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8)
68화. 상대(相對)는 있어도 절대(絶對)는 없다 (3)
모용군이 냉엄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서로를 바라보던 와중, 비로소 음식과 술이 나왔다.
“탁자에 놓아 주게.”
“예.”
점소이가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음식을 놓았다. 청년 하나가 피범벅이 된 채로 앉아 있었으니 겁먹을 만도 했다.
그렇게 점소이가 나가자, 모용군이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게나.”
연호정의 잔을 채워 준 모용군이 자신의 잔도 채웠다.
“듬세.”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술은 생각보다 더 썼다.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리던 모용군이 곧이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빨랐구먼.”
“무슨 말씀이신지?”
“허허, 우리의 대화가 지나치게 빨랐다는 생각이 드네. 그렇지 않나?”
모용군이 웃으며 자세를 느슨히 했다.
“방금까지 주고받았던 대화는 잠시 뒤로 미뤄 보세. 그래, 연호정이라 하였지?”
“…….”
“내 그래도 한 가문의 주인일세. 강호에 나름 이름을 알린 검객이기도 하며, 칠대세가의 일익을 담당하는 인사이기도 하네.”
“알고 있습니다.”
“자네는 그런 사람을 하남으로 오라 하였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저와 손을 잡을 생각이시라면, 그때 하남으로 오시라 하였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네는 날 불렀네.”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없다네. 그저 한 가문의 주인과 그이의 딸이 나들이 삼아 나온 자리에, 우연히 같은 칠대세가의 장자를 만난 자리로 끝날 수도 있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이 웃으며 물었다.
“청랑귀를 없앴든 소림을 부르든, 우리의 관계부터 명확히 짚고 나서 진행해도 늦지 않을 듯싶네만.”
노련하다.
연호정은 파격적인 모습으로, 파격적인 언행으로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끌고 왔다.
하지만 모용군도 만만치는 않았다. 절묘한 순간 얘기를 끊고 하나하나 확실히 해 두자고 한다. 자칫 상대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뺏길 수 있는 상황에서 적절하게 끊어 낸 것이다.
노회한 화술이었다. 이득은 챙기되 손해는 보지 않는, 무인이라기보다는 상인(商人)에 가까운 태도였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한 잔 더 따라 주십시오.”
“음? 허허, 그거야 어렵지 않지.”
모용군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받은 잔을 재차 넘긴 연호정이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괜찮은가?”
“속이 따끔따끔합니다.”
“내상 입은 몸으로 독한 술까지 마시다니, 젊다고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말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해서, 가주께서는 아직 저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까?”
“이 사람이? 이번 도박의 판돈은 누가 가져갈 것인지, 다음 판에서는 누가 판돈을 올려 줄 것인지, 마지막 판에선 누구의 패로 승부를 볼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 봐야지. 주판도 튕기지 않고 성사되는 거래도 있다던가?”
“우리 사이에 튕길 주판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세상 어떤 부당한 거래라도 판돈의 삼 푼은 가져가야 하네. 거래란 그런 걸세.”
연호정은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군.’
관록 있는 세도가의 주인. 노회한 초절정 고수.
모용군은 옛날과 똑같았다. 상대가 급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더 강한 여유를 안고 시작한다. 어떤 순간에도 빈틈은 보여 주지 않으며, 상대의 심리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조정한다.
흑암제 시절 보았던 검신 모용군과, 지금 연호정으로서 보는 세가주 모용군은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은 모용군을 알고 모용군은 자신을 모른다는 것.
‘뭐지?’
모용군은 내심 의아했다.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젊은 청년. 그 청년의 얼굴에는 어떠한 당황도 없었다.
‘자신이 있다는 겐가?’
그런 걸 떠나, 천하의 모용세가의 주인과 대면하며 이렇게 긴장 없는 녀석은 처음 봤다.
다른 건 몰라도 배짱 하나는 천하제일을 논해도 되겠다. 이런 놈은 뭘 해도 사고 한 번은 치고 떠날 놈이다.
