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00)
◈700화. 승패는 없었다 (6)
‘누구지?’
진양은 당황했다.
당황한 와중에도 묘하게 가슴이 떨렸다.
후욱!
어둠을 등지고 선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었다.
피로 물든 의복, 찢어지고 닳아진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괴물의 머리에 자라난 수만 마리의 실뱀처럼 보였다. 어둠으로 가득한 얼굴 위, 보석처럼 박힌 붉은 눈동자는 마주하기 힘든 위엄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저 도끼.
오른손과 창대가 까만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혹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함인지, 본래 그렇게 사용하는 병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 도끼마저도 시커먼 빛이었다. 도끼날 바깥쪽은 푸르스름했지만, 남자가 풍기는 위엄과 살기 덕분에 그마저도 어둡게 보였다.
어둠, 그리고 어둠.
실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착각할 만큼의 외양이었다. 어딘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존재감이었다.
‘이 사람…….’
자신을 굽어보는 압도적인 존재에 진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존 본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였다. 그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존재 앞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그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위압감 때문에? 그렇지 않다.
생존 본능마저도 무시하는 무언가가 그의 발길을 잡아 놓고 있었다. 상대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도망치고 싶은 상대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게끔 붙들고 있는 것이다.
진양 스스로도 모르는 ‘그것’.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다.
“나를…… 아시오?”
“…….”
알지. 알다마다.
괴물,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진양인가.’
칠 척에 달하는 거구, 어딘지 모르게 짓궂으면서도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
굴강하게 단련된 근육부터 손에 들린 화려한 청룡언월도까지.
분명 진양이었다. 젊을 적 진양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천하의 연호정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 가득상이 입을 열었다.
“연 대수.”
연호정이 가득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득상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우.”
가만히 가득상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잉?”
“필요한 일이었소만, 후개 스승에게 몹쓸 짓을 했소. 사과드리오.”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너무나 반가운 출현 때문에 순간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고개를 든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주먹질할 시간은 반드시 만들겠소. 하지만 지금은 안 되겠소.”
“…….”
“이해해 주시오.”
가득상은 생각했다. 참 어려운 남자라고.
보는 것만으로도,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연호정은 언제나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얼굴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하는 것이리라.
‘……참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진심.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많이 다쳤소?”
“적장을 죽였소. 전투는 가능하오.”
“그래 보이는군.”
가득상이 몸을 돌렸다.
“도동들과 학도사들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소.”
“알겠소.”
“아, 그리고 옆에 그 양반은 아군이오.”
파아아악!
그 많은 병력을 휩쓸어 버렸지만, 아직도 이곳에는 수십 마리의 혈랑이 있었다.
하지만 가득상은 아무런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알기 때문이다. 보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어떤 경지에 올랐는지.
‘정말이었어.’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정말 무극을 열었구나!’
스승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곧 성천의 열세 자리가 열네 자리로 바뀔 거라고 하셨더랬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놀라움이 연호정을 만난 순간 충격으로 바뀌었다. 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히 고개조차 들기 힘든 위엄을 안고 있지 않은가.
가득상은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그리 편하게, 친하게 알고 지냈던 전우가 이제는 손에 닿지도 않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것 같다. 가히 질투조차 나지 않을 강함이었다.
‘괜찮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감.
가득상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사람이다. 우리처럼 뼈와 살이 있는 사람이야.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고 하여 남처럼 대할 이유가 없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잠시.
가득상이 미소를 지었다.
‘싸움만 끝나 봐라. 그 멋들어진 얼굴에 발바닥으로 싸다구를 날려 주지.’
후우우우웅.
그렇게 가득상이 사라졌다.
“…….”
묘한 침묵이 어렸다.
진양의 왼손이 꿈틀거렸다. 가만히 서 있기가 애매했다.
가만히 진양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떻게 왔지?”
저도 모르게 하대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진양 역시 상대의 말투가 어쩐지 당연하게 들리는 걸 느꼈다.
“종남을 도와 달라는 요청이 있었소.”
“혼자?”
“아니오. 화웅문이라는 문파의 문주가 나요.”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화웅문.
불붙은 곰이라는 뜻, 짧게는 불곰이다.
흑암제 시절에도 유명했던 별명이었다. 당시 말수가 없던 묵비조차 진양을 불곰이라고 불렀다. 그 덩치와 특유의 무공을 생각하면 딱 어울리는 별명이라 하겠다.
시대, 아니 시공이 다른 세상에 떨어졌어도.
많은 것이 변하는 와중에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진양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연호정이 물었다.
“호선대희루라고 아나?”
“……?!”
“가고 싶은가?”
진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호선대희루. 장난처럼 떠들어 댔지만, 항상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던 명소였다. 그의 세 가지 소원 중 하나였다.
“어떻게 아시오?”
거친 세상을 살아왔던 진양이다. 굳이 아는 척해서 경계심을 실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걸 알고도 연호정은 그를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이어져 있었던 거냐.’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만나게 될 인연이었다는 건가.’
모르겠다.
무극을 열었다고 하늘의 뜻을 아는 게 아니다. 애초에 하늘을 믿지도 않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연호정은 느끼고 있었다. 뭐라 정의할 수 없어 하늘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뿌려 놓은 인연의 실이, 정말 실재할 수도 있다는 걸.
“저들을 막지 못하면, 네가 그렇게나 가고 싶어 하는 호선대희루도 불에 타 없어질 것이다.”
“나를 아시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전장에서 네 실력을 보여라.”
진양이 서둘러 물었다.
“나를 아느냐 묻잖소!”
