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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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화. 가면 쓴 용 (5)
“…….”
고요하고 어두운 곳에서 짐승이 눈을 떴다.
선명한 붉은 광채에 끔찍한 살기가 어렸다. 그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늘의 저주를 받은 이. 타고난 살기를 기반으로 천연의 마기(魔氣)를 생성해 낸 역사가 있는 괴물이 그였다.
짐승이 입을 열었다.
“……불쾌하군.”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거칠기 그지없었다. 마치 쇳가루를 들이마신 것처럼 그르렁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야수의 목울음이었다.
“더러운 기운이 느껴져. 하지만 왠지 익숙해.”
짐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뭐지?”
그때였다.
끼긱.
철문이 열리고 한 명의 도사가 걸어 들어왔다.
무척이나 공손한 자세, 펑퍼짐한 붉은색 도복 소매엔 기이한 도형이 금사(金絲)로 수놓아져 있었다.
도사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일어나실 때가 아닌데, 어찌하여 벌써 눈을 뜨셨습니까.”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아주 불쾌해.”
“이상한 기운이라 하심은……?”
“무허, 그놈은 아니야. 역겨운 불가의 항마력(降魔力)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문의 정기(靜氣)도 아닌 것 같은데…… 거슬려.”
“……!”
“순도가 낮군. 극문(極門)을 열지 못한 놈이야. 한데 어인 일인지 신경을 건드려. 마치 무허 놈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 그렇습니까?”
“네놈이 쳐 놓은 금정주박부(禁正呪搏符)를 뚫고 들어온 기운이다. 네놈의 금정부가 몹쓸 물건이든, 아니면 내가 느낀 이 기운의 주인이 강한 잠재력을 품고 있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도사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금정주박부는 그가 만든 부적이었지만, 부적에 쓰인 주술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술법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 부적이 백일곱 장이다. 청정한 자연기가 출입지 못하는 공간에 음기(陰氣)와 귀기(鬼氣)만이 쌓이도록 온갖 조치를 취했다.
한데도 이 짐승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고 하는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아, 태감이…….”
“태감?”
“……죄송합니다. 화운비각의 부각주가 동이 트기 전에 황후 측 세력을 일망타진하여 황궁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운은 신화교 놈들의 기운이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근본이 달라.”
“그렇다면……?”
“불문이든 도문이든, 그도 아니면 정공을 익힌 정파든 중원의 놈이 황궁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극문을 코앞에 둔 놈이.”
극문이란 곧 무극을 뜻했다. 당대 천하에 온갖 고수가 들끓고 있다지만, 그래도 무극을 코앞에 둔 고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 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야.”
“예?”
“주박을 걷어라.”
도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부적술을 펼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다. 그 모두가 이 짐승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힘이 소진되려면 아직 반년은 더 남았는데 주박을 걷어 내라니?
“어르신.”
“걷어라.”
도사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아쉬워도 이 작자가 거부하면 별무소용이다.
‘빌어먹을 놈.’
도사가 손을 휘저었다.
화르르르륵!
사방 철제 벽을 장식하던 큼직한 부적 백일곱 장이 모조리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만드는 데에는 오만 공이 들었는데, 파쇄는 한순간이다. 도사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훅!
무너져 내리는 금정주박.
쇠사슬로 몸을 감고 있던 짐승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콰드드득! 치리링!
마치 진흙 더미를 풀어 헤치는 것처럼, 굵고 기다란 쇠사슬이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 땅을 굴렀다.
도사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우두둑!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천천히 허리를 펴는 짐승의 모습은 기묘한 공포를 유발했다.
씻지 않은 몸, 산발한 머리카락은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그럼에도 엉켜 있지는 않았다.
사악!
비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이 바닥을 쓰는 소리는 마치 뱀이 혓바닥을 날름대는 소리와 비슷했다.
“으음.”
쾌락이 묻어 나오는 신음.
맹수의 발톱처럼 뾰족하게 날이 선 손톱은 강철의 강도를 자랑했다. 살벌한 다섯 손가락이 바닥을 두부처럼 쉽게 파고들었다.