비로소 모용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을 도와주는 암중 방수 따위는 없군. 그 서신을 쓴 건 분명 이 녀석이야.’
모용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연가주. 당신 자식 농사 하나는 제대로 지어 놨구먼.’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전 귀측과 영원히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으음?”
“저야 꿈을 위해 달려 나가는 가주님의 목적 지향적인 삶에 박수를 보내 드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 것 같지 않더군요.”
모용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면 그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무엇을 말입니까?”
“천하제일가, 그리고 무림맹주. 쉽게 나올 말은 아니지. 자네가 굳이 그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단어를 서신에 써 놓은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네.”
“하면 아닙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로군.”
“답을 드릴 게 있어야 말이지요. 천하제일가를 꿈꾸고, 무림맹주의 위(位)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야망가임을 알고 있는데, 달리 답해 드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
“서신 한 글자, 한 글자에 의미를 두진 않았습니다. 안심하시길.”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연호정이 확신을 하고 있음을.
자신이 코웃음을 쳐도, 아니라 부정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 그게 사실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모용군은 순순히 인정했다.
“어떻게 알았나?”
“가주의 야망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내가 본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림맹주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어떻게 알았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칠대세가의 주인 정도 된다면 누구라도 꿈꿀 수 있는 바입니다.”
“서로가 가진 패를 다 꺼낸 판이니, 판돈만 나눠 가지도록 하세. 다시 묻겠네. 어떻게 알았나?”
“하면 이번 판은 제 승리 같습니다만?”
“…….”
“궁금하시다면 직접 알아보셔야지요.”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씨익 웃었다.
“빈틈이 없군. 감탄했네.”
“별거 아닙니다.”
모용군이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이번에는 연호정 역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묘하지?”
시원하게 잔을 넘긴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서신을 받고,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네. 아니 그럴 수 없지. 자네는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내 생각과 꿈은 물론 호연지기까지 건드렸다네.”
“영광입니다.”
“하나 묻지.”
모용군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만일 내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홀로 날뛰어야지요.”
“홀로 날뛴다…… 명가를 상대로?”
“동시에 모용가도 상대해야겠지요.”
모용군이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천하제일가를 꿈꾸는 가문이 다른 세가 곳곳에 세작을 뿌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연가 같은 경우, 사업체를 집어삼키는 것도 모자라 명가와 함께 멸문까지 시켜 버릴 예정이었지요?”
“…….”
“저야 제법 고독한 싸움으로 생을 마감하겠지만, 가주님께선 어떻습니까? 그 소문 한 방으로 꿈 하나는 내려놓으셔야 할 겁니다만?”
모용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네의 목숨과 본가의 명예를 저울대에 올려놓자?”
“더 올리셔야지요.”
“무엇을?”
“제 뒤에는 연가와 개방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모용세가의 명예가 대단해도, 구파일방의 하나와 칠대세가의 하나가 함께하는 저의 목숨값보다 값질 것 같습니까?”
“……자네 혼자라면 모를까, 두 집단이 힘을 실어 주는 광풍사라면 확실히 버겁지.”
“이번 판도 제 승리 같습니다.”
“하하하!”
모용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용연화는 깜짝 놀랐다. 그는 아버지가 저리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모용군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자네, 정말 대단하구먼.”
“과찬이십니다.”
“결코 과찬이 아니라네. 이제 약관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들었거늘 그 젊은 나이에 어찌 이만한 관록과 안목을 키웠을꼬?”
“여기저기 치이면서 살면 알아서 그렇게 됩니다.”
“허허허.”
모용군은 진정 즐거웠다.
자신의 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였다. 필요하다면 아무 상관 없는 문파도 하룻밤에 잿더미로 만들 위인이 그였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성품. 그러나 사람의 성격은 절대 단순하지 않은 법이다.
