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759)
759화. 천도(天道)의 변화 (4)
황궁은 넓다.
제국의 중심부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특히나 관무불침조약이 체결된 이후, 제국은 중앙의 힘을 모으기 위해 본래도 넓었던 궁을 더욱더 넓게 만들었다.
그 너비만 보면, 커다란 도시 두 개가 합쳐진 정도에 달했다. 지금의 황궁은 그러했다.
그만큼 사람도 많았고, 자연히 숨을 곳도 많았다.
너무나도 비대해진 황궁의 영역은 오히려 제국에 해가 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신화교, 화운비각의 이인자이자 오랜 시간 태감의 직위로 황궁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우헌이 죽고 그를 호위하던 고수들도 죽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화교의 핵심 인물을 죽였으니 상황은 더더욱 다급해질 터였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와 연위는 대담을 나누었다.
“우리 황후께서는 용정을 즐겨하시지. 내 그 차를 마셔 본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지만, 오랜만에 마시니 감회가 새롭구나.”
황제는 여전히 용상에 앉아 있었다. 음영이 잔뜩 진 용상에 앉은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보일 듯 말 듯 어둡기만 했다.
황후는 용상 바로 아래, 계단으로 이어지는 널찍한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그리고 용상에서 이 장 거리 앞, 작은 상에선 연위의 차가 고요하게 김을 피워 올렸다.
놀랍게도 연위는 편히 앉아 있었다. 황제가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용정을 마셔 본 적이 있는가.”
“예전에 한 번 마셔 본 기억이 있습니다.”
“별로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군.”
“용정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어떤 차가 입에 맞겠습니까. 그저 제가 즐기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차였습니다.”
“사치스럽다……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무가의 주인이라면 천금을 쥐고 흔들 텐데, 어찌 사치스럽다고 하는가.”
“소인은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었습니다. 그 이상은 제게 사치입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알 것 같구나. 감히 짐작건대, 그대는 평생 금은에 탐을 낸 적이 없고 보화에 눈을 빼앗겨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황송한 말씀이옵니다. 과거 혈기가 방장하던 시절에는 때때로 무리하게 돈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단한 게지. 천성이 무욕하다면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네는 욕망을 다스리고 군자로서 산 것이니.”
“황송하옵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있지만, 황제와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솔직담백한 태도였다.
하지만 연위는 개의치 않았고, 황제 역시 그러했다. 애초에 이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굳이 그리하라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이 분위기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해마다 질 좋은 용정을 보내 주겠네. 어떤가, 생각이 있으신가?”
“불인하기 그지없는 소인에게 그러한 사치는 독이 될 것이 자명하옵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성심으로 족합니다.”
“짐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두 분 폐하께서 즐기기에도 모자랄 것입니다. 소인은 가문 뒷산에서 나는 적당한 찻잎만으로도 충분하옵니다.”
“그대는 참으로 대담하고도 소박하구나.”
연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 무공에는 문외한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대의 무력이 실로 비범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어. 하여 묻겠네.”
“…….”
“지금 이 황궁에 그대와 대적할 만한 외적이 있는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외적들은 수십 년간 황궁에 암약하며 국력을 소모하 인재들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것은 금력과 권력, 그리고 무력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사료되는바.”
“음.”
“저들에게도 중원의 황궁은 놓쳐서는 안 될 곳임이 분명합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저에 모자람이 없는 고수들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확신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저조차 감당키 힘든 괴수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성천급의 고수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연위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강호의 소문을 알고 계시옵니까?”
“소문이란 이리저리 흘러가기 마련이지. 바람 따라 흘러가는 소문은 황궁에도 닿아 있어. 하물며 제국 입장에서 무림은 언제든 황궁을 향해 칼을 뽑을 수 있는 집단이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언제든 황궁을 향해 칼을 뽑을 수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내 연위는 수긍하고야 말았다.
무림은 백도 정파만의 것이 아니었다. 흑도도 있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림인들도 많았다.
애초에 백도와 흑도의 경계선이라는 것도 모호한바. 만일 제국을 대신하여 치안에 힘쓰는 백도의 힘이 약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무림이 황궁을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끝이 없으니까.
“그리고 짐의 휘하에도 한 사람이 있다네.”
“예?”
“성천의 고수 말일세.”
“……?!”
연위의 얼굴에 다시 한번 놀라움이 일었다.
“성천에 속한 이가 황제 폐하 휘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왜? 그럼 안 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그저 놀랐을 뿐입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대는 놀리는 맛이 없군.”
황후의 얼굴에 혼란이 일었다.
놀리는 맛이 없다? 애초에 황제는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후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국주이자 지아비인 황제가 누군가를 상대로 농담을 건네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제 그녀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지아비가 지금까지 가면을 쓰고 살았다는 것을.
왜 그렇게 살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당금 황궁의 권력 판도가 뿌리부터 뒤흔들렸다는 것이다.
황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가시방석도 이보다는 편하리라.
“짐에게는 정사의 구분이 필요치 않네. 다만 그대들에게는 그러한 지파가 중요한 모양이야.”
“……?”