우두둑! 우두두둑!
온몸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켜 대지를 딛고 섰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앉은 채로 쇠사슬에 결박되었을 때는 그리 초라해 보였는데, 쇠사슬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시커먼 비늘을 단 교룡이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후우. 하아.
들숨과 날숨의 반복.
불끈! 불끈!
마른 몸 전체에 혈관이 돋아났다.
평평한 가슴에는 어느새 두툼한 흉근이 솟아났고, 등에도 근육이 붙기 시작하며 어깨가 벌어졌다. 나뭇가지처럼 얇았던 두 팔도 통나무처럼 굵어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변화였다. 내공의 고수가 큰 깨달음을 얻어 육신의 변화를 꾀하는 일이야 드물지 않았지만, 이처럼 극적일 수는 없었다.
순리가 아닌 역천이다. 자연의 당연한 흐름을 거부한 역천의 힘만이 이런 것을 가능케 해 준다.
도사가 눈을 부릅떴다.
샤아아악!
어느새 짐승의 널찍한 어깨 사이를 거대한 뱀이 오가고 있었다.
환상이자 실제였다. 짐승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기가 무시무시한 괴물 뱀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좋구나.”
짐승이 미소를 지었다.
손톱만큼이나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땡중 때문에 소실되었던 마력을 구 할 이상 되찾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침을 꿀꺽 삼킨 도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어르신. 회복을 경하드리옵니다만, 시간을 조금 더 들였다면 이전보다 더 막강한 마력을…….”
“웃기지 마라.”
“예?”
“극문을 열고 하늘을 노니는 자에게 내공의 양적 상승은 큰 의미가 없다.”
“하, 하지만 마기는 다릅니다. 더 많은 양의 마기는 어르신의 육신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런 줄 알고 기를 탐하다가 땡중에게 당한 것이다.”
“……!”
짐승이 등 뒤로 눈을 돌렸다.
사방이 철벽으로 막혀 있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군.”
“극문을 앞에 두었다던 그 고수 말입니까?”
“아니.”
“……?”
“금정주박을 풀라 한 것은 그놈 때문이 아니야.”
“하면……?!”
“그놈보다 더 강한, 극문을 연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극문을 연 놈.
즉, 무극을 돌파한 절대고수라는 뜻이었다. 도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짐승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신통한 곳이야.’
금정주박술을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든 이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술력으로 상단의 영력(靈力)을 과다하게 키워 준다.
주박을 풀었으니 이 공간의 술력도 곧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 공간이 주는 특성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대단한 놈이군.’
무극을 연 마(魔)의 군주는, 이 특별한 공간에서 또 다른 무극의 고수를 감지했다.
다급함으로 가득한, 하지만 그 근본에는 바닷물로도 끌 수 없는 무서운 살기와 광기를 지닌 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짐승의 눈에 탐욕과 반가움이 어렸다.
‘나와 비슷한 천성을 지닌 놈이 오고 있어.’
그가 도사에게 말했다.
“수욕을 마치고 어전으로 향할 것이다. 아랫것들에게 준비시키도록 해라.”
‘그놈’이 오기 전까지 묵은 때를 벗기고, 여인을 안고, 진미를 먹은 후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름 모를 그놈이 오면, 그때 나설 것이다.
쾅!
손짓 한 번에 철문을 날려 버린 짐승이 느릿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도사가 한숨을 쉬었다.
‘보고해야겠군.’
애초에 저 짐승은 신화의 사람도, 사음의 사람도, 광혈의 사람도 아니었다.
황제가 어찌 되든, 제국이 어찌 되든 저 짐승에게는 무가치한 일이다. 저 짐승이 원하는 것은 오직 피와 쾌락뿐이니까.
‘한데…….’
뒤이어 방을 나선 도사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무극이라니? 대체 누가 여기로 오고 있는 거지? 설마 성천이?’
* * *
퍼어어엉!
거센 폭음과 함께 황금빛 불꽃과 암청색 검기가 비산했다.
콰드드득!
