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690)
◈690화. 흐름을 바꾸는 자 (1)
“헉헉!”
기어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제아무리 대단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그 내공도 무한한 게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내공과 체력은 다른 문제였다. 내공이 깊으면 보통 체력도 좋지만, 보유한 내공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아무리 많은 내공을 지녔다 한들 효율적으로 쓸 수가 없다.
그녀는 무림 최고 수준의 내공을 지녔고, 체력 역시 극단적으로 발달시킨 고수였다.
그러나 하남에서 섬서까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며칠을 달려왔다. 천하의 고수라도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등 뒤에는 팔십 근이 넘는 신병이기까지 달고 있었으니 더더욱.
‘어쩔 수 없다.’
그녀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체력을 회복해야 해.’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공기 중에 묻어 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가까워.’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전장이 가까워졌음을.
실제로 땅을 박차면서 강한 진동을 몇 번이나 느꼈다. 초고수들끼리의 격전 때문인지 화탄이라도 터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자연적인 충격은 아니었다.
‘이미 싸움이 벌어졌다는 뜻. 지체할 시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힘을 다 빼고 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그녀는 ‘그’를 믿었다. 준비성 철저한 그라면, 제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하룻밤 정도는 버틸 만한 계책을 준비해 뒀을 것이다.
거기에 개방에서 받은 정보를 생각하면, 전투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터.
‘바꾸자.’
스르륵.
탄력적으로 뻗어 나가는 다리.
의식하는 순간 신법이 저절로 변형된다. 심신일체, 극한의 수련 없이는 보여 주기 힘든 모습이다. 타고난 재능, 풍부한 내공, 극단적인 훈련, 밀도 높은 실전으로 그녀는 그처럼 지고한 경지에 올라섰던 것이다.
츠츠츠.
‘역시.’
지금껏 그녀가 사용했던 신법은 무림 최고 명문가 중 하나에서 자랑하는 천종운행비라는 신법이었다.
궁사(弓師)인 그녀에겐 충분히 빠르고 안정적인 신법이 있었지만, 장거리 이동에선 천종운행비가 조금 더 효율적이었다. 그녀는 그 놀라운 무공을 일세의 대협에게 즉석에서 배웠다.
천종운행비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곳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터.
다만, 이제부터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내공이 차고 있다.’
궁사의 무공은 동공(動功) 위주였다.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내공을 수련하고, 동시에 심신의 안정을 꾀한다.
그러한 특성을 극한까지 살려, 속도는 줄이되 내공 회복은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후우우우웅!
여인의 몸에서 은은한 회색빛 진기가 일렁거렸다.
흘러넘칠 것 같은 방대한 양의 진기. 세상을 삼켜 버릴 정도로 거대한 홍수가 하늘까지 넘본다(洪天)는 이름의 광오한 신공(神功)이, 심폐 능력을 빠르게 정상화시키고 있었다.
“후우우!”
험한 산길을 넘는데도 얼굴에 화색이 돈다.
소모되었던 내공이 무서운 속도로 차오르고, 차오른 내공은 이내 전신 근육으로 퍼져 대량의 공기를 쑤셔 넣었다.
근육에 활력이 생긴다. 심폐 능력이 정상화되니, 내공 회복에도 더욱 탄력이 붙었다.
우우우우웅!
흘러넘쳐 육안으로도 보이던 진기가 다시 몸속으로 들어갔다. 회복 과정 자체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이다.
‘서두르지 말자.’
하지만 자꾸만 마음이 급해지려 했다.
‘그’를 믿지만, 거리가 좁혀질수록 공기 중에 묻어 나오는 살기가 명백해지고 있었다.
한두 명이 자아내는 살기가 아니다. 수백 명의 기합이 묻은 살기가 얽히고설켜 공기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천지에 위험하지 않은 전장은 없는 법.
아는 사람은 ‘그’를 투왕(鬪王) 혹은 전신(戰神)이라고도 부르지만, 사람인 이상 보이지 않는 칼에 맞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믿자. 괜찮을 거야.’
우우우웅!
‘돌아오겠다는 말,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을 저버릴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니까.’
우우우우웅!!
