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59)
659화. 거짓된 살의 (1)
하은교의 눈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은밀하기 그지없는 접근이었다.
같은 경지의 고수보다도 청력이 배 이상 발달한 그녀였다. 그것은 기감과는 또 다른 영역, 사소한 소리의 차이로도 그 사람의 나이나 성별까지 알아맞힐 정도로 그녀의 청각은 예리했다.
‘제아무리 마음이 흐트러졌다지만.’
무극의 고수도 사람이다. 마음이 흐트러지고 한 곳에 정신이 쏠리다 보면 주변 상황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상대의 은밀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전설의 살수, 음신이라도 이렇게까지 은밀하진 못할 것이다.
호연종이 말했다.
“음제 맞소?”
“…….”
“아시겠지만, 저쪽에서 왔소이다.”
와중에도 사음교의 삼호법이라는 말은 아끼는 그였다.
호연종이 피식 웃었다.
“얌전히 계실 거라고 들었는데, 여기서 정체 모를 놈과 접선 중이었소?”
“그런 것이 아니네.”
하은교는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말했다.
“나는 그저…….”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뭐라 말할 것인가? 저 연호정이라는 청년이 제자를 납치했고, 제자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것인가?
그다음은? 얌전히 돌아가는 자신을, 저쪽에서는 어떻게 보겠는가? 결국은 의미 없는 해명이었다.
호연종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됐으니 올라가시오. 이 부분, 나중에 따질 테니까.”
지소현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게 아니에요! 스승님께서는 그저……!”
말을 하던 지소현은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뱀이 몸을 타고 올라와 턱 밑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는 듯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호연종의 눈빛. 그 지독하게 사이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지소현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들었다.
“컥! 커헉!”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 섞인 기침.
부르르르르.
몸이 떨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호연종의 광기 어린 살기가 그녀의 심신을 무참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그때, 하은교가 손을 휘둘렀다.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호연종의 살기가 중간에서 뚝 하고 끊겼다.
하은교가 지소현을 안았다.
“괜찮아. 괜찮다.”
“허억! 허억!”
벌벌 떨며 하은교에게 안긴 지소현이 이내 정신을 잃었다. 감당 못할 살기에 노출된 결과였다.
하은교가 호연종을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내 제자에게 손을 쓰면, 네놈을 필두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찢어 죽일 것이다.”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살기는 호연종의 것보다 사악하지 않았으되, 그보다 배는 더 짙은 농도로 일대를 휘어 감았다.
호연종이 피식 웃었다.
“때린 놈이 성내는 격이로군. 당신, 본인의 위치를 잊은 것이오?”
“…….”
“썩 꺼지시오. 이놈을 정리한 뒤에 찾아갈 것이오.”
분을 삭인 하은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대한 도끼로 얼굴과 상반신 일부를 가린 연호정은 미동도 없었다.
하은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마음 같아서는 저 무도한 호연종을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미안하네.”
결국, 그 말이 끝이었다.
지소현을 안아 든 하은교는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호연종이 인상을 찡그렸다.
‘망할 년.’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쓰다듬었다.
‘성천이라더니, 무식하게 강하군.’
하은교의 살기가 폭발했을 때, 그녀 자신도 모르게 암공파가 나갔다.
암공파는 곧 기척도 없이 진동을 일으켜 상대의 몸에 타격을 가하는 술수로, 격산타우(隔山打牛)보다도 진보된 하은교만의 절기였다.
만약 하은교가 본능적으로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호연종은 그대로 어깨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그는 암공파에 반응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신선제왕이라, 같잖은 별호로 으스대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정말 보통이 아니었어.’
지금의 무공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음황장 일격이 들어간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으면 필패일 것이다.
‘승부욕이 불타오르는군.’
착잡하고 무기력했던 근래, 다시 욕심이 차오르고 있었다.
치솟는 호승심을 다스린 호연종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죽이기 전에 이름 석 자나 들어 보겠다. 뭐냐, 이름이?”
연호정은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치이익!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황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연종의 장력을 분쇄하면서 증발한 발경의 연기였다.
호연종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의 경지는 이룬 놈인가 보군. 하은교, 그 망할 계집이 경고해 줬다 해도 쉽게 막을 만한 일격은 아니었어. 이름깨나 날리는 놈 같은데.”
“…….”
“빌어먹을, 중간에 들킨 놈들은 꼭 저렇게 병신 짓을 해요.”
우우우우웅!
호연종의 손에 은은한 황색의 기운이 어렸다.
건조함이 느껴지는 황색, 모래의 빛깔과 비슷했다. 누런빛이었지만 금빛과는 거리가 먼 황야의 진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머리통은 남겨 두마. 나머지 육신은 죄악의 지옥으로 보내 주겠다.”
그때였다.
퍼억!
거대한 도끼가 허공을 가로질러 대지를 찍어 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형언 불가라, 호연종조차도 몸이 먼저 반응해서 피했을 정도였다. 생각하고 움직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만큼 빠르고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호연종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이 또한 본능적인 반격이었다.
연호정의 손이 마주 휘둘러졌다.
휘이이이이이잉!
폭음은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바람이 일며 호연종의 신형을 수십 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뭐야, 저놈?’
살기는 가득하지만, 위력은 눈곱만큼도 없는 장력이었다.
괜스레 피할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바람에 몸을 실었더니 하늘을 날게 되었다. 실로 대단한 바람이 아닐 수 없었다.
‘위력은 없는데 나를 허공에 띄워?’
호연종의 두 눈이 푸른 광채를 뿜었다.
사라라라락!
