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1)
71화. 원수(怨讐), 그리고 원수(原水) (1)
세상엔 참 사건, 사고가 많다.
사람들이 모를 뿐, 하루에도 수천 건의 범죄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중 범인이 잡혀 일단락되는 사건은 오 할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다. 관부나 무림에서 전문 수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지만, 그 수도 적고 중원 땅덩어리가 워낙에 넓어 암중에 묻힌 사건이 많다.
미해결 범죄 사건. 관부도, 무림도 해결하지 못한 중범죄.
그중 강소성에서 터졌던 미해결 사건들이 수면 위에 오른 것은, 따뜻한 봄 날씨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를 즈음이었다.
충격적인 소문은 하남에서 시작해 인근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의 주인공은 바로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었다.
오 년 전, 강소성 휘산 화재 사건 범인 연호정.
오 년 전, 강소성 해민 일가족 집단 자살 사건 범인 연호정.
삼 년 전, 강소성 상주 기녀 간살 사건 범인 연호정.
이 년 전, 강소성 태호본루 화재 사건 범인 연호정.
그 외에 여러 화재, 살인, 강간 등 유사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 농후.
연호정. 벽산연가의 장자.
과거 호부견자라 불렸으나 근래 뛰어난 무공으로 광풍사라는 명성을 얻은 후기지수.
그 명가의 자손이 강소성에서 수도 없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단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하나같이 미해결로 남아 버렸단다.
소문이 준 충격은 무시무시했다. 무림만이 아니라 관부에서도 사실 여부를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소문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출처가 없는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지기도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연호정을 혐오의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이 깊은 이들은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연호정을 욕하는 사람, 사태를 더 지켜보려는 사람, 이상함을 눈치챈 사람 등등.
난리가 난 하남에서, 마침내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저벅저벅.
연호정의 걸음은 산뜻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창응대의 걸음 역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 일제히 좌우로 물러났다.
웅성거림은 없었다.
널찍한 관도를 가로지르며 허창(許昌)으로 향하는 연호정 일행은 몹시도 위풍당당했다.
펄럭!
놀랍게도, 창응대원 십여 명은 길이만 일 장 반이 넘는 깃대를 들고 있었다.
깃대에 달린 깃발에는 거대한 크기로 벽산(碧山), 그리고 연(燕)이라는 글자가 멋들어진 필치로 적혀 있었다.
칠대세가의 일익으로 대협의 가문으로 칭송받는 벽산연가의 행차다. 그 장엄하기까지 한 행렬은 가히 개선장군 못지않았다.
그리고 일행의 선두에는 연호정이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새하얀 무복 위로 종아리 밑까지 오는 헐렁한 백색 장포를 걸쳤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미남형 얼굴, 잡티 하나 없는 백색의 의복은 그를 몹시 고귀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연호정 일행을 보고도 차마 대놓고 비난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들이 칠대세가의 일익이라서? 혹은 첨예한 기도를 유지한 채 이동하는 검객 집단이라서?
그렇지 않다.
사람들의 눈 대부분은 연호정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연호정이 들고 있는 피 묻은 도끼에 겁먹지도 않았다.
우우웅.
한 걸음, 한 걸음.
일 보를 밟아 나갈 때마다 발밑에서부터 신비로운 담청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연호정이라는 인물 자체가 특별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도끼를 들었든 말든, 대나무처럼 꼿꼿한 절개를 지닌 강인한 문사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압도적인 자태였다.
한없이 거칠고 흉포한 흑암제에겐 이런 모습도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선 좌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신비한 모습도 보여 줄 줄을 안다.
‘굉장하군.’
성루처럼 높은 주루 꼭대기에서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이철경(李哲硬)은 혀를 내둘렀다.
‘하남은 소림과 명가 덕분에 중원 무림의 중심지로 평가받는다. 아무리 상대가 무림인이라도 분노한 대중은 상대의 힘이나 위세를 생각하지 않아.’
즉, 힘없는 양민들이라도 대놓고 야유를 보내야 정상이란 말이다.
하지만 저 광경을 보라. 개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듯,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일말의 웅성거림조차도 없었다.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이라는 존재가, 그가 내뿜고 있는 신비로운 기도가 좌중의 입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굉장한 청년이야.’
저런 것은 타고났다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을 부려 본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한데 약관에도 이르지 않았다 하니, 그런 경험이 있을 리 없다. 즉, 타고난 위엄이 저리 대단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만 보면 범죄를 저지른 것 같지는 않은데.’
이철경은 고개를 저었다.
‘속단하지 말자.’
원래 악업을 쌓는 이들 중 대부분이 안 그럴 것 같이 생긴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연호정 역시 이 악소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호정의 이동에 따라 이철경 역시 또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사락.
놀라운 신법이었다.
발목의 힘만으로 지붕을 박차는데, 어느새 몸은 목표했던 건물 꼭대기로 올라섰다.
이룬 성취 이전에 신법 자체의 수준이 뛰어났다. 전신의 미동도 없이 움직이는 절정의 신법이었다.
사람들은 이 신법을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느리군. 이대로 가다간 오늘 밤이 다 되어서야…… 응?’
이철경이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명가?!’
저 머나먼 남쪽에서 관도를 타고 올라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바로 명가였다.
일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오와 열을 맞춰 올라오는데,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연호정 일행처럼 ‘구주명가’ 네 글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철경은 안력을 집중했다.
