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50)
750화. 피 묻은 황좌(皇座) (11)
꽤 두툼하고 길쭉한 장도였지만, 평소에 쓰던 칼은 아니다.
그러나 팽무강에게 그런 것은 제약이 될 수 없었다.
중원 무림 최고의 도문(刀門), 그 도문의 수장은 어떤 종류의 칼이라도 달인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하는 바다.
바로 이렇게.
쿠구구궁!
휘몰아치는 묵직한 도풍(刀風)이 땅바닥에 삼 장이 넘는 거대한 도흔(刀痕)을 만들어 냈다.
후방에서 접근하던 금군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단 일수에 불과했지만, 상대하는 금군 입장에서는 가히 요술을 보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라.’
마치 연위처럼 자연스레 칼을 내려트린 팽무강의 자태는 굴강한 신체를 지닌 사람답지 않게 도사처럼 허허로웠다.
그러나 부리부리한 호안(虎眼)에서 뿜어지는 위엄은 일대 종사의 그것이었다.
황명을 받고 전진하던 황궁 제일의 무력 집단, 금군 일천 명을 일시에 멈춰 세울 정도로 압도적인 기파다.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매서운 기도는 산전수전 다 겪은 금군의 오천인장, 황보적(皇甫積)의 가슴을 서늘케 하기 충분했다.
‘대단하군.’
팽무강의 뒷모습을 보는 문석의 눈은 숨길 수 없는 감탄과 경악으로 가득했다.
‘강호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무가의 주인이라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 것인가?’
실제로 창칼을 부딪쳐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 자체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와도 격을 달리했다.
마치 황궁의 대문보다도 큰 인외의 맹수가 살기를 드러내는 것처럼, 누구도 그를 공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저것이 바로 육대세가 수장의 힘!’
그때, 황보적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문석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황보적의 목소리는 대단히 컸다. 마치 문석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가 무척이나 또렷하게 들렸다.
“그렇군.”
놀랍게도 대답을 한 것은 팽무강이었다.
“산동의 황보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 근래 워낙 바빠서 왕래를 못 하였는데, 이런 자리에서 자네를 다 보게 되는구먼.”
이제 보니 금군 오천인장인 황보적과 팽무강은 아는 사이 같았다.
문석은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전방 제삼 궁문 쪽에서 다가오는 금군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들 역시 전진을 멈춘 상황이었다. 이번 금군의 총책임자가 황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보적이 말했다.
“하북의 팽가라면 중원 도맥(刀脈)의 종주로서 호탕한 성정과 막강한 무력, 그리고 무력만큼 단단한 협심으로 사해오호에 명성을 떨친 무가외다.”
“듣기 좋은 칭찬이로군. 계속해 보게.”
“한데, 그런 위대한 가문의 수장이 어쩌다가 역적 무리와 함께하게 되셨소이까?”
팽무강이 피식 웃었다.
문석이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들! 도대체 누가 역적이란 말이더냐!”
황보적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것은 나도 알지 못하오. 하나, 제아무리 대장군이라 한들 이 야심한 시각에 허가도 받지 않고 병력을 동원하여 내성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죄라 할 만하오.”
“분명 죄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역모는 아니야! 우리는 요망한 태감의 술수에 빠져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황후 폐하의 안전을 지키러 가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요?”
“무엇이라?!”
“병력을 끌고 예까지 온 것에 대한 변명은 그게 전부냐고 물었소.”
금군의 오천인장이라면 총책임자인 궁외대장군 휘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장(猛將)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황보적은 과거에 육대세가 못지않은 명성을 날린 산동 황보세가 출신이었다.
단순 무력만 치면 대장군부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그였다. 그러나 그것이 궁내대장군인 문석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고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문석이 버럭 소리쳤다.
“변명이라니!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냐!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려 드는 천하의 악적을 잡으러 가는 길에 그따위 소리를 해?!”
“뭐가 되었든 병력을 끌고 온 것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없소.”