“광혼귀군. 강호는 그이를 그렇게 부르더군.”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삼군!’
광혼귀군 곡경이라면 삼군 중 흑도 사파에 속한 절대고수였다.
신선제왕에 비해 한 수 처진다고는 하지만 그 무력은 능히 천하를 논한다. 다른 성천의 강자들처럼, 곡경 역시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천하제일의 명성을 떨치기에 충분한 고수였다.
“그리고 그이에게서 연락이 왔다네. 한나절 전에 말이야.”
한나절 전이라면 그들이 황후를 처음 대면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더구먼. 지금은 호북 무당산 인근에 있다 하네.”
“무당산이라면…….”
연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혹, 비왕이라 불리는 공손…….”
“틀렸네.”
“……?”
“비왕 공손백룡. 무림에서는 그를 그렇게 부르더구먼. 하지만 그 작자는 강호 무림에 뜻을 둔 자가 아니야.”
“하면?”
“삼교.”
“……!!”
“그중 광혈이라는 사이한 명칭을 쓰는 종교에 속해 있었네.”
연위는 깜짝 놀랐다.
공손백룡이 광혈교 소속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황제의 정보력이었다.
이전에도 얼핏 느꼈지만, 황제는 광신삼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숨죽이고 지내 왔던 것이다.
“공손백룡은 그간 황궁에도 여러 번 다녀갔네. 물론 짐이 직접 본 적은 없지. 지파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삼교로 묶여 있으니, 우헌 태감을 통해 황궁과 무림에 관한 여러 얘기를 나누었을 거라 짐작할 따름이네.”
한계였다.
짤막한 대화만으로 연위는 현재 황제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정보가 한 곳으로 치우쳐져 있다.’
황제는 무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광혼귀군을 휘하에 두고 있다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황궁을 점거한 신화교도들이 얼마나 많이 퍼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현재 황궁에는 신화교의 교도들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다. 사음교와 광혈교의 교도들도 소수나마 존재할 것이다.
황제는 그것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죽은 기우헌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을 테니까.
“참으로 용서하기 힘든 놈이지. 황궁의 무장이었던 작자가 무림으로 나가더니, 어느새 외적에게 붙어 버렸어.”
“……예?”
“공손백룡, 그자는 본디 황궁의 무장이었네. 대장군부 금군 소속이었지. 원체 재능이 뛰어나서 황궁 무고에 있는 여러 무공을 분해, 조합하여 여러 절기를 창안했다고 들었네.”
이건 또 놀라운 정보였다.
“물론 그자가 중간에 마음을 틀었는지, 아니면 무장이 되기 전부터 삼교 소속이었는지는 몰라. 중요한 건, 짐은 그 작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야.”
스륵.
용상에 등을 묻었던 황제가 자세를 고쳤다.
상체를 앞으로 내민 그의 자세는 이전과 달리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보였다.
“곡경 그 사람이 공손백룡을 잡으러 갔다네. 상대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곡경은 승산 없는 싸움에 바보처럼 돌격하는 이는 아니야. 분명 좋은 성과를 가져올 걸세.”
“……예에.”
“문제는 자네들이지.”
“예?”
“황궁과 무림은 관무불침조약이라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도 어설프기 그지없는 조약으로 분리되어 있네.”
“…….”
“하나, 무림맹에서는 자네들을 황궁으로 보냈네. 짐작하건대, 내가 아닌 여기 황후를 도와 태감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을 걸세.”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위가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짐작이 맞습니다.”
솔직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연위의 솔직함이 오히려 마음에 든 듯, 음영 밖으로 드러난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대는 그 많은 병력을 뚫고 어전까지 들어왔네. 아까의 대화를 상기해 보면, 황후 때문이 아니라 짐을 보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네.”
“그렇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무림맹은 짐을 도와 뒤틀린 황궁의 위엄을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연위가 고개를 숙였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관무불침의 조약이 버젓이 있는데도?”
“말씀드렸듯, 소신은 우둔하여 그 부분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그대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하였지.”
“그렇습니다.”
“그대가 무림맹의 의지를 대표한다고 봐도 되겠는가?”
“이 땅에 사는 이들 모두가 천자(天子)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림맹도 마찬가지, 만에 하나 그들이 삿된 목적으로 제국을 능멸한다면 소인의 검이 그들을 향할 것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가 함께한다.
물끄러미 연위를 보던 황제가 나직이 탄식했다.
“그 옛날, 내게 그대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면 많은 것이 편해졌을 걸세.”
“황송하옵니다. 소신은 일개 무부에 불과할 따름이옵니다.”
“아네. 그래서 더더욱 아쉽네.”
황제가 다시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병력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필요합니다.”
“태감이 죽었으니 저쪽에도 비상이 걸렸을 터. 외부에 연락을 취하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네.”
연위가 눈을 빛냈다.
“입궁 전, 사이한 작자들과 싸우면서 북천장 몰래 팽가에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호오.”
“이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곧장 준비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나?”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곡경에게 다시 연락을 해야겠군.”
그 시각.
여섯 필의 말과 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하남을 통과했다.