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31)
731화. 보이지 않는 눈 (6)
광혼귀군 곡경.
성천십삼좌 중 삼군의 일인으로, 그 무력은 신선제왕보다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대외적인 평가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붙어 보기 전까진 아무도 승부를 알 수 없는 법. 세간의 평가보다 더 강할 수도, 더 약할 수도 있다. 무림의 명성이라는 게 보통 그렇다.
그러나 무극을 열고 그 강함을 인정받은 시기를 생각하면, 성천 중 누구라도 연호정보다 아래일 수는 없는 법.
‘알 수가 없군.’
지금 이곳에서 광혼귀군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번쩍!
십자로 교차되어 휘둘러진 월도의 도광(刀光)에 휩쓸린 가면인들 다섯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곡경의 눈이 번뜩였다.
상대가 무극을 연 고수인 줄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요(要)는 무극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강자냐는 것이었다. 언뜻 보아도 성천에 이름을 올린 강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애송이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번 한 수, 단 한 번의 도법을 본 것만으로도 상대의 무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멍청한 놈들! 누가 직접 공격하라고 했더냐!”
파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아남은 가면인들이 후방으로 빠졌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빠르다?’
실력 여부를 떠나, 가면인들의 신법만큼은 엄청난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수준이 초절정고수들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했다. 모용군의 신법 속도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 속도라면 거의 무극의 고수와 필적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놈들?’
스르륵.
가면인들이 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쇳덩이를 꺼내 들었다.
기묘한 생김새였다. 삼백여 년 전쯤 생겨났다가 쇠퇴기를 맞았다는 화승총(火繩銃)을 작게 만들어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가면인들이 연호정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순간 연호정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맛보았다.
핑! 파바바박!
어느새 연호정이 사라진 자리에 대여섯 개의 구멍이 뚫렸다.
극히 작은 소리와 함께 발사된 작은 탄들이 땅을 뚫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런!’
본디 화약을 이용한 병기는 하나같이 커다란 소리를 내는 법이었다. 그것은 당가의 금용암기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데 저들의 암기는 그러지 않았다.
소리가 나긴 했지만, 화약 병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훅!
“어딜 보나?”
어느새 연호정이 뛰어오른 허공으로 날아오른 곡경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연호정이 그를 향해 마주 장(掌)을 내질렀다. 칼을 휘두르기에는 시기와 거리가 애매했던 것이다.
퍼어어어엉!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각기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치이이이익!
나무를 밟고 땅에 내려선 연호정의 왼손에서 회색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호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지막지하군.’
주작화기의 강렬한 기운으로 침투하는 사기를 모조리 증발시켰다.
뜨거운 기운 아래, 손 전체가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음하고도 음한 진기, 사공에도 정통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는 정통 중의 정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놀란 것은 곡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놈 봐라?”
후우우우욱!
푸른 듯, 어두운 듯 기묘한 진기가 손에 모여 체내로 침투하려는 기운을 해소한다.
그리고 그 속도는 연호정보다 미묘하게 더 빨랐다.
우두둑.
주먹을 쥔 곡경의 표정이 바뀌었다.
“거기서 바로 반응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광혼귀군씩이나 되는 인간이 여기에는 왜 있는 건가?”
곡경은 연호정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경지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고…… 오호라, 생사결에 능한 싸움꾼이로군. 그래서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야.”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곡경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던 모양이다.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묻는다. 너 정체가 뭐냐? 당금 무림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숨기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면 쓸데없는 고집 때문인가?”
가만히 곡경을 보던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자세는 풀었지만,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민해져 간다.
곡경은 한눈에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감각을 저리 첨예하게 세울 수 있다는 건 정말 전투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싸움에 어지간히 환장한 놈도 저 정도는…….’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하나만 묻지.”
“어린놈이 말투 한번 싸가지 없군. 따지기 전에 말투부터 고치는 게 어떠냐?”
“너희가 죽인 사람들, 민간인이냐?”
곡경의 얼굴에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그딴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봤다. 나는 죄 있는 놈들만 작살내는 주의야.”
말투는 거칠었지만,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진실성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강렬하기 그지없었던 연호정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우두둑.
곡경이 어깨를 살살 돌렸다.
“안도하는군. 민간인이 죽지 않았다는 말에.”
“…….”
“협이니 정의니 떠들어 대지만, 정작 자신들 배나 채우는 백도 정파 출신은 아닌 것 같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곡경은 사파로 이름 높은 초고수다. 정파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민간인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백도는 아닌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곡경의 출신 때문이기도 하나, 실제로 그처럼 무도한 백도인들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여기까지다.”
곡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일만 없다면 그 버르장머리 없는 주둥이를 뭉개 주겠지만, 너 정도 애송이라면 나도 제법 힘을 써야 해. 큰일을 앞에 두고 괜한 곳에 힘쓰다가 뒤통수 맞으면 나도 뼈아프다.”
“…….”
“하지만 너 하나 때문에 이곳에 잡혀 있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까드드득!
곡경의 두 주먹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츠츠츠츠츠.
안개처럼 서서히, 그러나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오르는 사기.
회색빛 연기를 뿜는 푸른 불길을 발산하는 것만 같다. 곡경 주변에 선 가면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역시.’
월도를 쥔 연호정의 손에 땀이 맺혔다.
‘강하다. 정말 강해.’
암왕 당형이나 음제 하은교, 투왕 양천과는 다르다.
그들의 힘을 충분히 보았지만, 작정하고 죽이겠다며 살기를 뿜는 상대와 싸운 적은 없었다.
곡경은 달랐다.