“이놈! 황후 폐하를 대체 어찌 생각하는……!”
“제아무리 권세가 드높은 일국의 국모라 한들, 그 존재가 황제 폐하의 명령마저 무시할 정도로 대단할 수는 없소.”
“……!”
문석의 눈이 흔들렸다.
황보적이 차갑게 말했다.
“사사로이 병력을 끌고 궁내를 가로지르는 행위! 역대 어떤 선황께서도 그런 짓은 용인하지 않으셨소! 나아가 당금 폐하께서도 대장군에게 병력을 끌고 오라 명을 내리신 적이 없소!”
“이놈!”
“도대체 당신이 모시는 자가 누구란 말이오! 일국의 대장군이라는 작자가 황제 폐하의 명을 무시하고 예까지 들어오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듣는 문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뒷목을 잡을 일이었지만, 기실 황보적의 말은 전혀 틀림이 없었다.
황제의 권위가 추락하고 제국의 힘이 약해진 지금, 황궁의 권력을 양분하는 황후와 태감의 위세가 지나쳐 여러 예법과 원칙들이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암암리에 넘어가는 일이 많았지만, 조목조목 따지자면 분명 문석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의 행위 또한 충분히 역모 행위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삼족, 아니 구족이 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대죄였다.
“말은 끝났나?”
문석이 치미는 분을 삭일 때, 팽무강이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보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몰랐다 한들 역적과 함께하고 있다면 하북의 명문 팽가라도 무사치 못할 것이오. 가주를 필두로 최소 삼족이 멸해질 것이외다.”
“그럴 수는 없을 걸세.”
“닥치시오! 협의로 이름 높은 팽가주가 어찌 이리……!”
“법도란.”
스륵.
팽무강이 황보적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순간 황보적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칠 장이 넘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칼날이 목 바로 옆에 겨누어진 것처럼 살벌한 위압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법이란 지키라고 만든 것이다. 어떤 변명이라도 그것이 원칙이라면, 최대한 지키는 것이 옳은 법이지.”
“그걸 잘 아는 작자가……!”
“하나 법도와 예법을 농락하고 국정을 제멋대로 어지르는 간신배를 어찌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인 이곳에, 더 이상 황실의 존엄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황보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석은 물론 그를 지키는 병사들 역시 경악하여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은 애써 침착했지만, 그녀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 생각한다 한들 실제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기 때문이었다.
“당신 미쳤소!!”
“미친 건 너희다.”
팽무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외세의 간악함이 도를 지나쳤고 간교한 술책 역시 그에 못지않음이라, 국력이 약해진 당대 황궁이 외적들의 손에 떨어진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
“그러나 황제 폐하의 위엄을 지우고 황실의 존엄성을 해친 간신배의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황제 폐하의 명이 아닌 태감의 의지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희야말로 제정신인가?”
황보적이 이를 악물었다.
“닥치시오! 우리는 군인이오! 군인이 상명하복을 어기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순간 나라는 지옥이 되는 법이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다만 금군의 존재 이유가 황제 폐하와 황궁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둔다면, 너희는 이곳에 있으면 아니 되었다. 지금 당장 어전으로 달려가 폐하를 농락한 간신배는 물론, 황궁 전체를 장악한 사교 무리를 색출하여 모조리 참하는 것이 우선이었느니라.”
팽무강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자네를 알아. 또한 영광스러운 금군의 병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군대보다도 철저한 상명하복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하니, 나는 그대들이 잘못을 바로잡았어야 한다는 사실 이전에 그대들의 행동을 이해한다.”
“…….”
“그러나 궁외대장군이 없는 지금, 오천인장인 자네는 목숨을 내놓고 황궁을 좀먹는 간신배와 싸웠어야 했어. 자네가 죽을 걸 알아도 그랬어야 했네. 한데 자네는 그걸 못 했고, 결국 간신배에게 휘둘려 지금 이곳에 있군.”
