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50)
650화. 음황(陰荒)의 숨결 (5)
푸르륵!
투레질하는 말들의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천리마를 방불케 하는 희대의 명마들이었지만, 최소한의 휴식만 취한 채 계속 달리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덕분에 예상보다 더 빨리 섬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워, 워.”
말의 갈기를 쓸던 연호정이 눈을 감고 손에 내공을 집중했다.
우우우웅.
손에 희미한 빛무리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놀랍게도, 호흡이 거칠었던 연호정의 말은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뒤에서 그걸 보던 패율이 놀라서 물었다.
“뭐냐? 어떻게 한 거냐?”
“뭘 말입니까?”
“말의 호흡을 안정시켰잖느냐.”
“내력으로 신경과 심박수를 조절하고, 폐장 능력을 일시적으로 확장했습니다.”
패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닐 텐데요.”
“놀랄 일이지, 인마! 짐승 몸뚱이는 사람의 그것과는 달라. 내력을 침투시키는 건 쉽지만, 장기와 신경을 직접적으로 조절하는 건 지극히 어려울 텐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익힌 무공이 독특해서 그럴 겁니다.”
그는 일행의 말들을 모두 진정시켰다.
‘아니지.’
연호정의 등을 좇는 패율의 시선은 깊고도 깊었다.
‘독특한 무공이라서가 아니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보기 때문에 저런 것이 가능한 것이다.’
혈도와 혈맥, 신경과 장기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종마다 그 위치와 형태가 전부 다르다. 절대 무공 조금 독특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 봤자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밥을 먹고 쉬어야 체력이 돌아오는 법이지요. 며칠을 쉬지도 않고 달려왔으니, 오늘은 객잔에 들러서 말들도 쉬게 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찬성입니다.”
강량이 히죽 웃었다.
“일 치르기 전에 뱃속에 기름칠 좀 해 줘야지요.”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 온존을 위해 필요한 일이지.”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둘이서 죽이 잘 맞는군.”
연호정이 피식거렸다.
“각 세우는 것보다는 낫지. 갑시다.”
* * *
화적루(華蹟樓)는 한중 인근에서 손에 꼽힐 만큼 크고 유명한 주루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화적루는 화산(華山)과 연관된 주루이기 때문이다.
화산보다는 종남에 가깝지만, 어차피 섬서 전체가 두 문파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둘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친분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서로의 세력권 안에 휘하 문파와 사업체들을 적당히 두었다.
견제임과 동시에 화친이다. 화적루 역시 그런 사업체 중 하나였다.
“음, 오래간만에 뜨뜻한 물에 몸을 담가서 좋기는 한데.”
한 시진이 넘도록 수욕을 한 강량의 모습은 귀공자를 방불케 했다.
워낙 성격이 강하고 인상이 날카로워서 그렇지, 강량의 얼굴은 객관적으로 몹시 잘생긴 편이었다.
“근데 여기서 쉬어도 됩니까?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좋긴 합디다.”
연호정 역시 말끔했다. 강량이 귀공자 같았다면, 연호정은 허허로운 선비처럼 보였다.
“화적루는 화산의 영향권 아래 있다. 어차피 두 문파 산하가 아닌 주루가 드물어. 그럴 바에야 괜히 피한다는 인상 주지 말고 당당하게 가야지. 물론 종남 산하보다는 화산이 낫다.”
“종남과는 사이가 틀어졌으니까요?”
“적어도 함부로 대가리 들이밀진 않겠지.”
“친분이 있다는데, 혹시라도 화산에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잔을 비운 연호정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 거다.”
“확신하십니까?”
“용선진인은 용화진인이 죽고 새 장문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양반이야. 하물며 그 양반한테 장문인 할 생각 있냐고, 밀어주겠다고 바람을 넣은 사람이 나랑 모용가주다.”
“……그랬습니까?”
“함부로 목줄 채우려다가 손모가지 날아갈 수 있다는 걸 모를 위인이 아니야. 결정적으로, 용선진인은 탐욕스러운 용화진인과는 달라.”
조용히 술을 마시던 패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내가 듣기로는 소림 방장께서도 은근히 힘을 실어 줬다고 알고 있다만.”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맹 내의 세작을 잡을 때 용화진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용선진인이 새로이 장문인에 올랐지요.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화산을 온전히 장악하기도 어려운 시간입니다.”
“음, 일리가 있군.”
“게다가 용선진인은 실추된 화산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화진인을 따르던 일파도 많았지요.”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이라면, 설령 문파를 장악했다고 해도 함부로 나서긴 힘들겠지. 내부 상황을 떠나, 무림맹의 봉공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야 할 판국에 유군 부대 대수를 건드린다는 건 악수 중의 악수야.”
“맞네. 현재 무림맹 군사께서는 나를 신임하고 계신다네. 그리고 군사께서는 무림맹 정치의 핵(核)이야. 천운으로 얻은 자리, 방석 끝이나마 부여잡고 싶다면 언감생심 우릴 건드리진 못할 걸세.”
강량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근래 작전과 전투의 반복이라 잊고 있었던 것, 바로 연호정의 정치적 능력이었다.
판도를 읽고 인물을 분석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이 그렇다고 하면 그럴 것이다.
적어도 정치판의 줄다리기에 있어서, 연호정은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사람, 모용군을 제외하고는.
“문제는.”
고기를 우물우물 씹던 패율이 지나가듯 말했다.
