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14)
◈714화. 깨달음의 보고 (4)
떠나가는 연호정 일행을, 순우와 장로들은 산문 입구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구윤이 큰 보따리를 연호정에게 건네주었다.
“먼 길, 약소하게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이것저것 넣었네. 부디 받아 주게나.”
연호정이 웃으며 보따리를 받았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순우가 말했다.
“이대로 묵룡부로 간다고?”
“그렇습니다.”
“하면 언제쯤 다시 세상에 나오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기실, 이번 중원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제 선배님을 모시는 것이었습니다만.”
“음, 떠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사천을 바로잡고 종남 전쟁을 막을 수 있었으니, 충분히 제 몫을 다한 중원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우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세상에 나오면 연락하게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종남만큼은 목숨을 걸고 자네를 돕겠네.”
“마음 절절한 호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 음제 선배의 제자는 걱정하지 말게. 문하로 받지는 못하겠지만, 산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 또한 우리의 가족이야. 잘 지낼 수 있도록 힘을 다하겠네.”
“그래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순우가 황석태와 패율, 묵비와 소정광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대들의 분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연 대수뿐만이 아니라 그대들 모두가 종남의 은인이오. 그 은혜, 죽어서도 갚지 못할 것이오.”
순우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나아가는 앞길에 부디 행운만이 가득하기를.”
일행 모두가 순우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보세.”
그렇게 연호정 일행이 종남산을 떠났다.
한참이나 멀리 걸어가, 이제는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도 순우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구윤이 순우에게 말했다.
“장문 사형.”
“말씀하시게.”
“비록 크나큰 손실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우리 종남에서의 일이 중원에 경각심을 심어 주었을 겁니다. 차후 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음?”
“저는 찬성입니다.”
“무엇이 말인가?”
“천하검과 어룡와선 말씀입니다.”
순우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어렸다.
홍권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삼 사형! 그것은……!”
“제자들을 잃고도 문파의 권위 따위가 중요한 것인가?”
홍권이 얼굴을 붉혔다.
구윤이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추후 이와 같은 전쟁이 또 한 번 벌어져도 우리가 멀쩡하리란 보장은 없네. 우리는 평화의 세상이 아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세상에서 살고 있어.”
“…….”
“그렇다면 우리 제자들이 단 한 명이라도 더 이 난세를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조치를 해야 함이 옳지 않겠나.”
구윤이 순우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한이 남을 만한 선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사제.”
“문파의 비전 따위, 제자들의 목숨보다 중요하겠습니까? 더 강한 무공, 더 강한 힘으로 무장한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의기를 떨칠 수 있도록, 이 구윤이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구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다른 장로들도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순우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고맙네. 내 큰 부담을 덜었어.”
한 차례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종남.
무수히 많은 제자를 잃었지만, 동시에 얻은 것도 많았다.
종남은 앞으로 더 단단해지고 더 강해질 것이다.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이 난세, 후대가 혀를 내두를 복잡한 세상에서 종남은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 * *
일행이 종남산을 떠난 지 한 시진 뒤.
“이보슈!!”
그 화려한 기세가 느껴지기도 전에 엄청나게 큰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일행이 고개를 돌렸다.
가득상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바쁠까 싶어 말없이 왔더니만 어째 여기까지 달려오셨소.”
“이 인간아! 바빠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여!”
일행 앞에 도달한 가득상이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따라잡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가는 길 중간중간에 개방 지부를 들러야 할 일이 있잖소. 그때 만나도 될 것을.”
“그건 그거고!”
“그나저나, 인사 안 했다고 여기까지 쫓아오신 건 아닌 듯한데.”
“후우우!”
숨을 몰아쉰 가득상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거지답게 옷은 걸레짝이 되어 있었지만, 꺼낸 서신은 깨끗하기만 했다.
“이거 받으쇼.”
“뭐요, 이건?”
“읽어나 봐.”
연호정이 서신을 펼쳐 읽었다.
순간 그의 눈이 번쩍였다.
“황궁에서 변이 터졌다고?”
“그렇소.”
가득상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하남 도지휘사 어른 기억하시오?”
“본 적은 없지만, 알고 있소. 예전 모용가주가 신화교 무장들을 상대하기 위해 직접 찾아가지 않았소?”
“역시 기억력이 좋군.”
“한데 그분이 왜?”
“돌아가셨소.”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아가셨다고?”
“그렇소.”
“어떻게?”
“황궁에서 부름을 받았소이다. 도지휘사 전원이 소집됐는지, 아니면 삼사의 수장들 모두가 불려 갔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소. 곧 알아낼 수 있을 거요.”
“한데 그게 왜?”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소이다.”
연호정은 물론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반역죄라니?”
“하남 도지휘사, 여상도 공(公)의 처소에서 십삼태자(十三太子)와 나눈 서신이 발견되었소. 그 서신에…….”
가득상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반정(反正)의 준비를 시작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소이다.”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정, 본디 올바른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나쁜 통치자를 끌어내리고 올바른 통치자를 왕좌에 세우겠다는 뜻.
말하자면 반란이다. 당대 황제를 폐위하고, 십삼태자를 황제의 위에 올리겠다는 뜻이었다.
“그게 사실이오?”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는 없소이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모르는 거니까. 물론 여 공의 성격과 신중함을 생각하면, 모두가 반정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렇다면…….”
