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51)
651화. 존귀한 깨달음 (1)
“음.”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는 연위의 눈은 호수를 닮아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면. 작은 파랑 하나 일으키지 않는다. 가만히 보다 보면 그 안에 빠질 것처럼 깊기만 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역시.”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무리구나.”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어려워 그저 절대삼검이라고만 부르고 있는 검예.
과거, 일검은 완성했고 이검의 구상이 끝났었다. 하지만 당관과의 수련으로 이검을 완성했고 삼검의 구상이 끝났다.
이제 삼검을 완성하면, 연위는 무사 인생에 있어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문을 위해, 후손들을 위해 더 나은 무공을 창안하는 것. 역대 가주들은 가세(家勢) 이전에 공부를 다듬는 데에 힘을 썼고, 연위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무극은 어렵구나. 삼검을 완성하면 그에 이를 수 있을는지.”
담담한 얼굴의 연위. 아직 무극이 벅참에도 아쉬운 기색은 없었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무사의 조급함이나 답답함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연지평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보았다.
형인 연호정은 언제나 빨랐다. 빠른 걸 넘어 급해 보였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나 급해 보일 뿐, 그 자신에게는 결코 급한 것이 아니었다. 형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지평은 그런 형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자신은 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형에겐 형의 길이 있고, 제겐 자신의 길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길은 아버지의 길과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형보다는 아버지와 훨씬 더 가깝다. 연지평은 그것을 깨달았다.
연위가 착검하며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일각 전에 온 줄 알았지만, 이 집중을 깨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버지.”
웃으며 연지평을 보던 연위의 얼굴에 조금씩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광동에서 멋진 수련을 한 모양이다.”
“모용 군장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참으로 대단하다. 끊임없이 노력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
가감 없는 솔직한 감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둘째의 무공은 마치 무당파 도사들의 그것처럼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연가의 핏줄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태다.
연가의 부자들은 제각기 특성이 달랐다.
연위에게는 거목처럼 뿌리 깊은 탄탄함과 성벽과도 같은 든든함이 있었다.
연호정은 벼락처럼 빠르고 불처럼 화려한 강렬함이 일품이었다.
그렇다면 연지평은 어떠한가?
연지평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풍성했다. 하지만 마냥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구름은 때로 벼락과 폭풍을 동반하는바. 연위는 잠잠한 연지평의 기도 속에서, 언제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강렬한 검풍(劍風)을 볼 수 있었다.
“그 나이에 무의(武意)를 얻고 자신만의 무도를 개척했으니, 찬사를 받아 마땅할 일이다. 그 기세라면 조만간 무종을 넘겠어.”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연연하지 않으려 합니다.”
묘한 변화였다.
평소의 연지평이라면 아직 멀었다고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연지평은 달랐다. 담담하게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채 세상을 본다. 무종지벽을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은 있지만, 그것을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연위가 껄껄껄 웃었다.
“이룬 성취보다 어엿하게 성장한 그 마음이 더 기껍다. 사내는 세상에 나가야 어른이 된다더니, 네가 이제야 어른이 되었구나.”
연지평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연위가 자신의 검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어떠냐? 밥도 안 먹었을 텐데, 식후에 격검(擊劍)을 나눠 보겠느냐?”
“좋습니다.”
“좋다. 아들의 검이 얼마나 매서워졌는지 직접 확인해 보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없겠지.”
웃으며 연지평을 보던 연위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비아는 어디에 있느냐? 같이 오지 않았더냐?”
“아…….”
연지평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누님은 돌아오자마자 다시 출맹하게 생겼습니다.”
“출맹? 어찌?”
“형님에게 가야 한다고 해서요.”
“호정에게?”
“예. 군사님께 따로 연락이 왔는데, 형님의 병기를 이송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해서 누님이 가기로 했지요.”
연위가 혀를 찼다.
“이제 막 돌아왔는데 하루 정도는 쉬고 가도 될 것을.”
“아마 이따가 한 번 들를 겁니다. 하루는 쉬고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만에 모이겠구나. 호정과 량이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거처를 나섰다. 식당으로 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자는 간만의 오붓한 식사를 즐길 수 없었다.
“가주님.”
연위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자네는 군사부의?”
“예. 군사님께서 지금 바로 보자십니다.”
무사의 얼굴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연지평이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식사는 저 혼자 하겠습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연위가 무사에게 말했다.
“가세나.”
“예.”
무사와 함께 군사부로 가는 연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뭔가 일이 터지긴 한 모양이다.’
* * *
화적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산.
정상에 올라온 연호정의 눈에, 달빛 아래서 홀로 술을 마시는 한 노인이 보였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저 양반인가.’
연호정보다 먼저 걸어간 철장개가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연호정 대수를 데리고 왔습니다.”
무척이나 깍듯한 자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화산의 전전대 인물이라면, 그 사람이 끼친 영향력을 떠나서 무림의 큰어른이라 할 만했다.
전대의 인물보다도 한 세대 이전이라면 못해도 구십이 넘은 나이일 테니, 철장개가 저리 공손한 것도 당연했다.
“음, 고맙네.”
