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48)
648화. 음황(陰荒)의 숨결 (3)
홍적은 물론 뒤에 도열한 종남의 검수들도 깜짝 놀랐다.
‘허공섭물!’
초절정고수가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거리의 물건을 극한의 내공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당연히 내공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이 고루 단련된 자라면, 공기 중에 흐르는 자연기와 내공의 흐름을 일치시켜 외물(外物)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허공섭물이다. 인간을 초월한 무력,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고수들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절정의 깨달음이다.
하지만 연호정이 보여 주는 허공섭물은 그 수준이 남달랐다.
스르륵.
연호정의 손에 잡힌 통천부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쿵!
도끼날을 자연스레 땅에 내려놓는데 작은 울림이 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 어림짐작으로도 육십 근을 훌쩍 넘길 듯하다.
하물며 삼 장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끌어올 정도라면 가히 구파 장문인급, 혹은 그 이상의 무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
‘이럴 수가!’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지만, 그 소문이 전부 사실은 아닐 거라 여기던 홍적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연호정의 나이는 이립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 연배에 무종지벽을 돌파했다는 것만으로도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한데 그런 후기지수가 거대 문파 수장급의 무력을 갖추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는 연호정의 무력은 소문대로였다.
아니, 소문 이상이었다. 허공섭물의 수를 쓰는데도 내력을 어떻게 발출했는지 알 수가 없다. 종남의 장문인이라도 저런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얼이 빠져서 연호정을 보는 홍적.
여광 역시 이번 한 수로 연호정의 실력이 자신보다 떨어지지 않음을 직감했다.
고집 어린 늙은 얼굴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벽산호장은 몰라도, 얼마나 대단하면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는지 의문이었거늘 정말 대단하군.”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제 무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엔 관심이 없습니다.”
“뭐라?”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저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앞을 막는 모두를 무시하고 진격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멈춰 서서 대화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희대의 난적을 맞이하려는 지금, 우리끼리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
“그러나 끝까지 막으신다면, 그때는 저희로서도 별수가 없습니다. 남은 일은 맹의 십이봉공분들께 일임하고, 갈 길을 가도록 하지요.”
무력으로 뚫고 가겠다.
연호정의 의도는 명확했다. 기실, 도끼를 끌어온 시점부터 싸울 의지를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여광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 자신감의 원천을 알겠군. 하나, 개인의 무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집단의 힘을 넘볼 순 없네.”
“그래서 종남은 저희를 막으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삼교라는 족속들의 힘은 중원을 불바다로 만들 만큼 대단합니다. 소수의 뜻있는 지사(志士)들의 노력에도 한계가 있는바,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무엇이 우선인지도 모르고 앞을 막아서야 쓰겠습니까?”
“…….”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권고합니다.”
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두 눈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길을 비켜 주십시오.”
“……!”
순간 여광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력의 흐름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의 한 수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그래도 여광은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무공이란 경지만 높다고 전부가 아닌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의 눈빛을 본 순간.
‘……이런 놈이 있나.’
주르륵.
여광의 목덜미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이놈, 설마하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막을 수 없다는 것.
어쩌면 이곳에 데리고 온 종남의 검사들이 몽땅 나서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안개처럼 스며드는 놀라움은, 어느덧 하나의 불길하기 그지없는 사실이 되어 여광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여광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
“…….”
“싸우지 않고 물러나는 것은 무사의 수치. 그러나 뜻이 다를지언정 크게는 집안 식구이거늘, 자칫 공멸할 위험이 있는 싸움을 고집해서야 안 될 일이지.”
여광이 손을 올렸다.
“모두 길을 열어라.”
스르르륵.
종남의 검사들이 우측 편으로 이동했다.
어떠한 의문도 표하지 않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움직인다.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훈련된 검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여광을 바라보았다.
여광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가시게. 다만, 하나는 기억해 두게.”
“…….”
“우리는 오늘 많이 참았다네. 만에 하나 자네들 때문에 섬서의 공기가 야박해지면, 자네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무가 끝나면 곧장 일행을 데리고 섬서를 나가 주게.”
“상황을 봐야겠지만, 저희 역시 임무가 아니면 섬서에 머무를 까닭이 없습니다. 일이 끝나면 곧장 떠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네.”
연호정이 다시 돌아가 말에 올라탔다.
한 차례 투레질을 한 말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동시에 일행이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척.
여광의 옆을 지나치기 전, 연호정이 말을 멈추었다.
여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로 할 말이 있나?”
“충분한 주의를 받았으니, 저희 쪽에서도 한 가지 요구를 드리겠습니다.”
“요구?”
“끼어들지 마십시오.”
연호정이 여광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순간 여광은 움찔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위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공멸의 가능성이 있으니 한발 물러나겠다. 선배의 처사는 지혜로운 것입니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임무를 받은 저희의 무력이 만만했다면 절대 물러나지 않았을 거란 뜻이 되지요.”
“……!”
“상황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수장으로서 갖춰야 할 합당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자존심을 생각하기 전에 무엇이 우선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대인(大人)의 덕목이지요.”
