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51)
751화. 가면 쓴 용 (1)
“……!!”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국 역사에 황궁을 뒤집어 놓은 모반은 몇 번씩 있었다. 제각기 명분은 달랐지만 모반을 일으킬 때 무력은 필수인바, 뒤집어엎고자 하는 이와 지키고자 하는 이의 싸움 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어떤 모반의 주동자도 황제가 거하는 어전의 문을 베고 들어온 일은 없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황후와 우헌은 할 말을 잃었다. 음영 진 용상의 주인도 아무 말이 없었다.
“후욱.”
가볍게 숨을 몰아쉰 연위가 갑주를 손으로 잡았다.
키킹!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무복 위로 걸친 갑주가 그대로 뜯겨 나갔다.
상갑과 하갑을 통째로 뜯어내 던져 버린 연위가 피 묻은 철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강동의 일개 무부가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야말로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제아무리 국력이 약해졌다고 한들 일국의 주인을 봤다면 오체투지를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연위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출정 전의 장군이 상관에게 예를 표하듯 절도 있는 인사로 끝을 내었다.
예의와 법도에 철저한 연위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림맹 관계자들이 지금의 연위를 보면 황후만큼이나 놀랄 것이다.
“이놈!”
어느새 표정을 바꾸었는가.
우헌의 얼굴에 추상같은 위엄이 어렸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다스려 본 위정자에게 밴 강력한 자신감이 거기에 있었다.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온 것이냐! 감히 황제 폐하의 명도 없이 어전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문까지 파손시키다니, 사지가 찢겨 죽어도 모자라지 않을 중죄이리라!”
우헌이 재빨리 몸을 돌려 용상을 향해 엎드렸다.
“폐하! 저자는 역적 무리에 속한 강호의 무뢰배로, 무림의 육대……!”
그때였다.
‘……?!’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우헌은 거대한 칼날 수십 개가 어전의 천장을 뚫고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실제가 아닌 환상이다. 무공을 봉인했다지만 우헌은 거기까지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환상과도 같은 대검들의 폭우가 모두 가짜라는 ‘확신’까지는 없었다.
그 불확실한 예감이 우헌의 몸을 본능으로 이끌었다.
파아아악!
우헌의 몸이 재빠르게 어전 벽으로 이동했다.
봉인된 무공이라지만 몸놀림에서 묻어 나오는 고수의 능숙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각만큼이나 날카로운 보법이었다.
“……!”
그리고 우헌은, 벽에 붙고 나서야 본인이 움직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헌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뭐야?!’
그가 연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고개를 든 연위는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마치 스승을 앞에 둔 제자처럼, 혹은 이름 모를 대가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온 구도자처럼.
황제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된 예를 취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책잡지 못할 만큼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소인은 연씨 가문의 사람으로, 폐하의 궁에 무단으로 입궐한 죄는 간신배와 그의 뒷배들을 물리치고 난 연후에 받겠습니다.”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들리는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위의 눈빛과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놀랍도록 정명했다. 그 어울리지 않는 불일치가 묘하게도 연위를 신비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우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무도한……!”
그때였다.
“소위 무림이라는 곳에는 협의와 정의를 내세우는 백도 정파가 있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흑도 사파가 있다고 들었는데.”
용상에서 흘러나오는 나른한 목소리.
우헌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당황했다 하더라도 황제가 말을 하는데 그것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중 강동에서 가장 유명한 세력이라면 흑백정사를 불문하고 벽산(碧山)의 연씨를 꼽는다고 하였다. 그대가 연가의 가주인가.”
연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존귀하신 천자(天子)께서 일개 무부의 가문을 알고 계시니, 이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천자. 천자라…….”
기묘했다.
용상의 음영 진 곳은 희대의 고수 연위의 눈에도 그 실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잘 다듬어진 수염과 은근하게 드러난 눈빛만 보일 뿐, 황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구나. 나는 황궁에 자네들과 같은 무림인들이 들어온 줄 모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네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들어왔다는 것인데.”
순간 황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손쉬운 인정이었다.
“호오, 역시 그랬구먼.”
놀라운 것은 황제의 반응이었다.
용상에서 흘러 내려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나른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묘하다는 듯, 놀랍다는 듯.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 말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황후는 물론 우헌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강동에서 온 무부, 그리고 연씨. 알고 보니 황궁까지 그 소문이 들려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연씨의 가주라니 참으로 흥미로운 날이로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황제의 반응은 이곳에 있는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다른 걸 떠나, 당장 어전 밖에서 역모의 무리와 금군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지간히 떨어진 거리도 아니고, 정말 코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에게는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강호의 일대 고수가 어전의 문을 토막 내고 들어왔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뭐지?’
우헌은 생각했다.
‘평소와 다르다?’
궁에서 역모가 터졌다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물러나겠다 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럴 만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황제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쾌락을 선물했고, 또한 그곳에 이르도록 유도했다.