나뭇가지를 밟아 가며 불어닥치는 바람을 흘려 낸 호연종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
호연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십여 장 바깥, 그와 똑같이 나뭇가지 위에 서서 이곳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번쩍!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는 자신을 노려보는데, 그 눈빛이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화르르르륵!
붉게 물든 눈동자는 불보다는 핏빛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불타오른다. 혈화(血火)였다. 피로 물든 안광이 주작의 살기를 받아 미친 듯이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 놈이 아니었군. 반로환동이라도 했나?”
우두둑.
호연종이 손목을 풀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연호정의 대답은 단순했다.
“시끄럽다.”
퍼어어어어엉!
그 한마디와 동시에 나뭇가지를 박차고 쏘아지는데, 그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이 정도 소리, 이 정도 진동이면 신기자가 있는 곳까지 들릴 게 분명했다.
‘이 새끼가!’
돌진하는가 싶었더니 어느새 코앞이다.
짧은 순간, 호연종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자칫 잘못하다간 역으로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대 역시 자신이 이룬 경지에 올라선 반선(半仙)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악! 콰르르르릉!
하늘 높이 날아오른 호연종, 그가 있던 자리를 휩쓴 통천부의 경력이 나무 대여섯 그루를 박살 냈다.
퍼어어엉!
솟구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강한다.
허공에 진기의 벽을 만들어 박차고 나아간다. 허공에서도 방향 이동이 자유자재다.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방식에 지극히 익숙해 보였다.
호연종이 진짜 고수라는 증거였다.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투쟁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손에 넣은 무결점의 강자라는 것이 그 한 수로 밝혀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확대되는 적의 얼굴.
십 장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살벌하고 파멸적인 살기가 두 눈에 가득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살기는 처음이었다. 눈빛 자체가 또 하나의 무공이라도 되는 듯, 섬뜩한 느낌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놈, 위험해.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호연종의 주먹이 연호정의 안면으로 쏟아졌다.
콰콰쾅!
일권(一拳)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발경은 연환으로 중첩되어 있었다.
연호정의 몸이 거목을 사선으로 부러트리며 땅에 처박혔다.
파바박!
귀신처럼 빠른 경신술로 연호정이 처박힌 곳에 도착한 호연종은 순간 깜짝 놀랐다.
‘없다?!’
그때, 그는 누군가가 바늘로 목덜미를 사정없이 찌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도 호연종의 본능이 그를 살렸다. 허공 높이 떠오른 호연종의 몸은 천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매와 같았다.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치리리링!
호연종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한 줄기 철쇄가 그의 허리를 꽁꽁 묶고 있었다. 피할 새도 없이 묶인 상황, 엄청나게 빠른 포박이었다.
‘이런!’
양손으로 철쇄를 잡은 그가 음황사기(陰荒邪氣)를 끌어 올렸다. 힘으로 철쇄를 뜯어 버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훅!
철쇄에 묶인 몸이 호선을 그리며 땅으로 휘어 떨어진다.
그 속도가 그야말로 엄청났다. 휘몰아치는 강풍, 천하의 고수인 그가 눈을 뜨기조차 힘들 정도의 속도였다.
콰아아앙!
땅에 파묻힌 호연종의 몸에서 또다시 황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우우우우우우웅!!
백색의 진기로 가득 찼던 교룡쇄가 어느새 음황사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
기이한 불꽃을 튀기며 백색 진기를 밀어 내는 음황사기의 힘은 실로 압권이었다. 침투에 능한 진기, 강력한 힘에 부드러움까지 겸비했다. 호왕의 힘으로 가득했던 교룡쇄의 칠 할이 음황사기로 물들어 버렸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륵!! 퍼어엉! 퍼어엉!
교룡쇄 주변의 나무들이 화염 폭풍에 휩쓸려 폭발하듯 부서졌다.
화아아아악!
밀려 나가는 호왕의 등 뒤, 불꽃의 날개가 힘을 더해 화염의 광풍을 일으켰다.
호연종의 눈에 핏발이 섰다.
치이이이익!
양손으로 쥔 철쇄의 끝부분에서부터 전달되는 열기가 순식간에 음황사기를 밀어 내곤 손바닥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치리리리리링!
호연종이 재빨리 몸을 회전하여 허리를 묶은 철쇄를 풀었다.
촤르르르륵!
갈 길 잃은 교룡쇄가 땅을 기는 뱀처럼 바닥을 훑더니, 순식간에 연호정의 소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훅!
연호정의 우측 어깨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교룡쇄가 빨려 들어간 오른팔에서 난 연기였다.
호연종이 외쳤다.
“이 개새끼가 뭐 하자는 짓……!”
훅!
순간 호연종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상대가 좌측방 하단에서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요란한 방식으로 질주한 게 아닌데도 엄청나게 빨랐다. 음습하고 날카로운 이동술, 말 그대로 한 마리 뱀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도낏자루가 휘어질 정도의 속도.
호연종이 양손에 음황사기를 가득 담아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충격파로 인해 주변 나무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우수수 쓰러졌다.
그 범위만 반경 이십 장이 훌쩍 넘었다. 초고수들의 격전, 그 부딪침으로 생성된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너!”
주르륵.
도끼날을 막은 호연종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천하의 어떤 신병이기를 상대로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던 그의 손이, 평범한 강철로 만든 도끼날을 막았다고 터져 버린 것이다.
“너 뭐야, 이 미친놈아!!”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환하게 웃음 짓는 그의 얼굴 위로, 상처투성이 흑암성주의 귀기 어린 살의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흑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