우웅!
단전에서 솟구친 장중한 진기가 그의 안력을 급속도로 끌어 올렸다.
‘청색당(靑色堂)?’
명가의 산하에는 수많은 무력 조직이 분포해 있었다.
그중 오행당(五行堂)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그들은 각기 적(赤), 청(靑), 흑(黑), 백(白), 황(黃)의 다섯 조직으로 나뉜다.
오행당의 청색당은 목(木)을 상징하며, 그들 모두 창술을 익힌 창수(槍手)들이었다.
‘당연히 연호정의 출현을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이철경은 내심 의아했다.
‘굳이 청색당을?’
그는 어제야 명가가 연호정을 잡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는 걸 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청병무관의 절정고수와 호명전의 무사들을 보낸 건 확실했다. 그리고 연호정은 홀로 그들을 물리쳤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청랑귀와의 전투였다.
청랑귀가 명가 소속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연호정은 칠십의 청랑귀들과 싸워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이철경은 믿을 수 없었다. 기실, 아직도 믿기 힘들었다.
청랑귀는 무공의 강함 여부를 떠나 살인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런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놈들을, 약관에 이르지 못한 청년이 홀로 섬멸했다고?
‘방수가 있었겠지. 한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명가라고 연호정의 힘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한데도 청색당을 파견했다. 아닌 말로 전투가 벌어지면 청색당 정도로는 연호정과 창응대를 막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왜 굳이 청색당을 보냈을까?
쿵!
청색당주 오곡이 창을 찍었다. 그러자 청색당 창수들 전부가 이동을 멈추었다.
어느새 연호정 일행이 청색당과 이십여 장 떨어진 거리에서 접근해 있었다.
오곡이 외쳤다.
“연가의 장자이며 강소성 미해결 범죄사 용의자인 연호정은 들으라!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명가로…….”
오곡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호정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버젓이 청색당이 버티고 선 걸 보고 있음에도.
“오만한 놈.”
오곡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어떻게 한 번 주춤하지도 않는다. 청색당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연호정 일행이 십 장 거리로 좁혀 왔다.
오곡이 재차 외쳤다.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강제로 압송할 것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보행 속도도 그대로였고, 첨예한 기도 역시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 장 거리까지 좁혀졌다.
연호정을 노려보던 오곡이 소리쳤다.
“거창!”
우우우웅.
백 명의 청색당원들이 전방으로 창을 겨누었다.
오곡이 창을 들며 외쳤다.
“청색당은 용의자 연호정을……!”
그때였다.
쾅!
오곡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강하게 한 발 내디딘다 싶더니 어느새 코앞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장포 자락 뒤로,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깜짝 놀란 오곡이 창대를 올렸다.
연호정이 냉정하게 도끼를 내리쳤다.
와직! 퍼억!
창대를 가른 도끼가 오곡을 세로로 쪼개 버렸다.
푸화아악!
선혈이 튀었다.
화선지 위로 붉은 염료를 떨어트린 것 같다. 연호정이 입은 새하얀 장포에 오곡의 핏방울이 묻었다.
“다, 당주님!”
“이놈!”
그때였다.
휘이이잉링!
피 묻은 도끼 주변으로 작고 새하얀 바람의 형상이 모여들었다.
살기를 받아 타오르는 백호기가 호왕(虎王)의 투지를 형성했다.
쾅!
한 발 더 전진한 연호정이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쩌저정! 콰릉!
“크아악!”
“으아악!”
한 번 휘둘러 쓸어 버린다.
도끼가 퍼트린 압도적인 경풍이 전방의 창수 열다섯을 날려 버렸다.
창수들이 쥔 창이 부러졌다. 열다섯 창수의 손은 심하게 망가졌거나 아예 잘려 날아갔다. 순식간에 대열이 망가졌다.
단 일 합으로 청색당 전체의 대열을 흐트러트린 연호정.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을 섬멸하라.”
“존명!”
차아아앙!
견봉에 도끼를 걸친 연호정, 그런 그를 뛰어넘어 돌진한 창응검사들이 무자비한 살수를 휘둘렀다.
서걱! 카아아앙!
“아아아악!”
“차, 창을 들어라!”
일순간 난장판이 되었다.
널찍한 관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연호정의 이동을 지켜보던 양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퍼억! 촤아아악!
“막아라! 막아!”
“이 개새끼들! 감히 우릴 건드리고도…… 아악!”
창응대의 검은 냉정했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휘두르는 살검(殺劍)이었다. 연호정의 압도적인 무공을 본 창응대는 대공자의 무공에 부끄럽지 않은 놀라운 검결을 구사했다.
청색당이 무너지는 건 순간이었다.
수장이 죽고 대열이 흐트러졌으며, 기세에서부터 압도당했다. 게다가 창응대의 무위는 청색당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이건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창응대는 철저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려 신속하게 청색당원들을 죽여 나갔다.
싸움터 한복판.
연호정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는 듯, 유유히 싸움터를 가로질렀다. 눈이 뒤집힌 창수들이 연호정을 공격했지만, 창응검사들은 그걸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지났다.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청색당을 섬멸한 창응대가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펄럭!
납검한 대원들 열 명이 다시 깃대를 올렸다. 그들은 관도를 따라 유유히 남쪽으로 향했다.
양민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