제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쾌락에 중독되면 사고가 느려지고, 평생 쾌락 속에 살 수 있음을 확신하는 순간 미래를 잊게 되기 마련이다.
황제가 그러했다. 천지가 개벽할 사건인 역모가 터졌음에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태감인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리를 비우려고까지 했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우헌이 자신했던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좋다. 누구의 도움으로 강호의 무사가 황궁에 들어왔는지는 묻어 두도록 하지.”
“…….”
“달인의 경지에 달한 칼 솜씨로 금군을 해치면서까지 이 자리에 온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연위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말씀드렸듯, 간신배와 간신배의 뒤를 봐주고 있는 사교 무리를 처단키 위함입니다.”
우헌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닥치지 못할까! 그 더러운 입으로 신성한 어전을……!”
그때,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감은 더 이상 무례를 저지르지 말게! 폐하께서 말씀 중이시지 않는가! 알량한 권세를 쥐었다고 폐하의 권위를 무시하다니, 정녕 제정신이란 말인가!”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기가 막힌 한마디였다.
우헌은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당장으로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쩌자고!’
설마하니 연위가 금군까지 해하며 이 자리에 들이닥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것은 황후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만약 연위의 입에서 자신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설령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정적의 코앞에서 커다란 약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리되면 시기의 문제일 뿐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황제가 그 부분을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지금 황후의 심장은 우헌만큼이나 거칠게 뛰고 있었다.
“간신배라…….”
“그렇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간신배가 여기 있는 태감인가?”
“그렇습니다.”
우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연위를 규탄하고 황제를 조종해 그를 사로잡도록 만들고 싶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 어전에서 물러나 금군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하.”
황제가 웃었다.
지금껏 후궁들 앞에서나 한 번씩 웃음을 비쳤던 황제가 이런 상황에, 처음 보는 무부 앞에서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재미있구나. 여기 있는 우헌 태감은 짐의 어깨를 짓누른 커다란 짐을 나눠 가져 준 고마운 사람이다. 짐에게 지극한 쾌락을 안겨 주기까지 했지.”
“…….”
“천하 어떤 충신이 이처럼 짐을 생각해 주겠느냐. 그런 충신더러 간신배라 하는 자네는 도대체 무엇을 보며 사는가?”
“올바름을 보고 삽니다.”
“음?”
연위는 더 이상 고개를 조아리지 않았다.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용상, 그 용상에 턱을 괴고 앉은 황제를 향해 당당히 말했다.
“공사의 올바름, 싸움의 올바름, 정치의 올바름.”
“…….”
“올바른 무(武), 그리고 올바른 사람의 도(道)를 보며 삽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한데 그리도 올바른 것을 아는 작자가 황명도 없이 황궁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칼을 든 채 어전에 침입하다니, 천하가 웃을 일 아닌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뭐라?”
“황궁이, 신하가, 제국이.”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황제 폐하가 올바르지 않은 것 같아, 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황후가 입을 쩍 벌렸다. 우헌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당돌함을 넘어 무례함이 하늘에 닿은 말에, 황제조차도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미친놈이!”
우헌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이 무도한 작자를 끌어내어 천참만륙을……!”
“그만.”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가 우헌의 말을 막았다.
“폐, 폐하! 저런 흉악한 작자의 요언을 가만히 두면 궁의 법도가 땅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황제는 더 이상 우헌을 향해 말하지 않았다.
“짐이 올바르지 않다고?”
“그리 보였습니다.”
“그리 보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모호합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스르륵.
황제의 자세가 바뀌었다.
깊게 음영 진 곳에 머리를 두니,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 내내 턱을 괴고 있던 황제가 비로소 자세를 바로 하였다.
“세상천지 누구도 짐에게 그따위 망발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도대체 자네는 무슨 근거로 짐을 음해하는가?”
“그래서 황궁이 이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라?”
“하늘에 이른 총명함을 자랑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시는 황제 폐하께서는, 비록 사교 무리의 악랄한 술수가 있었다고는 하나 잘못된 길로 빠지셨음이 분명합니다.”
착각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연위는 순간 음영 진 황제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라의 주인이 진창에 빠졌는데도 끌어낼 생각은커녕 목숨이 아까워 간언조차 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 판국. 그 또한 간신배의 흉포함 때문이라지만 올바른 충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리고 죽음을 불사했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맹이가 빠진 헛소리군. 자네는 황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까지밖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강호 무림의 알량한 명성을 믿고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면서까지 짐을 가르치려 들다니, 자네가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인가?”
“저만이 아닙니다.”
“……?”
“저는 물론 잘못된 국정으로 피폐한 삶을 사는 농부, 장사꾼, 저잣거리의 거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범법자는 물론 무림인까지 모두!”
연위가 눈을 감았다.
“그 모두가 폐하께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이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