황보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팽무강의 발언은 지나치게 모욕적이었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내가 할 말은 하나요! 지금 당장 손에 든 것을 버리고 투항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도당으로 간주, 모두 참형에 처해질 것이오!”
“또한, 나는 황후 폐하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뭐라?”
팽무강이 씨익 웃었다.
“나는 황후 폐하가 아닌, 황제 폐하를 구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문석은 깜짝 놀랐다.
황후가 아니라 황제를 구하기 위해 왔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황보적조차도 순간 얼떨떨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그때였다.
‘……?!’
극도로 당황하는 사이, 황보적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가깝다?’
칠 장 거리가 떨어져 있어 작게만 보였던 팽무강이 한순간 왜 이렇게 커졌을까?
존재감 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팽무강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보적의 눈빛이 돌변했다.
“금군은……!”
“늦었어.”
파아아아앙!
팽가 최고의 신법, 어기신풍(御氣神風)이 팽무강의 신형을 황보적 코앞까지 도달케 해 주었다.
황보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창졸간이라 하나 그 역시 황보세가에서 세 명뿐인 초절정고수, 기습에 반응하는 권법 절기가 가히 일품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퍼어억!
황보적의 팔이 튕겨 나갔다.
주먹을 내질렀던 팔, 그 팔뚝이 붉게 달아올랐다. 팽가의 권법 파갑추(破鉀錘)가 적중한 것이다.
이를 악문 황보적이 거리를 벌리고 천왕권(天王拳)을 준비할 때.
파아아아악!
그의 가슴에 사선으로 도상(刀傷)이 새겨졌다.
“크윽!”
벼락처럼 빠른 일격이었다. 딱히 초식이랄 것은 없었지만,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의 내력이 실린 칼질은 순식간에 근육을 찢어 내고 상체 전면의 혈맥들을 마비시켰다.
퍼어어억!
황보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팽무강의 칼자루가 복부를 파고든 것이다.
단전 바로 위, 내장이 밀집한 부위를 맞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단전까지 충격이 가서 내공이 툭툭 끊어졌다.
팽무강의 손놀림은 벼락처럼 빨랐다.
파바바바박!
순식간에 황보적의 마혈을 짚고 내공까지 봉쇄하더니, 이내 그의 목을 움켜쥔 채 다시 칠 장 거리를 벌렸다.
“모두 멈추어라!!”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팽무강의 목소리는 가히 호랑이의 포효와 같았다.
금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두 초고수의 공방이 너무도 빨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팽무강에게 사로잡힌 황보적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얼굴은 지독히도 창백해져 버리고야 말았다.
황보적이 이를 갈았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뭐 하는 짓이긴. 일 좀 쉽게 해 보려는 짓이지.”
“적을 사로잡고 협박하다니, 이러고도 당신이 일문의 종사란 말이오!”
팽무강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구하기 위해 법도를 무시하고 이 자리에 온 우리, 황제 폐하의 칙명에 따라 움직였지만 결국 요사스러운 태감의 의도대로 움직인 자네들.”
“……?!”
“목적과 과정이 어떻든 전부 똥 묻은 처지들 아닌가? 서로 비하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네.”
그때였다.
쿠구구궁!
저 멀리 어전 방향에서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졌다.
“좋군. 역시 연가주야. 겉으로는 군자가 따로 없지만, 작정만 하면 팽가 사람들처럼 호쾌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더랬지.”
스륵.
팽무강의 칼이 황보적의 얼굴에 닿았다.
황보적의 얼굴이 치욕으로 물들었다.
“자, 영광스러운 금군의 병사들이여.”
팽무강이 차갑게 말했다.
“너희 대장 뒈지는 꼴 보기 싫으면 병장기, 갑옷 다 버리고 유연하게 꿇어 봐.”
“……!!”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화약 터트리면 다 죽는 거 알지? 그러지 마라. 같이 좀 살자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