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34)
734화. 삼파전 (2)
소궁을 나온 세 사람은 궁에서 십 리가량 떨어진 어두운 거처로 들어갔다.
황궁 내 건물답게 어지간한 고관대작의 정실보다도 화려했지만, 절묘하게 둘러쳐진 벽과 그림자 덕분에 시야에 잘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 봐도 인지가 잘 안될 정도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문밖 수문위에게 요구하시오. 금일 자정에 한 번 더 폐하를 뵙게 될 터. 그때는 대장군께서도 오실 터이니 충분히 쉬시오.”
도번은 그 말을 끝으로 나가 버렸다. 황후 앞에서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 않은 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팽무강이 입맛을 다셨다.
“어지간히 미움을 사 버렸구만.”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충성심이 깊은 것이지요. 저는 보기 좋은데요.”
“우리 일이 아니었다면 보기 좋았을 게다. 앞으로의 일에 방해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진 않을 거예요. 정확히는, 그러지 못할 겁니다.”
팽무강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버렸다.
“긴장했더니 기운이 빠지는군.”
“긴장하셨어요?”
“물론이지. 황후 폐하시지 않느냐. 실질적인 힘이 약해졌다 한들 제국의 안주인이라는 자리는 만민(萬民)의 위에 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
“그렇군요.”
“하물며 본가는 하북 북경 인근에 있다. 알게 모르게 황궁과 관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무강이 연위를 올려다보았다.
“가주께서도 좀 쉬시구려.”
“음.”
벽이 기대어 턱을 쓰다듬는 연위의 얼굴에는 모호한 빛이 어려 있었다.
팽무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으시오?”
“걸리는 게 있다기보다는…….”
“황제 폐하 때문에 그러시는군.”
연위와 제갈아연이 뜻밖이라는 눈으로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팽무강이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렇게들 보시오?”
“어떻게 아셨소?”
“무림맹을 떠나기 전부터 연가주께서는 황제 폐하의 안위에 대해 몹시 궁금해하시지 않았소이까.”
“그렇긴 했소만…….”
“당금 황제 폐하께서는 선대처럼 향락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국력을 더더욱 소모하고 계신다고 들었소.”
연위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처 인근에는 은신한 무사들 몇몇이 존재했다. 일행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행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리란 것쯤은 황후 쪽에서도 인지하고 있을 터.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 무사들을 은신시켜 둔 것이리라.
팽무강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황제 폐하에 대한 비판을 토해 내고 있었다.
“팽가주.”
“그러나,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는 이 국가의 주인이시오. 황후 폐하는 물론 우헌 태감 역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더욱 살벌해졌을 것이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되, 굳이 지금 이 시점에 꺼낼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팽무강이 재차 입을 열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소.”
“……무슨 문제 말씀이시오?”
“황태자 전하 말이오.”
“……!”
연위가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걸 생각했어요. 만약…….”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만약 황실의 핵심 권력을 쥐고자 한다면, 양측에서 원하는 후계자를 황위(皇位)에 올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
“황위란 결코 쉬이 얻을 수 없는 것. 국가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선대의 지목이 필수예요.”
제갈아연이 말하는 국가 비상사태란 곧 황좌의 공석을 뜻함이었다.
실질적으로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를 떠나, 황후와 태감 양측 모두 확신은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황제를 시해할 수 있다고.
그런데도 그들은 황제를 가만히 놔두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먼저 황제를 치는 순간, 곧장 반역으로 몰려 승부의 추가 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한 축이 바로 황태자 전하 쪽이외다.”
팽무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그 부분을 정확히 알 수가 없구려.”
제갈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것을 알게 된다면, 상황을 보다 명징하게 볼 수 있겠지요.”
연위가 두 사람을 둘러보았다.
감시하는 눈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한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연위가 이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쉽시다. 자정에 황후 폐하와 대장군을 뵈며 여쭈어도 될 것이오.”
“음, 그도 그렇소이다.”
잠시 후.
스르륵.
감시자들이 다소 멀어졌다. 그중 하나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이쪽에서 벌어졌던 대화를 고스란히 전하기 위함이리라.
말없이 떨어져 쉬고 있던 세 사람의 눈빛이 돌변했다.
연위가 방 중앙으로 손을 뻗었다.
우우웅.
무형의 기운이 세 사람을 둘러쌌다. 이제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샐 일은 없을 것이다.
기막을 쳤음에도 연위는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위험했소.”
팽무강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가주라면 바로 알아채실 줄 알았소.”
“미안하오. 생각이 많아서 발을 맞추지 못했소이다.”
제갈아연 역시 쉬던 자세 그대로 말했다.
“좀 전의 대화는 고스란히 황후 폐하 측으로 올라갈 거예요. 아마 생각이 복잡해지시겠지요.”
“그렇겠지.”
연위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분명 움직이셨을 것이오.”
팽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오.”
“어떤 식으로 움직였느냐는, 기실 지금에 와서 아무 상관이 없소. 두각을 드러냈다면 삼파전이 되었을 터인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필시 힘이 약하거나…….”
“황후 폐하나 우헌 태감, 둘 중 하나에 편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제갈아연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머리와 출중한 안목을 지녔다. 나아가 연위와 팽무강은 한 지역의 패자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었다.
돌아가는 상황과 황후와의 대화를 기반으로 황궁의 사태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세상 돌아가는 일은 거기서 거기니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문제는…… 진정 황제 폐하께서 아무것도 모른 채 방관하고 계시느냐는 건데.”
세 사람이 잠시 침묵했다.
일각 후,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에서는 제국사(帝國史)에 대해 따로 배워요. 작게는 대륙의 역사를 알기 위함이고, 크게는 역사를 공부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자는 취지에서지요.”