뜻밖에도, 모용군은 연호정이 마음에 들었다. 저 남다른 배포와 두뇌, 날카로운 안목으로 자신에게 당당히 패배를 안겨 준 젊은이가 마음에 든 것이다.
매력적인 후기지수였다. 보통 이리 뻣뻣하게 나오면 건방지다고 느끼기 마련인데,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또 하나의 전우(戰友)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와 비슷한 안목과 사상을 갖춘 벗을 보는 듯하다고 할까.
모용군이 웃으며 연호정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잔을 든 그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명가를 날려 보세나.”
연호정 역시 마주 웃으며 잔을 들었다.
“좋습니다.”
찌잉!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잔을 부딪쳤다.
단번에 술을 비운 모용군이 말했다.
“기왕지사 손을 잡았으니, 얘기 질질 끌지 마세.”
“바라던 바입니다.”
“정녕 소림을 끌어들일 생각인가?”
“같은 하남에 자리 잡은 문파입니다. 게다가 소림의 위상이라면, 명가가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라면 거기서 하나 더 얹겠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모용군이 차분하게 말했다.
“비밀리 임시 무림맹(武林盟)을 소집하겠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임시 무림맹을요?”
“그렇다네. 소림의 힘과 위상이야 천하제일을 논한다지만, 그들로는 부족해. 소림은 구름 위의 신선 같은 존재일세. 그래서 강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약해질 수 있다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세가가 가진 결정적인 한 수, 대략 감이 잡히는군요.”
모용군이 마주 웃었다. 그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이래서 똑똑한 사람과는 대화하기가 편하군.”
“명가에도 세작을 심으셨습니까?”
“자네도 다 알고 있던 것 아니었나? 아까 말한 걸 보고 이미 짐작한 걸로 생각했네.”
“짐작은 했지만 확신은 없었지요.”
“헛! 이번에도 한 방 맞았군.”
“안주를 안 먹어도 배가 든든합니다.”
“하하하!”
두 사람을 보는 모용연화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걸 느꼈다. 상대가 자신의 격에 충분히 어울리는 사람이라 인정한 것이다.
‘그 정도인가.’
기실, 모용연화는 두 사람의 빠른 대화를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깊게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간다.
그야말로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는 노회한 정치가들의 대화 같다.
그리고 아직 그녀는, 그들과 같은 영역에 오르지 못했다.
모용연화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가 생겼다.
“하면 언제부터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시간 길게 끌 것 없지. 자네는 명가의 암사대, 청백무병과 호명전, 나아가 청랑귀까지 물리쳤네. 그만하면 명분은 충분히 모았어.”
“임시 무림맹을 소집하시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자네 생각보단 빠를 걸세. 칠대세가의 가주에겐 여러 권한이 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다만, 그래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야. 그동안 자네는 명가의 마수(魔手) 앞에서 어떻게 버틸 생각인가?”
그때였다.
연호정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놓고 가시오.”
스륵.
창밖에 나타난 거지 한 명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서신 하나를 올려 두고 사라졌다.
연호정이 서신을 펼쳤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저도 제법 지쳐서 말입니다. 일대일 결전이라면 또 모를까, 우르르 몰려오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하면?”
연호정이 모용군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가가 강소성에?”
“저도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부분을 조사 중이신 줄.”
“허허,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선 시운(時運)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네. 그 정도 거창함은 없지만, 적어도 명가를 치기에 부족함은 없구먼.”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쉬러 가겠습니다.”
모용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이 많았네. 가서 푹 쉬시게.”
“예.”
“그리고 죽지 말게. 자네가 죽으면 오늘 이 자리,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가의 우모침으로 전신이 도배되더라도 꾸역꾸역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하! 실없기는, 하필이면 왜 우모침인가? 하하하!”
연호정이 입구에 세워 둔 도끼를 들었다.
“가 보겠습니다.”
“잘 가시게.”
몸을 돌려 문을 연 연호정.
뒤에서 모용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소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무심하게 바뀌었다.
‘많이 웃어 둬라. 다음은 너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