인간을 초월한 두 초고수의 격돌에 신성한 어도 곳곳에 금이 갔다.
튕겨 나간 경력에 멀리 떨어진 건물 벽에도 구멍이 났다. 과격하기 그지없는 충돌에 신화교도들이 급히 거리를 벌렸지만, 차마 피하지 못한 한 명은 사지가 부러진 채 불타올랐다.
‘도대체가.’
사아아아악!
어두운 검기가 뱀처럼 휘어지며 기우헌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을 만큼 유연하고 날카로운 검기였다. 상시 발동하는 화벽(火壁)의 감각으로 읽어서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봉변을 당할 뻔했다.
‘정말 대단한 남자다.’
파아아악!
불꽃을 토해 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도 불꽃이 된다.
기우헌이 무게가 없는 불처럼 단숨에 십 장 거리를 좁혔다. 양발 주변에 불타오르는 불의 수레바퀴가 그 기민한 신법에 힘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기우헌의 주먹이 연위의 흉골을 향해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엉!
역수로 쥔 검을 사선으로 세워 기우헌의 염왕권(炎王拳)을 막아 내는 연위.
그 강력한 권경을 막아 낸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연위의 자세였다.
중심을 낮춰 힘을 받지도 않은 채 꼿꼿한 자세 그대로 손쉽게 막아 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사나운 기세를 풍기고 있었지만, 공방에서 보여 주는 특유의 올곧은 자태는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거냐.’
번쩍!
기우헌의 등 뒤에서 솟구쳐 올라온 네 줄기 화염이 기다란 꼬리를 그리며 연위의 몸을 노렸다.
권법도, 장법도 아니다. 오직 기공만으로 불덩이를 만들어 쏘아 낸 것이다.
발경의 출구인 장심(掌心)을 거치지도 않은 채 이런 공격을 구현해 낸다.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다.
연위의 눈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퍼버버벅!
사납게 휘몰아치는 네 줄기 검기가 상체로 날아든 금빛 불덩이 네 개를 순식간에 소멸시켜 버렸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금제순화공의 화력은 벤다고 꺼지지 않는다. 주인의 의지가 살아 있고 단전과 연결되어 있다면, 언제든 다시 합쳐져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연위의 검에 당한 불덩이는 그 순간 소멸해 버렸다. 검기에 실린 침투경이 기우헌의 단전과 이어진 발경의 근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우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화아아아악!
물러나는 와중에도 금제순화공의 화기는 더욱 맹렬해졌다.
그간 봉인해 두었던 무공을 완전히 개방했다지만, 내공이 너무 오랫동안 고여 있었다. 풀어 헤쳐진 내공이 몸 곳곳에 퍼져 정기신(精氣神)이 완벽히 하나가 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번쩍!
한 줄기 어두운 검기가 화살처럼 날아가 기우헌의 미간을 노렸다.
기우헌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타오르는 화염의 벽을 너무나도 손쉽게 꿰뚫고 들어온다.
‘하지만!’
퍼어어어엉!
화려한 폭음, 붉은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치다가 그대로 증발했다.
후욱!
기우헌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허공답보의 술수가 아니었다. 마치 무게가 없는 불의 인간이 된 것처럼 알아서 허공에 떠오른 것 같았다.
기우헌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검기에 뚫렸던 그의 손은 어느새 화정의 회복력으로 완전히 치유된 후였다.
“오래 기다렸다. 이제부터 나의 진짜 힘을……!”
“너야말로 오래 기다렸다.”
쿠르릉! 쿠르르릉!
기우헌이 적응에 시간이 걸릴 만큼 오랜만에 금제순화공을 개방한 것처럼.
연위 역시 이 경지에 들고 나서 처음으로 아수라팔검을 꺼내 들었다.
그 지독한 살심(殺心)과 예민함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천하의 고수라도 시간이 필요한 법.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던 연위의 동공이 완전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오라.”
기우헌이 굳은 얼굴로 손을 올렸다.
번쩍!
저 멀리 어딘가에서 쏘아진 한 줄기 화살이 어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기우헌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