호정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당관이 말을 이었다.
“터진 순간 엄청난 음파가 주위를 휩쓸었다고 하더군. 정확히는 진동이지만, 뭐가 되었든 일시적으로 고수들의 내공과 오감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물건이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소리를 화탄처럼 터트려 사용하다니요?”
“소리는 진동이고, 진동을 순간적으로 증폭시켜 충격파를 일으킨다는 원리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지. 보통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불가능한 걸, 망할 광혈교 놈들은 성공한 것이로군요.”
“멀쩡한 물건이 많지 않아서 아직 연구 중이긴 하다. 반으로 쪼개어 내부를 살피니, 평범한 화탄보다 두 배는 더 복잡한 설계를 해 놨더군.”
“음.”
“솔직히, 내 눈으로도 어떤 장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당형만큼은 아니어도, 당관 역시 당가의 여러 공부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암기술의 대가인 만큼, 암기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화탄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런 당관이 혀를 내두를 정도면, 정말 대단한 기술 체계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다. 이 음파탄(音波彈)은 절대 스스로 작동하지 않아. 화탄처럼 신관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진동은 화약과 같은 물질이 아니라 내부에 담아낼 수가 없으니, 기실 당연한 얘기다.”
“그렇다면……?”
“술법까지는 아닌 것 같고, 특정한 내공으로 진동의 주파를 극대화해 폭발적인 성능을 내는 보조 장치인 것 같다.”
천하의 연호정도 당관의 말을 전부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런 쪽으로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당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음제가 만든 물건이란 말입니까?”
“혹은 이 물건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음제가 자신의 무공을 전수했을 수도 있지.”
“…….”
“아니면 애초에 음제가 삼교 소속이었을 수도 있다. 음제가 광혈의 직계 무공을 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안다. 아직 확신할 만한 일은 아니지. 굳이 음제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 기술력이라면 광혈교가 자체적으로 발전, 실용화한 것일 수 있다.”
“…….”
“다만 음을 다룬다는 것은 곧 진동을 다룬다는 것이고, 진동을 다룸에 있어 천하 무림인 중 음제만큼 뛰어난 자는 없을 것이다.”
“…….”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호정은 말없이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당관이 말을 덧붙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놈이 무극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오르기 전이었다면 세 합을 채 버티지 못했겠지만, 지금이라면 팔뚝에 이빨 자국 정도는 낼 수 있겠지.”
“비유가 참.”
“물론 무극을 열었다고 해도 겨우 초입일 뿐이다. 나는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지만, 성천 중에서도 그 강함이 천차만별이라 하였다. 정면 승부를 노린다면 십중팔구 네가 죽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말없이 그를 보던 당관이 검남춘 한 병을 따서 잔을 채워 주었다.
“죽지 마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걱정되십니까?”
당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받은 은혜를 아직 갚지 못했다. 죽을 거면 채무 관계를 청산한 연후에 죽어라.”
“하하.”
“본가를 은혜도 모르는 무도한 가문으로 만들면 죽어서도 저승에는 못 갈 거다.”
당관식의 응원이지만, 참 살벌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죽지 않겠습니다.”
“약속했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술잔을 나누었다.
자시, 자정이 넘어 축시가 되었을 무렵.
“사흘이라고 했나?”
“예. 자정이 지났으니 이제 이틀이로군요.”
“아버지께 가 보아라.”
“예?”
당관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네게 줄 선물이 있다 하시더군. 눈치가 빠른 분이라, 네가 곧 떠날 것을 직감하신 듯하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가서 받아라. 모르긴 몰라도 음제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꼭 가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