“모든 역사학이 그렇지.”
“당대 황제 폐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시기 전, 역대 황제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군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셨다고 해요. 각종 학문은 물론, 독특하게도 무예까지 통달하셨다더군요. 특히나 국가 행정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셨다고 들었어요.”
팽무강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 그 비슷한 얘기는 들었지. 하지만…….”
“네. 황위에 오르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대처럼 향락에 빠지셨지요.”
“음.”
“다만, 그 직전까지 획기적인 행정안들을 내놓으셨어요.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어지러웠던 민생을 어느 정도 잠재우셨지요.”
“그 이후에 정사를 손에서 놓으셨다?”
“맞아요.”
제갈아연의 눈이 깊어졌다.
“그냥 그랬구나, 정도로만 알고 지나갔어요. 역사상 그런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요.”
“…….”
“하지만 막상 지금 상황을 보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무림이 아니다. 정보도 많지 않아. 추측까지는 가능하지만, 그에 사로잡혀 오판을 내려서는 안 될 일이야.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말이다.”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많은 가능성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
“하지만 변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지요.”
“맞다.”
세 사람의 얼굴에 엄숙한 기색이 어렸다.
“권력은 황제 폐하께로 가야 해.”
“황제 폐하야말로 황궁의 핵심이에요.”
“정통성은 황제 폐하께 존재하지.”
거의 동시에 말한 세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황궁에 온 것은 황후를 도와 태감은 물론 그 뒤에 암약하고 있는 신화교의 세력 면면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가능하다면 격파해 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다.
황후와 태감이 황궁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후계자를 황제로 세워야 한다.
본인들이 나서서 황조를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만큼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아무 힘이 없다고 하셔도, 우리가 어느 한쪽 편을 들게 되는 순간 문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정확하게 보셨어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황후 폐하께 힘을 실어 드려서 황궁의 권력 척도가 바뀌게 되면, 이후 황후 폐하 역시 우리를 내치실 가능성이 크죠.”
제갈아연의 눈이 힘이 들어갔다.
“황제 폐하께 접근해야 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이 안을 들어주시도록 판을 흔들어야 해요.”
* * *
스르륵!
연호정과 곡경이 신법을 멈추었다.
“빌어먹을.”
곡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접선자와 만나기로 한 곳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무복을 입고 있었다. 목뼈가 부러지거나 등에서부터 찌르고 들어간 자상의 흔적들로 보아, 반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몰살을 당한 것 같았다.
“황궁 측 사람이오?”
“세정번(洗政幡) 가조(假組) 놈들이다.”
“세정번? 가조?”
“세정번은 황제 폐하의 비밀 조직이다. 가조란 세정번의 이름은 달았지만, ‘진짜’는 아닌 이들을 뜻하지.”
진짜가 아닌 이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곡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추적하던 놈들이 반대로 습격을 당했다. 놈들도 승부를 내겠다는 뜻이다.”
“승부…….”
“필시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비왕이 부리는 수하들의 신법은 내 수하들에 비해도 떨어지지 않아. 누가 먼저 뒤를 치느냐에 따라 어느 한쪽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즉, 머리를 쳐야 한다?”
“바로 그거다.”
곡경이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신들을 살펴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선배.”
“뭐냐?”
“비왕이 무당산 인근에 모습을 드러낸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오?”
“모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더는 중원에서 뽑아낼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지.”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정보란 시시각각 쌓이는 법이다. 언제 어디서 중요한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바, 뽑아낼 정보가 없을 수는 없다.
‘그들 내부의 일이 아니라면, 굳이 모습을 드러낼 이유는 많지 않아. 그만큼 정보력을 교란시킬 능력이 있다면 더더욱.’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황궁이군.”
“뭐?”
벌떡 일어난 연호정이 곡경을 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말을 하던 연호정이 순간 주춤했다.
곡경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게 뭔 개 같은 소리냐?”
“…….”
“뭔 소리냐고 묻지 않느냐! 황궁이 왜?!”
그때였다.
훅!
두 사람의 표정이 돌변했다.
저 멀리 북쪽에서부터 은밀한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이미 그 미지의 고수는 두 사람의 전권으로 들어와 있었다.
쩌저저저정! 서걱!
벼락처럼 휘둘러진 월도에서 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곡경의 어깨에 한 줄기 자상이 생겼다. 상처는 얕았지만, 그가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하가 놀랄 일이었다.
화아아악!
곡경의 몸에서 폭발적인 사기가 뿜어졌다.
“비왕!!”
번쩍!
연호정이 곡경의 후방을 향해 반룡장을 날렸다.
쾅!
나무 밑동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귀신은 어느새 반대편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의 그 빠른 장력을 너무나도 손쉽게 피해 버린 것이다.
사사사사삭!
동시에 사방에서 수십 명의 고수가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곡경의 수하들, 가면인들이 습격해 죽였던 이름 모를 무인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신법 속도는 가면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 말인즉, 속도라는 측면에서는 곡경과 연호정에 비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흐음.”
높은 나무 꼭대기.
어린아이 손가락보다도 가는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한 명의 괴인이 있었다.
“멋들어진 사냥감이 하나 더 늘었구만. 이거 나도 좀 긴장해야겠는데.”
곡경이 버럭 외쳤다.
“공손백룡!”
비왕 공손백룡이 씨익 웃었다.
손에 들린 소도(小刀)로 곡경을 겨누는 그의 자세에 여유가 넘쳤다.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파아악!
곡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
어느새 나무에서 뛰어내린 공손백룡이 곡경의 눈을 향해 소도를 찔러 넣었다.
연호정의 눈이 부릅떠졌다.
‘미친!!’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