“아닙니다.”
철장개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맞은편에 섰다.
“호오.”
노인이 웃으며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자네가 의정군의 수장인가?”
“…….”
“대단하구먼. 본산에도 명민한 제자들과 영명 있는 도사들이 많네만, 그중 누구도 자네만큼 빼어난 빛을 보여 주진 못했네.”
연호정은 말없이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노인이 손으로 제 앞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 위에는 빈 잔이 놓여 있었다.
“앉아서 한잔 받으시게. 매화로 담근 술이야. 좀 씁쓸하지만, 향은 일품이라네.”
말없이 노인을 보던 연호정이 이윽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잔을 들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깊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볼 뿐.
철장개가 살짝 눈을 부라렸다.
“강호의 대선배일세. 응당 예를 취하시게나.”
연호정은 철장개의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철장개는 내심 혀를 찼다. 원체 목이 뻣뻣하다고 듣기야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반응은 철장개와는 달랐다.
“왜 그러시나?”
“…….”
“이 늙은이에게서 무엇이 보이길래 그리 빤히 보시는가?”
그제야 비로소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대단하십니다.”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인가.”
“깊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음?”
“손을 섞는다면야 질 것 같진 않은데, 뭔가 떨떠름합니다.”
“허허허.”
“노도장과는 싸우고 싶지 않군요.”
노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소문과는 영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부분은 소문대로구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늙은이를 봤음에도 대뜸 싸울 생각부터 하나? 허허허.”
“…….”
“단호하기 그지없는 기도. 무한의 길 위로 올라섰음에도 한 점 흔들림이 없어. 모르긴 몰라도, 자네의 성격과 무도(武道)는 무극을 열기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듯하네.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의 그림자가 엿보이는군.”
연호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도인다우십니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시니.”
“다 해석하고 다 이해했으면서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직관적인 걸 좋아해서 말입니다.”
“알 것 같네.”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인가?
철장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에 낄 생각은 못 했다.
‘정말 대단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노인이되, 연호정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포착했다.
‘이 사람은 그냥 도사가 아니야. 마치…….’
연호정이 떠올린 것은 또 다른 도사였다.
그간 보았던 도사 중 가장 도사다운 도사.
‘승현진인과 같다.’
무당의 승현진인.
이 노인은 승현진인과 같은 부류다. 같은 부류이되, 그보다 훨씬 더 깊고 풍성한 사람이었다.
‘싸울 마음이 생기질 않아.’
무공의 극한은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이 노인과 승현진인은 그마저도 넘어섰다. 상대에게서 아예 싸울 마음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호승심을 불사르고 싶어도 불사를 수가 없다. 투기(鬪氣)가 솟지 않고, 전의(戰意)가 들끓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지고하여 보는 이들 누구라도 칼을 뽑을 생각을 못 하게 만든다.
노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무공 이전에 깨달음의 수준이 달랐다.
노인이 말했다.
“자네가 나를 신기해하는 것처럼, 나 역시 자네가 신기하구먼.”
“……?”
“자네에게는 도(道)가 보이지 않아. 도보다는 불심의 그림자가 더 짙은데, 그렇다고 불문에 들어갈 상은 아니군.”
“…….”
“천성적인 무인이로고. 어떤 신묘한 이치를 목격해도 그에 젖어 들지 않는 강단이 눈부시네.”
“그렇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달음에 관심도 없고, 깨달음도 자네를 비켜 갈 테지만, 하늘에 오를 자격을 스스로 버렸기에 그리도 강해질 수 있었군. 슬픈 강자로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대화,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요.”
“허허, 그러신가.”
“내일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허허허.”
한참을 웃던 노인이 이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화검자(華劍者)라 하네.”
화검자.
화산파의 전전대 대장로로서, 당시 장문인보다도 막강한 무공으로 화산의 이름을 만천하에 떨친 무적의 검사.
한 해가 지나면 정확하게 백 세로, 화산은 물론 전 무림을 통틀어 최고의 어른 중 하나였다. 성천의 고수들보다도 한 배분이 높은 강호 최고령자였다.
“십오 년간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하늘을 벗 삼아 깨달음을 더듬고 있었네. 그러다 몇 달 전, 왜인지 모르게 수행을 관두고 싶어졌지. 해서 오랜만에 본산을 찾았네.”
“…….”
“본산의 장문이 바뀐 것도, 세상이 꽤 흉흉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그때 들었네.”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자네의 이름을 들었네. 자네의 활약상, 영향력 등등을 용선에게 들었지.”
용선. 용선진인.
화산의 큰어른이 돌아왔다고 잠시 본산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장문인인데 몸소 산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보니, 새삼 화검자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노인, 화검자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삼교를 많이 증오한다면서?”
연호정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삼교를 증오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화검자가 말한 내용이 아니라 그의 어조였다.
어인 영문인지, 화검자는 오래전부터 삼교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면 나는 어떤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호를 하사받기 전, 내 속명(俗名)은 호연작(呼延雀)이었네.”
“……?!”
“나는 새외에서 왔네.”
차아아앙!
연호정이 벼락처럼 흑룡부를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