“속단할 수 없지만, 이는 분명 음모외다.”
여상도는 신화교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모용군과의 거래와 무림맹 고수들의 무장 제거를 통해 여상도의 거취도 한층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모용군 역시 그와의 만남을 철저히 비밀로 했으니, 신화교 측에서도 의심은 할 수 있어도 여상도를 해할 결정적 증거를 찾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상도가 죽었단다. 그것도 반란 모의라는 희대의 대죄를 안고.
“무림도 무림이지만, 기실 이번 전쟁의 한 축은 황궁이 담당하게 될 거요. 만약 황궁이 정말 적의 손에 떨어진다면 말이오.”
“……그렇겠지.”
“비록 힘이 약해지고 자연스레 영향력도 줄었다지만, 그래도 황궁은 황궁이오. 이 대륙 천하를 지배하는 공식적인 집단인 만큼 그들의 힘은 무림 못지않을 것이오.”
“때에 따라서는 무림의 적들보다도 더 무서워질 수 있겠지.”
“그렇소. 연 대수가 무림을 종횡무진하는 동안 무림맹은 황궁을 주시해 왔소. 묵룡부가 할 수 없는 일이니, 당연히 우리가 해야 했지.”
묵룡부는 흑도 연합이었다. 빈말로도 관리들이 손을 댈 만한 조직이 아닌 것이다.
반면, 무림맹의 세력들은 수백 년 동안 지역 관리들과 안면을 터 왔다. 모용군이 여상도와의 안면으로 직접 거처까지 찾아간 것이 그 예였다.
“알음알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더랬소. 삼교 중 신화교 놈들이 황궁에 암약하고 있다는 건 예상하는 바였지만, 얼마나 깊은 곳까지 뻗어 있는지, 그게 정말 사실이기는 한지를 자세히 조사했소이다.”
“결과는 나왔소?”
“나도 어제 정보를 받았소.”
가득상의 눈이 흔들렸다.
“당대 황제 폐하의 최측근, 우헌 태감이 신화교 소속이라는 것을 알아냈소.”
“……!!”
태감은 내시들의 정점으로, 외척과 함께 황궁의 권력을 양분하는 최대 세력의 수장이다.
“그게 사실이오?”
“다른 정보들은 신뢰성에 약간의 문제가 있소. 하지만…… 태감이 신화교 소속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오.”
연호정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런.’
무림의 일이라면 자신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황궁의 일은 다르다. 정치질이라면 누구 못지않지만, 애초에 그는 음모를 분쇄하고 적도들을 격파하는, 이른바 장수이자 암중의 특무 부대가 하는 일을 전문으로 했다.
태감이 신화교 소속이라면, 지금쯤 황궁 절반 이상이 신화교 놈들의 손에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장 태감의 영향력만 생각해도 그 정도다.
“다행히도.”
연호정이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태감이 모종의 인물들과 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몇몇 고위 관리와 외척들이 알아챘소. 덕분에 태감, 아니 신화교는 아직까지도 황궁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요.”
“그건 다행이군.”
“다만, 몰랐다면 모를까 알아 버린 이상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오. 하여 맹에서도 암암리에 황궁으로 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였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가득상의 표정, 목소리만 봐도 알겠다. 가득상은 지금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누구요?”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검 연위 대협이오.”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그분께서 먼저 자원하기도 하셨지만, 기실 맹 입장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소. 당금 무림에 연 가주님과 위명을 함께할 만한 대협은 손에 꼽히잖소.”
“…….”
“물론 공공대사님이나 승현진인 등, 구파의 장문인들께서 움직일 수도 있소. 하지만…….”
“안 되겠지.”
“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의 승려나 도문의 도사들은 어떻게 꾸며도 티가 나는 법이오. 숨은 눈이 그리 많은 황궁에서 그런 사람들이 오갔다가는, 적들이 낌새를 눈치챌 위험이 크오.”
“……맞는 말이오.”
“그래, 아버지께서…….”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가득상이 말을 이었다.
“물론 연 가주님 혼자만 가시는 건 아니오.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만에 하나 발각되면 지혜로써 그곳을 돌파할 수 있어야 하니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지.”
“한 분은 팽가주님이겠군.”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어떻게 알았소?”
“하북의 패자가 아니오. 황궁이 북경에 있으니, 팽가주님만큼 그곳 사정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 테지.”
“맞소. 역시 똑똑하시군.”
“그리고 또 누가 함께하오?”
“의정군의 군사요.”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아연이가?”
“그렇소. 마음 같아서는 대군사님께서 직접 가고 싶으셨겠지만, 맹의 일이 바쁜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소.”
“……그랬겠지.”
“일단 황제 폐하의 외척들과 만나 앞날을 논의하는 게 먼저일 것이오. 궁내에 다툼이 생길지 말지는 아직 모르는 법. 다만 이 일은 연 대수께 반드시 알려야 할 것 같았소.”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정보, 감사하오.”
“별말씀을. 아! 그리고…….”
가득상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달싹이고 있었다.
전음이었다.
그의 전음을 신중한 표정으로 듣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하리다.”
가득상이 포권을 취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술이나 푸고 싶지만, 일이 너무 바쁘게 돌아가는군. 재회의 기쁨은 다음에 누립시다.”
“앞날에 무운이 있기를.”
“그럼.”
파아아아악!
가득상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