머리는 냉정해지려 애썼지만, 가슴에 고인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함성.
쿵! 쿵!
그 너머로 보이는 시뻘건 불꽃.
거대한 산 곳곳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이 치솟는 산 너머, 제법 큰 산봉우리 하나는 완전히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여인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스읍!
짧게 숨을 들이쉬니, 눈으로 보고 기감으로 느꼈던 모든 것들이 한층 더 명확해진다.
‘저기다!’
쿠구궁!
종남 본산 너머에서 전해지는 막강한 충격파.
본산에서 천 단위의 병력이 부딪치고 있는데도, 그보다 더 인상적인 충격파가 불붙은 산봉우리에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거기에 ‘그’가 있다는 것을.
‘조금만 기다려요!’
재차 땅을 박차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
그녀의 발이 멈칫했다.
‘어린아이?’
시선을 내려 우측을 바라보았다.
번쩍!
용안(龍眼)이 빛을 발했다.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의 기운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정종 신공의 기운이 부딪치며 화려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궁사의 눈은 평범한 무림인의 눈보다 훨씬 더 예리한 법.
그녀의 눈에, 충돌하는 무사들 뒤쪽으로 빠져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포착되었다.
‘…….’
잠시지간 침묵하던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파아아아앙!
비탈길을 내려가는 그녀의 신법은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격정적인 신법. 전장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그녀의 육신은, 지금 이 순간 멸문한 흑도 문파들이 두려워했던 희대의 여장수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웠다.
귀궁신녀(鬼弓神女) 묵비.
무림맹 의정군의 최고 간부이자, 당대 궁술(弓術)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천재 궁사.
관일곡의 모든 무(武)를 완성한 것도 모자라, 시공을 초월한 흑암의 신공 홍천기(洪天氣)까지 전수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을 적은 아무도 없었다.
터어어엉!
어느새 손에 쥔 붉은 활에는 다섯 개의 철전(鐵箭)이 끼워져 있었다.
벼락처럼 시위를 당긴 묵비의 손에 폭발적인 발경이 실렸다.
콰르르르릉!
쩌어어어어엉!
용국진인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파바박!
매화 문양을 그려 내는 오행의 보법으로 접근한 그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아악!
화산의 검답지 않게 무척이나 사납고 광포한 검결이 하복을 향해 휘몰아쳤다. 화산 절기, 백팔식광풍쾌검(百八式狂風快劍)이었다.
하복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딜!”
쩌저저저저정!
만도를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은데, 치고 들어가던 사나운 검초가 모조리 튕겨 나갔다.
‘이!’
순간적으로 검을 쥔 손아귀에 감각이 없어졌다. 도검이 부딪치는 충격이 너무 강했다. 깊고 강한 화산의 내공으로도 충격을 분산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런 놈이!’
파아앙!
용국진인은 물러섬을 몰랐다.
하복이 매화검수들을 죽이려 이동했지만, 그는 끝까지 하복을 향해 검결을 내쳤다.
두 사람의 무공 차이는 명백했다. 같은 초절정이라 해도 깊이가 다르다. 용국진인 정도 되는 실력자 셋이 동시에 덤벼도 하복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만 세 배 이상의 전력 차, 그런데도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목이 날아가기 전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것이었다.
하복이 귀찮다는 듯 만도를 사선으로 그었다.
쾅!
용국진인의 입에서 기어이 피가 튀었다.
단 일도(一刀)였다. 일도에 화산낙화검의 경력이 올올이 풀려 나가고, 검주인 용국진인의 가슴에 도상까지 만들어 놓았다.
‘엄청나구나!’
적이지만, 상대의 도에 담긴 패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힘만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일거에 제압하는 막강한 묘리가 가득했다. 단순함 속에 녹아든 깨달음, 새외의 무공이 중원의 무공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도법이었다.
푸화아악!
하복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있었다.
여유가 있는데도 빠르고 냉혹했다. 삽시간에 매화검수들 앞으로 가서 삼도(三刀)를 휘두르는데, 칼질 세 번에 매화검수 셋의 목숨이 날아갔다.
툭! 투둑!