“종남이 언제까지 자존심을 접을 것이며, 날개를 펴기 시작하면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그것이로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종남의 참견은 발목에 줄을 매달아 놓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참견일 뿐, 결정적인 훼방을 놓지는 못할 겁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문제는 우리 임무의 난이도잖냐.”
“그렇기 때문에, 종남이 나설 생각도 하기 전에 이번 임무를 끝내 버려야 합니다.”
강량이 이마를 찡그렸다.
“하여간 그놈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사람 힘들게 만든다니까. 뭐? 먼지가 어쩌고 저째? 지랄 염병을 하고 있네. 지들은 뭐 칼에 금가루라도 발랐대?”
여광의 말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그였다. 그냥 잊고 지나가자고 마음먹기에는 다소 모욕적인 언사였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틀리지 않아.”
“예?”
“그 늙은이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형님?”
“흑도가 왜 흑도라고 불렸겠냐. 고결한 이상 때문에? 아니면 피폐한 민심을 돌보는 이들이라서? 그도 아니면, 가진 것을 베풀고 악을 징벌하는 선인(善人)들이라서 그리 불렸을까?”
“…….”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이해한다. 화를 내지 않아 줘서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네 눈으로 진정한 천하(天下)를 보고 싶다면, 기분 나쁜 것 이상을 생각해야 해.”
“기분 나쁜 것 이상이라면……?”
“흑도 세력들이 언제나 악랄하고 잔인하기만 하진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지만, 과거 어느 때엔 흑도에도 그들만의 규칙과 법도가 있던 시절이 있었어. 귀족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사백 년 전이라고 알고 있네.”
연호정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흑도는 세상을 위해 제 살을 떼어 가면서 희생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양민의 삶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배신과 개인의 사리사욕을 엄격히 금했지. 철저한 법도로 소속원들 모두가 자긍심을 가진 또 하나의 위대한 길을 개척했던 시대였다.”
“…….”
“그것은 흑도가 아니라 법가(法家)에 가까웠다. 당시의 흑도는 저명한 백도 인사들도 인정할 만한 이들이었어.”
황석태가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호정이 그대로 잔을 비웠다.
“적어도 지금의 흑도는 그때에 미치지 못해. 말하자면, 앞으로가 중요하겠지.”
연호정이 강량을 바라보았다.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 내가 어느 선에 서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해라.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때부터는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미래…….”
“네가 속한 흑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흑도를 회도(灰道)로 만들지, 백도로 투신할지. 그도 아니면 만인이 위대하다 느낄 정도의 위엄 넘치는 흑도를 만들 것인지.”
“…….”
“시야를 넓혀. 가까이 있는 것만 보는 것도 습관이다. 더 멀리 보고, 더 넓게 봐라. 무극을 열지 않아도 천하제일(天下第一)에 이르는 길은, 바로 그와 같은 능동적인 사고와 미래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자세에 있다.”
“능동…… 미래…….”
강량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패율과 황석태 역시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연호정의 말을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가만히 강량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런 걸 감안해도 그 늙은이 말하는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긴 했어.”
“하하하!”
강량이 크게 웃었다.
연호정이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 바로 움직입시다. 먼저 일어납니다.”
패율이 물었다.
“벌써 들어가게?”
“명상도 할 겸, 이것저것 알아보려 합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쉬십시오. 사고는 치지 마시고요.”
“누가 보면 네가 내 선배인 줄 알겠다.”
“사고 치는 그릇만 따지면 제가 한참 선배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몸 좀 사려야 합니다.”
연호정이 씨익 웃으며 방으로 올라갔다.
패율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묘하게 건방진 녀석이야.”
강량이 은근히 물었다.
“질투입니까?”
“뒈지고 싶냐? 몸에 또 관도 몇 줄 내 줘? 예쁘게 삼각형을 그려 줄까 하는데.”
“됐거든요.”
“됐으면 술이나 처마셔, 인마.”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술잔을 나누었다.
황석태는 두 사람의 살벌한 농담을 안주 삼아 술을 즐겼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위엄 넘치는 흑도라…….’
황석태가 위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자네는…….’
황석태는 정말이지 연호정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배우고 싶은 것도.
그날 밤.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화적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관도 밖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대숲에 들어선 그가 담담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나오시오.”
스르륵.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나이 든 촌로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개방, 그것도 장로급이시군.”
촌로의 눈이 번쩍였다.
“그것을 어찌 알았는가?”
“허허로운 공력, 그리고 자유분방한 걸음걸이. 그 정도 무력에 음제와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자라면, 장로급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아니오?”
“……허허허.”
촌로가 혀를 내둘렀다.
“내력을 숨기는 데에는 본방에서도 손에 꼽힌다고 자부했거늘, 이거 너무 쉽게 들켰구먼.”
“그렇소?”
“역시 방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자네, 정말로 무극을 열었구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눈치챘군.’
딱히 능력을 숨기진 않았으니 화진천도 알 거라고 생각은 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정보를 전하러 오셨소?”
“정보와 함께 부탁도 좀 받았네. 물론 그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자네 자유야.”
“부탁?”
“정보부터 전달해 줄꼬? 아니면 부탁부터?”
“부탁부터 들어 봅시다.”
촌로, 개방의 장로 철장개(鐵掌丐)의 눈이 빛났다.
“화산파의 전전대 대장로께서 자네를 좀 보자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