“…….”
“미리 말씀드리건대, 이 임무에 대해 알려 하지 마십시오. 조사차 종남의 문인들을 파견하지도 마십시오.”
번쩍!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만에 하나 이 사태에 개입할 시,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묵룡부의 특임 부관으로서 종남을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홍적이 버럭 외쳤다.
“이놈! 알량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종남이 우스워 보이느냐!”
“또한.”
연호정의 눈이 여광에게서 홍적에게로 옮겨 갔다.
욕지거리라도 한 마디 날리려던 홍적은 일순 입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느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지금, 여기 있는 일행을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인식할 것인즉. 애먼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절대 개입하지 마십시오.”
“이익!”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호정이 다시 말을 몰아 나아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강량의 얼굴에 통쾌함이 어렸다. 황석태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은근한 눈빛에 속이 후련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패율은 입맛을 다셨다. 이 김에 종남의 고수들과 손속을 나눠 볼 수도 있었는데 결국 싸움이 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오 장 거리를 넘어갔을까.
여광이 연호정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젊음이란 혈기와 어설픔을 동반하는 법이지.”
“…….”
“만에 하나 자네 손에 종남의 문인이 죽으면, 그때부터 종남은 맹규(盟規)를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자네를…….”
그때였다.
콰콰콰콰쾅!!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연호정의 전면 소로가 초토화되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폭풍과도 같은 힘이 몰아쳤다. 그 충격파로 인해 소로의 너비가 세 배는 넓어졌다.
“……!!”
여광과 홍적, 종남 검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우우우우웅!!
휘둘러진 통천부의 도끼날에 백호의 바람이 어렸다.
연호정이 견갑에 통천부를 얹은 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길이 너무 좁군. 기마로 가려면 좀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어. 이래서 시간 낭비하기 싫었는데.”
연호정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시간 죽이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가자.”
강량이 히죽 웃으며 외쳤다.
“예! 갑시다!”
히히히힝!!
네 마리 기마가 용울음을 토해 내며 활짝 열린 길을 달렸다.
기마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보통 말들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은 몰랐다.
연호정 일행이 사라졌지만, 종남의 검사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홍적은 침을 삼켰다.
‘뭐였지?’
그는 조금 전 본 연호정의 무공을 떠올렸다.
거대한 도끼를 한 번 휘둘러 길 양옆의 나무와 잡초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 일격.
휘몰아치는 바람에 담긴 거력(巨力)에 없던 길이 생겨난, 가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도, 도대체 그 힘은……?!’
그때, 여광이 말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예, 예?”
홍적이 여광을 바라보았다.
여광의 얼굴은 그런대로 무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장문인급 무공이 아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의 힘은 무한의 궤도에 올라선 것이 확실해.”
무한의 궤도.
무한은 곧 무극이며 무극은 곧 태초의 혼돈으로서,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한다.
“설마…… 저, 저 젊은 놈이 무극을 열었단 말입니까!?”
여광은 말없이 연호정 일행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았다.
침묵하던 그가 침을 삼키곤 말했다.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길래? 설마, 외도에 손을 댄 것은 아니겠지?”
* * *
“크!”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강량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철기단주도 봤수? 아까 그 늙은이 낯짝 말이오.”
황석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봤네.”
“크하하! 뱀을 본 생쥐처럼 완전히 얼어붙었소! 정말 보통 통쾌한 게 아니었다니까!”
“별것도 아닌 일로 들뜨지 말게. 앞으로 산을 몇 개는 더 넘어야 하네.”
“그래도 시원하지 않소?”
황석태의 입꼬리가 기어이 올라갔다.
“속 시원하긴 하더군.”
“크하하하!”
“한데 자네, 말투가 왜 그런가?”
“뭐가 말이오?”
“상당히 격의 없어졌군.”
“같은 흑도끼리 뭘.”
두 사람이 말투로 지지고 볶을 동안, 패율이 속도를 올려 연호정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냐?”
“뭐가 말입니까?”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좀 심했던 건 아닌지 묻는 거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칼부림이 났으면 누구보다 좋아했을 분이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갈등이 터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 자리는 잘 마무리된 거야. 이러니저러니 주절거려 봤자, 결국 패배자의 개소리에 불과해.”
“…….”
“거기서 굳이 힘을 보여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선배의 말이 맞습니다.”
“역시 알고 있군. 하면, 달리 이유가 있었다는 거냐?”
“있습니다만,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패율이 투덜거렸다.
“또, 또 혼자만 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저도 화가 좀 났습니다.”
“음?”
“동료가 모욕을 당했잖습니까.”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엄지로 강량과 황석태를 가리켰다.
연호정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같은 정파로서 그들의 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내 사람이 모욕당한 순간, 그들의 사정을 이해해 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
“제 싸가지에 그 인간들을 다 때려눕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대 사건입니다.”
“허!”
연호정이 조금 더 속도를 냈다.
가만히 그의 등을 보던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널 따라다니면 심심할 일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