떨어지는 검수들의 머리, 놀란 표정 그대로 흙밭을 뒹군다. 본인이 죽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있는 힘껏 내공을 끌어모아 내친 것도 아닌데, 칼질 한 번에 절정고수 한 명의 목이 달아났다.
차원이 다른 무(武)였다. 무학의 대단함을 떠나, 적의 가장 취약한 사각을 본능적으로 파악하여 칼을 밀어 넣었다. 최소의 힘으로 적을 제거하는 살법(殺法)의 이치가 눈부셨다.
하지만 무의 이치를 논하기에는 아끼고 아끼던 화산 제자들의 목숨이 너무 쉽게 저승으로 떠나 버린 상황이었다.
“이놈!!”
분노한 용국진인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하복이 인상을 찡그렸다.
“뭣들 하느냐!”
쩌저정!
연환으로 몰아친 도법에 용국진인이 다시 튕겨 나갔다.
“이 애송이들은 내가 휘저어 줄 것이다! 너희는 어서 가서 애들 모가지나 따 와!”
파바바바박!
매화검수들과 대치하며 신경전을 벌이던 혈랑들이 그 순간 땅을 박찼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매화검수들은 어설픈 이들이 아니었다. 모두가 백전으로 연마된 화산의 자랑들인 것이다. 혈랑들이 공중으로 몸을 날려 봤자, 허공으로 검격을 난사하면 그들 모두 목숨이 날아갈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목숨을 아끼지 않는 태도였다.
매화검수들이 혈랑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저정! 퍼억!
혈랑 넷의 몸이 갈갈이 찢겨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놀랍게도 수십 명의 검사들이 휘두른 검격이 거대한 도광(刀光) 한 줄기에 대부분 박살이 나 버렸다.
순간적으로 싸움이 멈췄을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깜짝 놀란 매화검수들이 도광이 날아든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욱!”
하복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수준 차이가 크다지만, 절정고수 수십 명의 검격을 일격에 막으려 들었다. 폭발적인 내공 소모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확실했다.
“개방의 거지들이 따라붙었다! 놈들과 싸우지 말고 애새끼들부터 족쳐!”
끔찍한 명령이었다.
용국진인이 외쳤다.
“매화검수들은 놈들의 뒤를 따라……!”
퍼어엉!
“컥!”
용국진인이 재차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너무나도 무기력하다. 그 역시 섬서에서 이름난 고수가 분명할진대, 하복이 내치는 도법과 장력의 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복 역시 기분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끈질기구나, 화산의 말코.”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지만, 혈랑사도(血狼死刀)의 무공과 부딪치고도 죽지 않았다. 방금 내친 낭표장(狼飄掌)에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다섯 합 안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이지 목숨 줄 한번 질긴 놈이었다.
“안 되겠군. 일단 네놈부터 죽여야겠다.”
우우우우웅!
하복의 만도에 끈적끈적한 붉은 기운이 휘몰아쳤다.
일도에 결딴을 내 주겠다는 의도가 명백한 기운이요, 자세였다.
용국진인의 얼굴에 허망한 빛이 어렸다.
‘이리 허무하게 당하는가.’
기가 막혔다.
위대한 화산의 무공으로도 외적, 그것도 전투 부대 대장 하나 짓누르지 못하다니.
용국진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목숨으로 아이들을 지켜라! 마지막 명령이다!”
하복이 비웃었다.
“머저리 같은 놈!”
번쩍!
한 줄기 붉은 도광이 용국진인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용국진인 역시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이 채 절반도 휘둘러지기 전에 하복의 칼은 용국진인의 머리 세 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렇게 가는구나.’
그때였다.
퍼퍼퍼퍼펑!
다섯 줄기 폭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코앞에서 터졌다.
용국진인이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온몸 가득 내공의 방벽을 둘러쳤지만, 충격파가 너무 강해서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쿨럭!”
뭐지? 죽지 않았나?
고개를 몇 번 흔든 용국진인이 하복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허공을 물들인 아홉 줄기 빛깔이 하복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는 광경을.
그 아홉 줄기의 빛은 마치 하늘에서 강림한 아홉 마리의 용과 같았다.
하복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이건 또 뭐……!!”
콰콰콰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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