“와라.”
“설마 내 주변에 사람이라도 심어 둔 것이오?”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면, 굳이 사람을 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찾아갔겠지.”
“……?!”
“얘기는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하지. 바쁘다.”
후웅!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혈랑대원들은 피하지 못했다.
연호정이 힘차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피와 육편이 사방에 날아다녔다.
순간 정신이 든 혈랑대원들이 뒤늦게 병기를 휘둘렀지만,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매화검수들 역시 정신을 차리고 혈랑대를 공격했다. 이 믿을 수 없는 고수가 아군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남은 것은 섬멸뿐이었다.
연호정을 보던 진양이 나직이 이를 갈았다.
“……제기랄!”
파아아악!
빠른 속도로 따라붙은 진양이 힘차게 청룡도를 휘둘렀다.
콰르릉!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신장(神將)이라 불리던 때와 비교할 순 없지만, 힘찬 도격(刀擊)만큼은 분명 당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진양의 독문무공, 상천뇌화도(翔天雷火刀)였다. 아직 극의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 전장에서 충분히 활약하고도 남을 위력이었다.
한순간 전장을 휩쓸어 버린 연호정이 매화검수들에게 외쳤다.
“남은 잔당을 처리하고 본산으로 오시오! 먼저 가겠소! 화산의 장로는 죽지 않았으니 함께 데려오시오!”
그가 진양에게 말했다.
“가자!”
“제길! 누군지도 모르는데 명령하지 마시오!”
파아아앙!
두 사람의 산길을 달렸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서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묵비의 공력 덕분일까? 아니면 뜻밖의 장소에서 반가운 얼굴을 봐서일까?
광명신단의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었다.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진기가 충만한 힘을 선물해 주고 있었다.
훅!
연호정의 신법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 뒤를 따르는 진양 역시 속도를 높였다. 덩치와 다르게 그의 신법 역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부하들을 데리고 왔나?”
“그렇소!”
“그쪽으로 가겠다!”
청목애 측에서 휘몰아치는 군기(軍氣)를 읽은 그였다. 치열하지만 동시에 정교한 전장이었다. 황석태의 지휘 아래, 어떻게든 잘 대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사도암 측은 달랐다.
종남 검진의 힘이 중구난방이었다. 더하여, 낯선 기세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들이 아마 진양의 부하들일 것이다.
파아아아아앙!
연호정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진양의 눈이 흔들렸다.
‘뭐 이리 빨라?!’
언뜻 보아도 심각한 내외상을 입은 몸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진다. 무한의 공력을 품은 듯, 땅을 박차는 발끝에 생명력 넘치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진양은 모를 것이다. 연호정의 심정을.
먼저 찾아가지 않았음에도 진양을 만난 지금, 그의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진양이 외쳤다.
“시벌! 천천히 좀 갑시다! 나도 다쳤어!”
“엄살떨지 마라. 따라붙지 못할 그릇이라면 함께하자 하지도 않았다.”
“……!”
묘한 말이었다.
그냥 들으면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지만, 조금 더 깊게 들으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연호정에게 있어 오대신장은 그러했다.
무적의 전투술로 천하를 뒤집었던 그 시절, 오대신장 모두가 그와 나란히 섰다.
그에게 오대신장은 분신이었고, 친우였으며, 형제였다.
따라붙지 못할 리가 없다.
흑암이라 부르며 천하가 두려워했던 악인 옆에 당당히 서지 못할 그릇이었다면, 애초에 함께하자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묘하게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말.
입을 다문 진양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연호정의 뒤에 따라붙었다.
파아아아아악!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두 사람의 눈에 피 냄새 가득한 전장이 보였다.
진양이 외쳤다.
“소정광!”
순간 연호정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소정광이라고?!’
방천극을 든 청년, 소정광이 외쳤다.
“문주님이 오셨다! 다들 뒤로……!”
진양이 소정광의 말을 끊었다.
“빠지지 마, 이 머저리들아! 싸워!”
“어억?! 정말요?”
“미친놈아!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왜 물러나! 다 작살내 그냥! 이판사판이야!”
“하여간 변덕 진짜 심하셔!”
쩌저저정!
소정광의 지휘에 따라 화웅문의 병력이 혈랑대를 밀어붙였다.
연호정은 믿을 수 없었다.
하늘의 존재를 믿지 않았지만, 절묘하게 이어져 있는 인연의 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게 될 줄이야.
순간 연호정은 오랜 옛날, 진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재? 흐음, 쓸 만한 인재라…… 그 녀석이 날 기억하려나?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말이오. 어떻게, 한번 찾아볼까?’
그에게 있어 오대신장은 하나하나가 빛처럼 완벽한 인연들이었다.
그들 서로에게 어떤 연이 있는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알고만 있었을 뿐, 제 사람이 된 이상 다 똑같이 대우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해 버린 지금, 당시와 달라진 사건 하나는 천하인 모두의 삶을 바꾸어 버렸다.
만약 진양이 자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고향에서 헤어졌던 넉살 좋은 친구와 함께 큰 사업을 이루려 하지 않았을지.
“진양!!”
연호정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거대했다.
진양이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왜, 왜 부르쇼?”
“후미에서 밀어붙여라! 내가 중간에서 밀어붙이겠다!”
“알았으니까 목청 좀 죽이시오! 깜짝 놀랐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패율 근처의 전장으로 돌진하는 그는, 과거의 인연을 둘씩이나 안겨 준 하늘을 향해 처음으로 감사를 표했다.
“오늘 이 전쟁은 우리가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