이 자는 진심으로 살기를 드러냈으며, 여차하면 끝장을 볼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하물며 이 자의 무력은 명극, 그 이상이었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승패를 떠나 연호정 역시 치명적인 피해를 볼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어쩌지.’
곡경은 진심이었다.
뜻밖의 장소, 뜻밖의 시기에 마주친 성천의 고수다.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싸움이 벌어졌고,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대화를 통해 상대의 성격 일부를 알아냈다.
곡경은 단순한 자였다. 온몸에서 피 냄새가 철철 흐르지만, 뜻밖에도 이유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다만, 단순하기 때문에 지금의 발언이 중요하다.
계속 입을 닫고 있으면 진정 생사결을 벌일 것이요, 솔직하게 정체를 밝힌다면…….
“응?”
그때, 곡경의 눈이 연호정의 상체로 향했다.
“잠깐. 그 경갑은…… 어디서 많이 봤는데?”
순간 연호정이 주춤했다.
찌푸려졌던 곡경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너……? 양천 그 양반 휘하에 있는 놈이냐?!”
이건 또 의외의 전개인데?
문득 연호정은 양천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뜸 싸워 보자며 주먹부터 날려 오는데, 어찌나 황당한지 한 대 맞을 뻔했지. 그렇다고 싸움에 미친 놈 같지는 않았네. 그저 내가 자신보다 윗길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게야.’
그렇다.
양천은 곡경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주먹도 교환해 보았다.
결과는 당연히 양천의 압승이었지만, 곡경에 대한 평가는 상당했다.
‘분명한 차이는 있었지만, 역시나 아차 하면 당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고 했지.’
과연 양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서 느껴지는 곡경의 무력은 진실로 대단했다. 당장 신선제왕급의 고수들과 맞붙어도 크게 밀릴 것 같지 않았다.
“말해라! 너, 양천 그 양반의…….”
“맞소.”
연호정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묵룡부 소속이오. 그 이상은 밝힐 수 없소.”
“……묵룡부라.”
곡경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뭐냐, 갑자기? 묵룡부주가 너 같은 놈을 언제 키웠지?”
“설명하기 어렵소.”
“……뭐 그렇기야 하겠지. 뱃속에 능구렁이를 수백 마리 키우고 있는 양반이니 오죽하겠나.”
생각보다 정확히 알고 있는데?
“그럼 여긴 뭣 하러 온 거냐? 투왕의 명령이냐?”
“그렇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떨떠름한 얼굴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곡경이 푹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껄끄럽다고 후배 놈을 작살내 놓을 수도 없고……. 하여간 그 노친네, 예전부터 통 마음에 안 들더라니.”
후배라?
“내가 왜 당신 후배요?”
곡경이 코웃음을 쳤다.
“모가지 뻣뻣한 거 보시게. 누가 흑도 놈 아니랄까 봐 싸가지 한번 예술이군.”
순식간에 오해가 쌓여 간다.
“됐다. 그 노친네 휘하라면 나도 쉽게 건드릴 수 없지. 얌전히 보내 줄 테니, 오늘 네놈이 봤던 광경은 다 잊어라.”
“…….”
“대신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대답해라. 제아무리 후배라도 우리와 적이라면 그냥 보내 줄 수는 없으니까.”
곡경이 진지하게 물었다.
“비왕 때문에 온 거냐?”
연호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역시 그랬군. 비왕을 어쩌시려고?”
한번 물살을 탄 거짓말은 자연스레 흘러 나갔다.
물론 아홉의 진실 속에 숨 쉬는 하나의 거짓일 뿐이었지만.
“정확한 지침은 내려오지 않았소. 다만 이런 시국에 비왕이 갑작스레 등장했으니, 그자가 무슨 목적으로 세상에 나왔는지 알아내라고 하셨소.”
“……흐음.”
곡경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게 전부라고?”
“만약 그가 적이라고 판단될 시.”
우웅.
연호정의 눈에서 살기가 번져 나왔다.
천하의 곡경조차도 순간적으로 움찔할 만큼 냉혹한 살기였다.
“현장에서 제거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소.”
“오호라?”
곡경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지?”
순간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바로 여기, 지금이 승부의 때라는 것을.
가만히 곡경을 바라보던 연호정의 입에서 그럴듯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묵룡부의 그림자 안에 넣을 수 있는 존재라면 적이 아니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는 적이 될 수밖에 없지.”
곡경의 미소가 조금 더 험악해졌다.
“그럼 나도 적이겠구만? 나는 묵룡부에 들어갈 생각이 없거든.”
“난 비왕을 살펴보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 명령 어디에도 광혼귀군은 없었소.”
“요놈 보게? 그럼 나를 떠보라는 명령을 받았으면? 그랬으면 나도 죽이겠다?”
“그런 명령이 내려진다면.”
“…….”
곡경의 미소가 점점 사나워졌다.
연호정은 담담한 눈으로 곡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훅!
곡경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무지막지한 사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노친네, 그래도 늘그막에 제대로 된 놈 하나는 주웠구먼.”
곡경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후배 놈아. 어차피 우리도 비왕을 잡아야 할 처지이니, 옆에서 반응을 보든 말든 알아서 해.”
“그래도 되는 거요?”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그렇긴 하오만.”
곡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늙은이에게 빚 하나 지워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러니 따라와서 봐라. 뭐, 덕분에 네 능력도 좀 빌려 쓸 수 있겠지.”
“막상 만났을 때, 당신과 목적이 다르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다를 수 없을걸?”
곡경의 얼굴에 살기가 일었다.
“투왕이라면 무조건 비왕을 죽이고 싶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